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로마 지하 감옥에서 사형을 눈앞에 둔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권면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권면이 가능합니까? 단순히 종교적 수사에 그치는 것입니까? 물론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죽음 자체는 심히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모든 일에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간구하라고 당부했을 것 아닙니까?
그의 평강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빌3:14) 왔기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딤후4:8),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빌3:11)는 견고한 소망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구원이 천국에서 영광된 모습으로 완성될 것을 확신하기에 육신적 죽음에 대한 염려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주께서 가까우신 것”을 염려 극복의 근거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 곧 재림하실 주님이 자기를 천국에서 영화롭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다면 초대 교회의 극심한 핍박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확신의 바탕에서 모든 사람을 관용으로 대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신 대로입니다. 관용으로 대할 모든 사람에 원수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할 모든 일에 핍박자의 구원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평강은 궁극적으로 천국에서의 구원의 완성을 바라봄에서 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현실의 환난이 해결되어야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쉽게 말하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서 얻는 평강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까 너무나 놀라운 결론에 이르지 않습니까? 원수는 갈아 먹어도 시원찮기에 우리 믿음과 실력으로는 도무지 꿈도 꾸지 못할 일을 예수님과 바울은 어찌 이렇게 당당히 명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천국과 부활은 확실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온 신자에게는 그 영광이 절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인간의 상상에서 고안해 낸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의 우두머리요, 바울은 그 직속대장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절대로 없지 않습니까? 거짓의 아비는 사단입니다. 말하자면 사단은 신자들로 천국과 부활 소망을 자꾸만 약화시키기 위해 현실의 문제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또 특별히 원수에게 이가 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 안에서”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까 하나님이 범사에 형통케 해주시므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는 당연히 아님을 주위에 고난 가운데서 당장 나아질 기색이 없는 수많은 성도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런 미혹 가운데 있는 신자가 꽤 많습니다. 아니 그렇게 부추기는 강단이 더 큰일입니다. 진리는 절대 사람을 미혹하게 하지 않으며 거짓의 아비만이 그렇게 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따져 봐야할 주제인데도 오히려 그렇게 미혹하는 교회가 주류가 되어 더 큰 소리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주 안에서”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결과가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바울 서신서에서 아마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예컨대 에베소서에만도 35회나 등장합니다. 본문도 앞에 나오는 서술과 연결된 의미입니다. 즉 신자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3:10,11)는 것입니다.
또 신자는 세례 의식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주 안에 있다는 의미는 세례 때에 고백한 믿음을 변치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실하게 교회 활동을 한다고 해서 주 안에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대신에 진정으로 주 안에 있는 자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히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 세례 믿음을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4,5)
따라서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썩어가던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고 이제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기에 궁극적인 종착지인 부활만 바라보며 이 땅에서부터 주님을 닮은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면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에 즉,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라는 바울의 지적대로 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죄의 심판과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자유를 얻었으므로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자세를 지닌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주 안에서 얻는 평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 되었고 지금도 그분과 연합하여 항상 교제 동행하고 있으며 장차는 부활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 객관적 사실을 붙들고 있음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이전의 너무나 죄 많고 추했던 자기를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음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중생의 너무나 큰 기쁨이 있었기에 그 후로는 오직 구원의 완성의 소망을 계속 키워나가는 것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평강의 본질인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신자가 구원 얻은 기쁨만으로 평생 염려 없이 지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정신병자입니다. 신자에게도 고난과 핍박과 상처들이 따라 다닙니다. 또 그러니까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이 성립됩니다. 그런 힘든 일이 없다면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는 권면도 아예 필요 없을 것 아닙니까?
신자란, 궁극적 소망이 없기에 현재의 환난과 실패와 상처를 처리하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라진 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잠시 지나갈 환난의 경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입니다. 또 그 환난의 경(輕)한 것에 비해 자신을 위해 이미 완벽하게 예비 되어 있는 천국의 영광이 엄청나게 중(重)하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자입니다.
감사함으로 간구하라고 해서 환난을 없애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비록 그 환난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도, 마음속의 불안 염려를 없애준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은 진심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도하면 자주 일어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시 염려가 우리를 좀 먹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단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삼키려 노리며 우리 체질 또한 아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신자가 평강을 얻으려면 언제 어디서나 바로 주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계속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진리를 알아 자유케 되는 길만이 세상이 절대 빼앗을 수 없는 신자의 가장 큰 위로이자 힘입니다. 나아가 서두에서 말한 대로 그래야만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그러는 것이 주안에서의 진정한 평강을 누리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바꿔 말해 아무리 환난이 사방을 가려도 정말로 주 안에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10/14/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