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20,21) 예수가 하나님인 진짜 이유(2)

조회 수 1061 추천 수 66 2009.08.03 19:5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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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하나님인 진짜 이유(2)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19:20,21)


아무 죄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선한 일만 하셨던 예수님은 역사상 최고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정치 9단들끼리의 기득권 싸움의 애꿎은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예수님이 죽고 난 다음에도 이어졌습니다. 이 마지막 싸움에선 빌라도가 대제사장에게 완벽하게 승리했습니다. 물론 그도 현실에 드러난 인간 사회의 승자일 뿐, 이번에도 궁극적 승자는 우리 주님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빌라도가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한 패를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그러자 유대 대제사장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 써달라고 요구했고 그는 내가 할 바를 마땅히 했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총독의 권한을 십분 발휘에 이번에는 자기 뜻대로 했기에 승리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참으로 음미할만한 교묘하고도 음흉한 또 다른 수 싸움이 숨겨 있었습니다.

먼저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한 명이어야 하는데 복수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나스가 사위 가야바뿐 아니라 아들 다섯 명에게도 대제사장직을 주었습니다. 당시 총 7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던 셈입니다. 가야바가 유대관원들을 설득할 때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자기 집안”을 위해 꼭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로마는 이두메 출신의 헤롯 가문들로 유대의 분봉왕으로 이미 세워두었습니다. 행정적 법률적으로는 헤롯이 왕이지만 안나스 가문은 유대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 왕가로 군림한 셈입니다. 어쩌면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불리는 것 자체가 자기들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들의 심리를 당시 정황에 비추어 추측해 본 것뿐으로 대제사장이 공식적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빌라도의 팻말을 싫어한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여 놓으면 무식한 민중들이 은연중에 그 말대로 인정하게 될 여지를 미리 염려한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자꾸 특정한 이름을 불러주면 결국 그 이름 뜻대로  되는 일이 많듯이 말입니다. 성경이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20절)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선포를 인정해주는 꼴이 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습니다. 유대 세상의 왕 헤롯을 빼고 정신적, 영적주도자는 대제사장 자기들이어야지 나사렛 출신의 아무 근거 없는 젊은 사형수가 될 수는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조금만 따져 보면 너무나 야릇한 요구 아닙니까? 또 참으로 사태는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참소한 이유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임명한 헤롯왕이 엄연히 있는데 자기를 왕이라고 선언하면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셈이라고 강변했지 않습니까? 정작 로마 총독인 빌라도조차 예수님에게 반역할 의사라곤 하나 없다고 판단했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 쓰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남들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데, 또 반역할 움직임도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단지 스스로 왕이라고 떠들고 다닌 자였다는 뜻이 됩니다. 비유컨대 과대망상증 정신병자로 몰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만 골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여 사람들로 더 이상 추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에 더 혈안이 되었습니다. 저주 받은 사형수 위에 미친 사람이라는 대제사장으로서의 해석 내지 판결을 빌라도 대신에 써 붙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자기들의 고소 이유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반역할 의사나 움직임도 없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한 미친 사람을 기어이 반역 죄인이니까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놓고는 이제는 사실은 그가 왕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재판이 끝나고 형이 집행되자마자 증언을 번복한 셈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누가 봐도 거짓 증언을 한 것쯤은 당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엄격히 가르치며 신실한 본을 보여야 할 대제사장들이 십계명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그들 요구대로 예수를 처형시켰기에 더 이상 유대인 대제사장들에게 밀릴 이유가 없다면서 앙심을 품고 거절한 것입니까? 물론 그런 면도 다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당시 십자가 처형을 하면 누구나 봐서 알 수 있도록 반드시 공식적인 즉, 재판에서 확정된 죄목을 써 붙어야만 했습니다. 세 가지 언어로 쓴 이유도 그것입니다.

만약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패를 붙이면 빌라도 스스로 재판을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꼴이 됩니다. 그야말로 아무 죄도 없는 한 미친 사람을 헛소리 몇 번 했다고 가장 참혹한 십자가로 죽인 부패한 공직자로 전락합니다. 그것도 식민지의 대제사장들의 사주를 받았거나 최소한 결탁하여서 말입니다. 미워서라도 대제사장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로마 황제를 대표한 총독이라는 공인으로써 도저히 해선 안 될 행위였습니다. 자칫 이제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이 문제로 황제에게 직소(直訴)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의 (마땅히) 쓸 것을 썼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후 상황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빌라도는 최소한 자기가 맡은 직무에는 충실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대제사장들은 직무에, 그것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임에도, 충실은커녕 단순히 한 인간으로서 상식적으로 지켜야할 금도(襟度)마저 앞장서서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님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야말로 완전히 미쳤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유대인의 왕이었고 대제사장들이야마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또 다시 너무나 놀랍고도 신기하게 이런 진리를 예수님이 스스로 확증시켰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미 죽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재판 과정 중에도 자신에 대한 변론을 단 한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로마제국이 보장해주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습니다. 물론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께서 실제로 만왕의 왕임을 사람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당신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도 당대 최고수 인간들의 지략 싸움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가게 된 모든 과정은 인간의 상식, 양심, 율법, 도덕과는 전혀 상관없이, 심지어 로마의 법률과도 동떨어진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는 아무도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빌라도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비록 아내의 흉한 꿈 이야기를 들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진리와 절대자에 대한 태생적 경외심 때문에 그랬을지라도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미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및 군인들과 유대 관원 및 모든 유대 군중들이, 심지어 가룟 유다를 필두로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얼마 동안 미쳐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공공질서와 민족과 율법과 종교를 지킨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속에는 너무나도 음흉하고 더러운 인간들의 탐욕, 자존심, 교만, 죄악 등이 얽히고설킨 채 아주 추하고 썩어빠진 죽음의 냄새를 피우고 있지 않습니까?

