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1-4) 기도내용을 계속 바꿔야 응답받는다.

기도 시리즈 (3)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13:1-4)

 

너무나 치사한 아브람

 

아브람은 여호와께 적합한 거주지를 달라고 기도했으나 확실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훼방이 적은 곳을 찾아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다가 기근을 만나서 애굽으로 잠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쁜 아내 사래로 인해 자신이 죽을까 염려되어서 누이라 속였고 그 계략은 먹혀 들어갔습니다. 사래가 바로의 눈에 들어서 후궁으로 간택되었어도 아브람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도리어 바로에게 보상으로 많은 가축과 노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람과 사래의 후손으로 제사장 나라를 세우고 장차 약속의 씨앗을 통해 구세주를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가 사래와 부정한 관계를 맺게 놓아두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곧바로 사래로 인해서 바로의 집안에 큰 재앙을 일으켰습니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집에 재앙을 내렸으니까 멀쩡하던 가족들이 때맞춰서 아무 이유 없이 즉사했거나 중병에 걸렸을 것입니다. 다행히 바로가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곧바로 깨닫고 아브람을 불러서 그간의 사정을 알아보고는 없었던 일로 치고 원상복귀 시켜주었습니다. 바로 앞 12장 후반부에 진술된 내용입니다.

 

고대 왕들은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만약 출애굽 때 바로처럼 완악한 자였다면 분노에 차서 아브람을 현장에서 죽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침 비교적 양심적인 바로를 예비해 놓았고 마지막 순간에 그 생각까지 주관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본문은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으로 돌아오자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고 말합니다.(4절) 틀림없이 애굽에서 겪었던 엄청난 일로 인해 기도의 내용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도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은 기도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었을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가 거짓말 했던 잘못을 회개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거짓말한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회개 결단한 후에 온전히 실천할 수 있었는지 솔직히 한 번 따져보십시오.

 

흔히 거짓말이면 내 성을 갈아치우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금전적 피해를 입거나 자존심에 금이 갈 것 같으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말이 술술 나오지 않습니까? 또 그러는 자기를 보고 놀라지만 잠시 부끄럽게 여길 뿐 자기 유익을 챙겼으니 금방 그 잘못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지혜롭게 잘 처신했다고 간주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나 아내를 누이라 속인 아브람을 두고 비겁하다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성경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이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당시에 아브람의 입장이 어떠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부터 추적해봐야만 합니다.

 

일행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아브람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할 사항은 애굽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미 그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예상하고도 사래가 아브람의 제의에 순순히 응했다는 것입니다.(창12:11-13) 결과적으로 아내를 부잣집에 후처로 들여보내고 그 대가로 남편이 큰돈을 받아도 좋다고 서로 합의한 셈이라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 문제없이 다시 회복시켜 주리라 확신했기에 그렇게 했다고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됩니다. 성경에 그런 언급이 없고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어디를 가나 우상을 음란하게 섬겼기에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하고 폭력이 난무하기는 똑같았습니다. 애굽에서 그랬다면 가나안에선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아브람은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인 하란에서부터 많은 장정들을 거느렸습니다.(창12:5) 가나안은 약소한 여러 부족국가들이 서로 힘을 겨루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가나안 연합전쟁에서 아브람이 맹활약한 것을 보면 그런 부족국가와는 얼마든지 힘으로 맞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로선 그런 아브람을 차별대우는 했지만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도 그들에게 냉대 받았다고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간 온 가나안족속을 원수로 돌리는 어리석은 모험일 뿐 아니라 참 하나님을 믿고 따랐기에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분문에 이어서 성경은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5절)라고 설명하는데 일행이란 항상 함께 다닌 사람들을 뜻합니다. 롯이 애굽에 같이 갔다면 나머지 장정들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은 중앙집권적 단일 국가로 당시로는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아브람 일행이 당시로선 상당한 규모이지만 애굽 군대와 대적할 정도는 결코 아닙니다.

 

기근이 닥쳤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네게브에 계속 머무르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기근으로 고생하는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포함한 식솔들을 인솔해야할 지도자로서 애굽에 잠시 거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정한 것입니다.

