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19:18) 엘리야의 결정적 잘못

조회 수 761 추천 수 22 2010.09.29 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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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결정적 잘못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엘리야의 영적 침체의 원인은 우리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는 주변 상황이 어려워져서, 혹은 자신의 죄성과 나태함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가 악의 세력에 막혀 있고 또 그 장벽을 대적할 그분의 종이 자기 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의 침체는 우리 겉 사람이 후패해진 것에 대한 염려와 불만에서 기인한다면 엘리야는 자기 겉 사람은 어떻게 되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거나 약해진 데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 문제가 해결되거나(?), 죄와 정욕을 회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힘듭니다. 반면에 엘리야에게는 산골짜기에 숨어있어도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통해 본문과 같은 회복의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비록 자기 생명을 하나님더러 앗아가 달라고 간구했지만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정녕 믿음의 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위인조차 결정적 잘못을 하나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고 도망부터 갔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도 미처 몰랐던, 아니면 잊어버렸던 영적 원리가 하나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모든 사역자는 항상 고독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혼자서만 지는 법입니다. 여럿이서 함께 지지 않습니다. 물론 각자가 십자가를 지고 함께 모여서 걸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각자가 각기 자기에게 맞는, 사실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고유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그랬지 않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사실 사역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일대일로만 신자를 만나주십니다. 그것도 완전히 겸비하게 되어서 진정성과 갈급함을 갖고 엎드릴 때에 한해서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인지라 항상 개인적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이가 개입하여 그 개인적 관계에 영향을 줄 수는 결코 없다는 면에서 모든 신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특별히 사역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만 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열심히 함께 사역하는 중이라도 그 생각과 영혼만은 주님과 일대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하기에 아무래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분의 말씀을 듣기 힘듭니다. “제가 여기 혼자 서있나이다. 주님 가라시면 어디든지 주님의 말씀을 들고 가서 죄악과 사단과 사망과 당당히 싸우겠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저를 보내 주시고 또 저에게 말씀해 주시옵소서.”라고 아뢰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 두드러진 것이 바로 일생을 두고 고독했다는 것입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라합 모두가 이 세상에선 철저하게 혼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주시는 특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주위에 아무리 사람과 사건들이 많았어도 여전히 외로웠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뜻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삼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조차, 그것도 역사상 가장 권세 있는 스승으로부터 그 의미에 대해 여러 번 가르침을 받고도 그랬습니다. 주님은 철두철미 고독한 가운데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나 교제 동행하고 있는 자라면 반드시 고독해야 합니다. 또 실제로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기에 자연히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가치관, 생활방식, 선호도, 취미 등을 가진 자들끼리 교제하기 마련입니다. 비록 몸은 이 타락한 세상에 있지만 하늘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방식으로 사는 신자에게 사람들이 모일 리는 없습니다. 갈채와 환호와 추종은 신자, 특별히 주의 종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입니다.

