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1:20-22) 기도 응답의 이중성

조회 수 1168 추천 수 43 2009.10.09 13: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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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의 이중성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0-22)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로 말라버리자 제자들이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인즉 믿음으로 의심치 않고 기도하면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일도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웃지 못 할 무리한 해석과 적용이 가끔 나타납니다.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약속했기에 기도하는 것마다 전부 응답된다고 여깁니다. 또 다 응답되므로 자연히 기도할 때부터 미리 무엇이든 완전히 응답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한 일이 어차피 미래에 다 이뤄진다면 기도란 그 시기만 앞당기거나, 이뤄지는 방식을 자기에게 더 편리하게 바꾸는 절차로 전락합니다. 또 자기가 원하는 무엇이라도 다 응답이 되면 인생사의 주인은 기도자이고 하나님은 종으로 전락합니다.

나아가 기도로 어떤 큰 기적도 일어날 것이므로 계획을, 사실은 거의 자기 욕심이지만, 아주 크게 혹은 무리하게 잡고서 기도하는 경향마저 생깁니다. 산이 바다에 던져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언급은 비유이지 예증(例證)이 아닙니다. 비유란 문자적 의미보다 그 상징하는 내용에 주목해야 하는 반면에 예증은 문자적 표현이 바로 실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언제 어떻게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나았다는 것은 예증이지만,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당장 멈추라고 기도해도 이뤄질 것이라 하면 비유입니다.

산이 바다에 던져지거나, 지구의 움직임이 멈춰 선다면 하나님이 당신께서 완벽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다시 뒤엎는 일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일입니다. 아무 정당한 이유, 그것도 하나님 쪽의 뜻도 없이 단지 신자가 원해 기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슨 일이든 성취(?)되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산에 생존하는 동식물을 신자가 기도했다고 다 죽음으로 내모는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 신자의 기도를 통해 큰일을 이루시고 때로는 기도한 것보다 훨씬 더 큰일도 이뤄내십니다. 사막이 옥토로, 그 반대로 큰 성읍이 광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비유이기에 그 숨겨진  뜻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인간이 어떤 수를 동원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말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천지가 개벽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지 말고 자기가 알아서 해치우고 기적 같은 일만 기도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기도의 근본은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이지 않습니까?

풀어서 설명하면 “저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완벽한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그 모두를 내어 드리오니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능히 할 수 있는 인생사도 많지만 그조차도 하나님의 너무나 선하고도 신비한 주권과 섭리 아래에 있습니다. 기도자의 근본 마음자세는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신다는 철두철미하고도 겸허한 신뢰여야만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곧바로 말라버린 까닭도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처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선언만 했을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신자더러도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렇게 선언하라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당시 상황에서 제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의미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 보통명사로서 모든 “산”이 아니라 “이 산”이라고 특정한 산을 지정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헤롯 궁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의 언덕이거나, 사해를 전망할 수 있는 헤롯의 별궁이 있는 산을 가리켰으리라 해석합니다. 어느 산이든 지금 사건이 벌어진 베다니에선 육안으로 멀리 보입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바다라고 하면 가장 먼저 사해 바다를 연상했습니다. 한마디로 기도하면 헤롯 궁전이 사해에 던져지는 일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도 신자가 진정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응징해 이 땅에 공의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베를린 장벽과 소련제국이 붕괴하는 일들이 동독의 이름 없는 작은 교회의 기도 운동에서부터 발단되었듯이 말입니다. 당시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너무나 급격하게 피도 흘리지 않고 벌어지는 바람에 전 세계가 기적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리킨 “이 산”을 보며 하나님의 벌 받을 대상으로 헤롯을 혹은 각기 나름대로 그려보지 않았겠습니까?

의외로 정말 기도하는 것마다 전부 다 이뤄진다고 믿는, 사실은 착각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솔직한 내면으로는 잘 믿어지지 않는데도 억지로 이뤄진다고 자꾸 자기 마음에 최면을 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로또에 걸리리라 믿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아무리 신자가 궁한 처지에 빠져 있어도, 응답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예수 믿지 않는 악인들은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데 세상에서 떵떵거리도록 남겨두지 말고 지금 당장 죽여 달라는 기도도 들어주지 않을 것 압니까? 그럼 갑자기 이상해졌습니다. 헤롯 일당을 엎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확약했지 않습니까?  

