교회는 필요 없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지나 자로다.”(갈5:1-4)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믿어 구원 얻은 신자는 율법의 의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그 자유를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충족하니 모든 종교적 형식, 규정, 계명 등이 전혀 필요 없다고 합니다. 예컨대 교회나 주일성수의 무용론까지 주장합니다. 신자 혼자 성령의 인도로 십자가 은혜만 믿으면 족하다고 합니다.
성경에 언뜻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급이 나오는데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바울로 이 서신을 쓰게 만든 갈라디아교회의 거짓 주장은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말하자면 본문이 복음 안에서 극단적 자유를 지지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더러 율법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면서 대표적 예로 할례를 들었습니다. 만약 하나를 지키기 시작하면 나머지 전부도 다 지켜야 할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들어 온 자는 율법을 전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쉽사리 해석해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이 반대자들을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항복한 죄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지옥 형벌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뜻합니다. 결국 그들의 주장은 “구원 받은 자도 할례를 받는 것이 더 좋다”가 아니라, “구원 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추가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할례가 구원 받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오늘날 논쟁거리가 되는 사안을 그들 논리에 역으로 대입하면 이렇게 되는 셈입니다.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교회에 출석하고 주일을 절대 빠지면 안 된다.” 이는 누가 봐도 틀린 진술입니다. “구원 얻는 데 교회나 주일성수가 필요 없고 오직 십자가 은혜면 충분하다.”는 서술은 당연히 옳지만 말입니다. 바울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 뜻은 구원을 얻는 데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외에 어떤 인간적인 것이라도, 비록 하나님이 수여하신 모세의 율법에 규정된 것이라도 더 보태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교회, 교단, 교파, 주일성수, 기도, 은사, 헌금, 봉사, 전도 등은 이미 구원 받은 신자가 신앙을 성숙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방안들입니다. 구원 받는데 필수요소가 아닙니다. 또 이런 일들에 있어선 사람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며 사안에 따라 꼭 옳다 그르다 판정할 수 없는 것도 종종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언급된 방안이라면 당연히 시행하는 것이 신자에겐 유익하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문제는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교회에 출석하고 주일을 절대 빠지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있습니다. 바로 가톨릭입니다. 교회가 주는 일곱 성사를, 유아세례와 미사참석도 포함됨, 거쳐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복음 안에서의 극단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이 열렬히 반대할 상대는 기존의 개신교가 아니라 바로 이쪽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참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들에게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주일마다 함께 교회로 모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좇아 부르심의 소망을 키우고 실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배우고 그분의 멍에를 매고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어 그분처럼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을 삶에서 피 흘리기까지 실현하며 완성시켜나가야 합니다.
7/4/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