심지어 교인들 사이에서, 교회 안에서도 고독해야 합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신령한 모임, 행사, 프로그램, 찬양, 예배 중에도 그래야 합니다. 아니 주님과의 일대일의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기에 더더욱 고독해지는 법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일반 신자도 그러한데 주의 종이 되어서 외롭다는 사실이 불만이라면 잘못이라는 뜻이 됩니다. 힘들고 불편하기도 해도 말입니다. 예수님 따라서 골고다 언덕으로 기꺼이 걸어가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성경 기록의 진위 여부에 대해 끊임없이 시비를 겁니다. 객관적 증거나 증인을 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조차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나 철저하게 일대일로 만나 주시시기 때문에, 출애굽 같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사역 같은 예외적 경우는 제하고, 증거나 증인이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신령한 환상을 본 일에 대해 증인이나 증거를 대라는 것이 오히려 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럼 성경 기록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든지 많이 댈 수 있습니다. 바로 유사한 체험을 한 증인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을 대면 교제하는 자라면 성경 기록에 나온 이야기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진실이라고 확신합니다.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겐 이상할 따름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서 그분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실제로 온전히 따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따르겠다고 소원 결심한 자입니다. 그분은 이 땅을 철저하게 혼자서 나그네 같이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래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이 전부 그랬습니다. 또 기독교 역사상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과 동행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사실이 바로 신앙여정은 고독한 길이라는 반증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자라야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 되어주심을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즉,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또 그런 자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38절)고 합니다. 나아가 그런 증인들이 구름같이 둘러 살만큼 허다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증인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했다고 하지 않습니까?(12:1) 구원에서 성화를 거쳐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마라톤 같이 철저하게 혼자 뛰는 경주가 바로 신자가 살아야만 할 참 인생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야는 “왜 나 혼자서 이 거대한 악의 세력에 대항해야 합니까? 올바른 여호와 신앙을 가진 주의 종들이 더 없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따진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알에게 머리 숙이지 않은 당신의 종을 7천이나 남겨두었다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그들을 소집해 선교대회나 캠페인 같은 일을 벌이기는커녕 찾아가서 교제를 나눴다는 기록도 없지 않습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갈멜 산에서의 그 지독히 고독했던 전투의 장소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항상 혼자서 사역을 잘 감당해 오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까 선지자는 철저히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잠시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일대일 교제 동행이야 말로 오히려 그분의 더 큰 역사를 이루는 지름길임을, 아니 유일한 길임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그 외로운 선지자의 직분을 인수인계 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신자가 철저하게 혼자 남았을 때에, 그것도 완전히 자신의 모든 것이 다 깨어졌을 때에라야 부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름도 빛도 없이 고독한 한 사람의 신실하고 순수한 종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을 통해서만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세상에서 유일무이하신 즉, 고독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며 오직 당신께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단 그 일을 당신과만 평생을 외롭게 걸어가려는, 아니 가고 있는 고독한 종을 통해서만 이루십니다.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는 자는 넘치는 평강과 위로와 안식과 기쁨과 자유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고독한 신자라야만 받을 수 있는 하늘의 복들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표현해도 다른 사람은 특별히 불신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같이 골고다로 향해 걸어본 자만이 알고 즐길 수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복”이라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수 믿은 신자가, 특별히 사역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 바로 고독한 인생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축복으로 감사히 받지 않으면, 최소한 그렇게 간주라도 하지 않는 종이라면 언젠가는 한번 혹은 반복해서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의 종의 경우에는 혼자만의 실족이 아니니까 큰일입니다. 그의 제자와 양 떼들이 더 크게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독의 길을 가지 않고 갈채와 환호를 즐기다 실족한 종이 받을 하나님의 징계는 크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그와 하나님만의 고독한 관계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그 본인이 절감하고 철저히 뉘우칠 수 있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축복인 고독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지 않으시렵니까? 고독하게 가라면서 함께 걷는다니 이상합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되 혹시 힘이 부치는 자가 있으면 서로 맞들어서 걸어가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겉모습이 후패해지고 이름도 빛도 없더라도 끝까지 그렇게 걸어가십시다. 하늘에서 우리 모습이 더 빛나고  우리 이름도 당신의 손바닥에 더 깊이 새길 것이라는 소망과 확신 가운데서 말입니다.  

9/29/2010

mskong

2010.09.29 23:57:34
*.226.142.23

고독의 여정에 함께 걸어가고 싶은사람 여기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고독의 여정에 함께 갈사람은 여기 붙으라 하셨으니 제가 붙겠습니다.
(술래잡이 할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고독놀이 할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김순희

2010.09.30 11:56:24
*.231.239.33

ㅋㅋ 고독놀이... 제목이 괜찮은데요. 맘에 쏘옥 들어요.^^
우리집에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그 고독의 꽃을 찾으러 이 곳에 왔으니
함께 그 고독의꽃 찾으면 좋겠습니다.
기가막힌 기쁨과 환희가 고독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터이니깐요.^^

minsangbok

2010.10.02 04:27:28
*.180.107.183

이 글을 읽으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래요. 주님을 좇는 삶이란게 그리 화려하지는 않는가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있는 주님을 좇기 원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사람은 아주 적은 소수일 뿐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둔 저도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울 불쌍한 자리라는 말씀으로 제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장미꽃 위의 이슬 같은 존재임을 확인할 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는 성경구절이 귀에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과 나눈 그 기쁨이 제 삶을 인도합니다. 정말 고독함을 느낄 때가 많지만, 주님 주시는 참된 평안이 제 영혼 속에서 넘쳐납니다. 오 할렐루야!

정순태

2010.10.02 07:28:53
*.75.152.247

"갈채와 환호와 추종은 신자, 특별히 주의 종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입니다."
"고독=진정한 축복"
주변에서 발견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극소수라도 있다는 사실이
믿음을 이어갈 수 있는 희망입니다.
감사합니다1

이선우

2010.10.02 17:45:28
*.222.242.101

고독놀이 저도 찜이요!
언젠가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고독(Solidarity)과 외로움(Loneliness)은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고독이 외로움으로 변이되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고독으로 승화되기를 원합니다.

강진영

2010.10.04 03:58:32
*.165.171.2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가야 한다는 것,
어느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축복이라는 것,
남은 자 7천이 있듯이,
여전히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것...
이런 것들로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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