신자가 정작 주지해야 할 사항은 우선 하나님은 절대 당신의 뜻 외에 어떤 것으로도 영향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자주 그대로 응답해주시지만 당신의 뜻과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헤롯 같은 악한 세력도 반드시 응징하시지만 때와 방식은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습니다. 또 이 땅에서 현실적 심판을 받지 않는 것 같아도 죽어서 기다리는 것은 지옥이며, 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더럽고 추한 힘에만 묶여 있게 만드는데 그것 자체가 오히려 더 큰 벌입니다. 예컨대 김정일 위원장과 그 아들이 계속 득세하게 두어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뜻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또 심판의 때와 방식은 우리 예상, 기대, 추측과는 다르게 예비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기도가 갖는 이중적 성격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자가 미리부터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무슨 일이든 기도해야 한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또 그래서 가능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하되 그 응답되는 때와 방식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는 차원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많은 신자들이 기도에 대한 이런 간단한 원리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지만....

기도가 이미 응답된 것 같아도 사실은 아직 응답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그 반대로 전혀 응답되지 않았고 도무지 언제 응답될지 오리무중인 것 같아도 벌써 응답된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또 너무나 작게 응답된 것 같아도 사실은 아주 크게 응답되었고, 그 반대로 너무나 크게 응답된 것 같아도 사실은 아주 작게 응답된 경우도 많습니다.

기도 응답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아도 너무나 크게 발휘된 경우가 많으며, 그 반대로 그 영광이 너무나 크게 드러난 것 같아도 사실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너무나 유익하고 선한 응답인 것 같은데 오히려 해롭고 악한 응답인 것도 많으며, 그 반대로 나에게 너무나 해롭고 악한 응답인 것 같아도 오히려 유익하고 선한 응답인 경우도 많습니다.  

한 마디로 응답이 아닌데도 응답으로, 그 반대로 응답인 줄 알아도 응답이 아닌 적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경우가 생깁니까? 기도나 응답 모두가 초자연적인 신령한 역사라서 그렇습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신자가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으로, 그것도 오직 자기가 기도한 내용과 소원만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자기 생각대로 안 되면 기도 응답이 안 된 것으로 여깁니다.

기도라는 종교적으로 가장 겸비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일 뿐입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이미 이뤄졌다고 믿고서 기도만 죽어라고 해댑니다. 하나님께 읍소를 했다가, 고함질렀다, 협박도 했다가, 불평을 잔뜩 늘어놓았다가. 신경질도 부리다가 때로는 분노마저 터트리면서 말입니다. 몇 끼 굶은 갓난아이가 엄마에게 젖 달라고 매달릴 때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하셔야 합니다. 간절히 끈질기게 정말 군급하면 울부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분노와 의심을 갖고 나와도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지만 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기도해도 됩니다. 그만큼 위급하고 진정으로 소원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자신의 종교적 실력을 자랑하려고 형식적인 미사여구를 잔뜩 늘어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절대적 뜻보다 기도라는 방식 자체가 능력이 있기에 더 많이 기도하면 더 크게 빨리 응답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미 신자의 사정을 꿰뚫고 계시고, 아니 그 이전에 이미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계획 가운데 신자의 일생을 붙들고 있음을 확신하라는 뜻입니다.

기도에서 요점은 이것입니다. 어떤 일을 내 믿음으로 변화시키려 소원하기보다는 그 일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소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의미와 그 응답에 이중적 성격이 있다는 뜻도 기도한 후에 가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에만 일차적인 초점을 맞추거나 우선적인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도덕적 영적으로 의로워지는 주제만 기도하고 현실적 일은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가 무엇을 기도할까 하는 내용보다는 사실은 신자 자신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환난과 문제를 두고 기도했기에 신자로서 할 바를 다했다거나 하나님이 무조건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지레짐작이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온전한 계획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는 신자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기도해야 하는 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내 일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일이 나를 통해 이뤄지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먹고 마시고 입는 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직은 그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모르니까 우선 내 주변 사항부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신자로 오직 경건한 종교인으로만 바꾸거나, 항상 개인적으로 손해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며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그분의 영광을 목도하고  자신 또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먹고 마시는 일만 기도하는 자는 , 풍요롭고 화려하게 구하지 않고 평균 수준으로만 살려 하고 심지어 현재의 급한 문제만 해결하려 해도, 비록 그 문제가 해결될지라도 평생 그런 기도에만 매달려 하나님의 영광은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감히 조금 바꿔 보겠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일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이뤄진다고 확신하며 또 너희를 통해 그 일을 이뤄줄 것을 진정 간절히 소원한다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 같은 일도 다 받으리라.”

10/9/09

김광찬

2009.10.09 23:16:27
*.169.140.67

아멘 †

정순태

2009.10.09 23:21:14
*.75.152.223

아멘!!!

김형주

2009.10.10 12:05:49
*.173.42.18

아멘!!!

아가페

2009.10.11 14:26:40
*.241.61.6

목사님~ 글과는 좀 벗어난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지금까지 저에게 한 사람의 인생 스토리가
눈물을 펑펑 흘리게 까지 하며 마음에 감동과 결단을
가져오게 했던 세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죠지뮬러 선교사님,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 이십니다.