재차 말하지만 당시로선 아무도 그 냄새를 맡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전체에 흑암의 그림자는 완전히 뒤엎은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벌건 대낮에 태양이 빛을 잃고 칠흑 같은 어둠이 온천지를 덮었던 사실을 이제 그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성내에 있던 모든 인간들이 사단의 그물에 완전히 포획당해 그가 하자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의 모든 인간이, 극소수 하나님이 택하신 당신의 종들을 빼고는 사단의 노예였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참소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는 비유컨대 완전히 록밴드의 콘서트 장의 광분하는 청중이나, 히틀러의 선동 연설을 듣고 열광하는 청년근위대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 주님을 동정하는 사람들은 딱 부러지게 이유나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사태가  왠지 잘못되어 간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간혹 그 중 일부는 이런 잘못과 모순에 대해 도무지 항거할 의욕도, 의사도, 기분도 전혀 나지 않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부 일종의 광풍(狂風)에 휩쓸린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이상한 것은 사태가 일단 종결되었으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해결되었어야, 최소한 아무 일이 없었던 양 잊어버리기라도 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두가 까닭 모를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아주 심하게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너무 잘못했다는 사실을, 아무 죄 없는 자를 죽였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말도 안 되는 재판인줄 빤히 알고도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십자가에 죽여라고 소리 질렀는지 스스로도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동시에 방금 일어난 십자가는 정말 비상한, 역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음을 부지불식간 느꼈을 것입니다. 뭔가 인간 세상에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은연중에 인정했을 것입니다. 세상에선 아무래도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왠지 하늘에서 빛이 비추어졌다고 감각적으로라도 인식했을 것입니다. 또 이 일로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은커녕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어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건의 여파로 또 다른 아주 비상한 사태가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은 가졌을 것입니다.

나아가 방금 십자가에서 죽은 젊은 랍비가 보통의 랍비가 아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로마 총독이나 대제사장들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조차 없는 비상한 인물임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겉으로 말은 안했지만 십자가 바로 곁에서 주님을 바라본 로마 군병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고 고백한 것과 똑 같은 심정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을 넘어서 진실로 당신께서 자신을 묘사한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무언중에 주관하셨듯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시겠다는 당신의 말씀대로 정말 무덤의 돌은 저절로 굴러져 열렸고 당신께서 누워있던 자리에는 세마포만 남아 있었습니다. 어렴풋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자, 인간 세상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자, 앞으로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 감만 잡고 있었던 바로 그 일이 실제 현실로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완전히 명백해졌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그분에 대한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순전히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 당일에 이뤄진 일만 보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순전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한 것이 더 정확할 때가 많듯이 말입니다. 이제 까닭 모르게 흑암의 세력에 눌려 있었던 인간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 민중 전부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예수님의 제자들만은 수난 받는 종으로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만났고, 배움을 얻었고, 기도도 받았고, 고침을 입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으로 인해 영원한 빛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이 땅에서의 어떤 모순과 질곡과 환난과 고통과 죄악이라도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이전의 스승, 지금은 자신의 구주인 예수만 모시고 살면 되었습니다. 지상에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 자기들을 한 시도 그냥 두지 않고 함께 하심을 확신, 아니 완전히 체험하고 서로 동행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선 사단이 덮어씌운 죽음의 그림자뿐이었고 사람들 모두가 탐욕과 죄악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헤어 나오질 못하고 같이 미쳐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에선 영원한 하늘의 광채가  풍성한 참 생명과 함께 온 천하를  비추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이 죽었지만 무덤에 갇히어 있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영계에서조차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깨부수고 이 땅에 영원한 죽음의 절망 대신에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생전에 그분은 인간을 불치병에서 단번에 완전히 낫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고통도 그분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자 창조주였습니다. 폭풍과 거친 파도도 말씀 한 마디로 잠재웠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치 운행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은 후에도 인간의 모든 죄악을 오히려 당신의 사역의 경로로 삼아서 모든 지략을 다 동원한 사단마저 전혀 꼼짝 못하게 묶어 버렸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의 영원한 주관자도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와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이제 우리가, 아니 모든 인간이 할 일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오늘날 빌라도나 대제사장 같은 위치에 있는 자들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는 최선의 수를 모두 동원했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라고 공식적으로, 그것도 자발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또 그 전후로 사단의 아주 충직한 종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않습니까?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의 어느 인간에게도 유일한 소망이자 참 생명은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이름을 예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쓴 팻말의 뜻입니다.

“그는(예수님)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8-20)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당장에, 또 평생토록 해야만 할 한 가지 일은 바로 예수님의 충만하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분 밖에 있으면 절대로 그 인생에 충만이 없습니다. 부활의 소망보다는 죽음의 절망만 맛볼 뿐입니다. 자기 딴에 세상 최고의 술수와 권력을 동원해서 이 땅에서의 형통과 안락과 출세를 추구해본들 여전히 사단의 수하 노릇을 면하지 못하며 때로는 사단이 덮어씌우는 광풍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뿐입니다.

그럼 신자란 어떤 자여야 합니까? 정확하게 그 반대여야 합니다. 자신의 인간적 탐욕과 세상의 죄악과 사단의 술수 앞에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당당하게 맞서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충만을 누리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실제로 맛보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달린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로 쓰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겪더라도 자신의 모국어로 “나의 왕 예수”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그분의 충성된 종으로 행하면서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고 있어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인 줄 확신하고 그에 합당한 절대적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8/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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