오늘 안그래도 중등부 예배때 죠지뮬러 얘기를 잠깐 했었는데
저는 죠지뮬러의 인생을 참 본받고 싶습니다.
물론 저의 궁극적 목표는 예수님의 인격과 삶 이지만요~~

그런데 그러한 삶을 실천하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그러한 얘기를
하면 솔직히 안좋은 소리를 들을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준비하고 노력하지 않고 기도만 해서 거저 얻어 먹을려고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더군다나 선교사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제정적인 문제가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생각되겠죠..

물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삶을 살게하는 방식은 다르겠
지만 저는 죠지뮬러와 같이 살 때 마음에 평강도 있고 기쁨이
있고 간증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주위에서 계속 그런 이야기들이 들려질때
저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운영자

2009.10.11 15:14:44
*.108.161.155

조지 뮬러와 같은 삶을 해석하는 관점이 전도사님과 주위사람이 다른 것입니다.

먼저 주위 사람의 “자신이 준비하고 노력하지 않고 기도만 해서 거저 얻어먹으려고 한다”는 해석은
자신의 재정적 필요를 오직 기도로만 채우려는 자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을 자기 문제 해결하는 목적으로만 동원하고 그 수단으로 기도라는 가장 손쉬운 길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조지 뮬러는 자신의 재정적 필요는 부차적이고도 결과적 문제로만 보았습니다.
그의 일생의 목적은 오직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된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 기도하는 내용이 자신의 안일과 형통을 위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고아원을 운영하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가 초점을 맞추는 내용이 조금 어긋났습니다. 그 일에 소요되는 재정적 필요를 하나님이 무조건 다 채워주신다는 뜻으로만 기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재정이 많든 적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더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고아 수가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그에 적절한 헌금이 들어 왔다는 뜻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바대로입니다. (빌4:10-13)
자신의 재정이 풍부하든 궁핍하든 자신의 사역은 아무 지장 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뤄내시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족한 것도 단순히 근검절약이 아닙니다.
자신이 현재 어떤 형편에 있든, 다지 강조하지만 심지어 풍부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자신의 그 형편과 (특별히) 사역에 절대 부족하지 않고 넘치도록 채워짐을 확신했고, 아니 실제로 체험했기에 저절로 속에서부터 충만으로 채워지며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자족입니다.

요컨대 조지 뮬러가 놀고먹겠다는 놀부 심보로 기도로만 필요를 채운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일에 헌신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워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그의 고아원이 항상 넘치도록 풍부했던 것이 아니었고
때로는 아주 적은 양의 식량으로 십시일반으로 나눠 먹은 적도 많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 고아들이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이지 않습니까?(마6:31-34)
주님의 일에 정말로 헌신하며 그에 꼭 필요한 것은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지,
먹고 남을 여유분이나 더 맛있는 것 등 자기가 욕망하는 것까지 구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가페님이 진정으로 염려하고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할 것은
단순히 주의 일을 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채워줄 것이라는 원리만 제 일의 금과옥조로 삼으려 든다면
자칫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대로 공짜로 먹을 심보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임사역자라면 그보다는 오직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진정으로 소원하는 차원을 넘어 갈망하는 단계까지 되어야 하며
뜨거운 열정과 기쁨으로 넘쳐야 합니다. 사역을 하고 있으면 가슴이 뛰고 벅차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전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심령에 부대끼는, 쉽게 말해 인생을 살아갈 재미가 전혀 없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굶기시면 굶는 것입니다.
또 수시로 굶는 일이 생기는 데 어떻게 기도해서 공짜로 먹으려는 심보라는 비난이 성립될 수 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또 나는 굶어도 좋다, 굶은 것이 나의 면류관이다,
너희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잘못 비난한다고 같이 그들을 비난한다면 영적 교만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주님과의 진정으로 친밀하고 깊은 교제의 맛을 못 느꼈을 뿐입니다.

따라서 상기의 제 글의 마지막 결론이 특별히 사역자가 기도하는 자세에 적용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일이 우선이면 굶어 죽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나 그렇게 쉽게 순교시킬 리도 없지만,
그렇게 죽어도 그 자체에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고 그분의 영광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알기 쉽게 말해
복음 전파가 먼저이고 오직 그 일을 위해 기도할 때에 그 재정적 필요도 함께 기도하는 것이지
공짜로 먹으려 의도도 하지 않았고 또 그런 뜻으로 기도도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주위 사람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일 일이 없는 것 아닙니까?
반면에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인다면 솔직한 내면에 혹시라도 그런 공짜 심보가 있었는지
오히려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그런 말들이 조금 거슬린다는 뜻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샬롬!

아가페

2009.10.12 03:57:57
*.241.61.6

박목사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속내를 모두 털어놓고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살다보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뜻이 제대로 전달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구요~

메일로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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