 

문제는 미모가 뛰어난 아내인데 아무리 사래가 예뻐도 나이가 먹을 대로 먹었기에 누이라고 말하면 자기를 죽이면서까지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랄 왕 아비멜렉과 동일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아브람은 실제로 사래는 자기 이복누이라고 고백했습니다.(창20:12) 이어서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창20:13)는 실토까지 했습니다. 말하자면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부부사이에 이미 약속한 사항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너무나 비겁하게 보여도 어쨌든 아내와 약속한대로 행한 것입니다. 당시는 남성 우위의 사회로서 아내는 남편 말에 절대 복종하는 관습이 있는데다 여성의 성적순결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아브람도 오늘날의 윤리의식과는 달리 양심의 가책을 비교적 적게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상숭배의 도성 갈대아의 음란하게 타락한 죄악상이 싫어서 떠나온 아브람입니다. 나아가 아들을 얻으려고 후처도 얻지 않았고 사래와 금실이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내를 희생시키더라도 자기는 살겠다고 모략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결국 사래의 미모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바로의 대신들이 곧바로 바로 앞에서 칭찬했습니다.(창12:15) 고대의 왕들은 할렘에 가능한 많은 후비를 두어서 자기 위세를 자랑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바로가 굳이 사래와 관계를 맺을 마음이 없어도, 혹은 언제든 그럴 수 있기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장식용 인형처럼 취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래의 오빠이자 보호자인 아브람에게 결혼 지참금조로 충분한 보상을 해준 것입니다.

 

바로에게 받은 보상은 마누라를 팔아먹은 피 묻은 돈으로 자기 죄에 대한 엄청난 형벌을 자초한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스승이 메시아 하나님인 줄 확신하지 못했고 나름대로 의로운 이유가 있어서 스승을 팔고 은 삼십 냥을 받은 유다보다 더 악한 죄였습니다. 그 재물로 식솔들은 배불리 먹을 수는 있으나 정작 아브람의 속은 쓰리다 못해 미칠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아마도 일행들도 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야 완벽하게 응답된 기도

 

그가 처음 네게브에서 애굽으로 넘어올 때는 어떤 기도를 했겠습니까? 우선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애굽에서 모두가 임시로 일용노동이라도 하거나 혹은 갖고 있는 소지품과 교환해서 양식을 구하여 연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내는 나이도 많고 그동안 가나안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까지 무사하게 지켜 달라는 기도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초행길이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곡물은 애굽의 가장 중요한 국가재산이므로 요셉의 예에서 보듯이 바로가 직접 관리하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브람 일행의 숫자가 많으니까 시장에서 곡식을 살 수 없고 바로의 대신들과 직접 상대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대신들이 바로에게 아부하려고 사래의 미모를 전했고(창12:15) 바로도 자기 권세 과시용으로 아브람의 누이라는 말만 믿고 할렘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아브람의 예측범위를 넘어서 엉뚱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의 왕이 데려갔고 그 보상도 듬뿍 받았으니 아내는 이젠 완전히 남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상거래처럼 취소 내지 파기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무력으로 대항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이런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달라고 기도를 했으나 수습 불가능한 절망에 처해졌습니다. 아내 사래가 애굽 여인처럼 치장되어서 왕궁의 깊숙한 내전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적 방안으로는 도무지 해결책이 없습니다. 조카는 물론 일행들을 살리려는 나름대로 선한 뜻으로 애굽에 왔는데 돌아온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엄청난 고난입니다.

 

아브람으로선 처음 얼마 동안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부터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내용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분간 바로가 사래를 취하려 하지 말게 해주시고, 그곳에서 아내를 빼어낼 묘책을 짜서 실행할 있도록 모든 상황을 인도해주시고, 그 때까지 아내의 정절을 지켜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바로에게 잘 보여서 나중에 사실대로 실토해 아내를 돌려받을 수 있게끔 인도해 달라는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내를 되찾게 되면 자기 일행이 애굽 땅을 무사히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갈대아를 떠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아브람의 여정이 쉽게 풀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매번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마지막 기도는 그 즉시로 하나님만의 완벽한 방법으로 이뤄졌습니다. 아브람으로선 때마침 바로의 집안에 큰 우환이 생기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바로가 그 재앙을 아브람이 믿는 신의 간섭이라고 깨달았고 또 그럼에도 전혀 반감을 갖지 않고 복수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아브람의 잘못을 전혀 따지지 않고 거꾸로 화해를 먼저 제안하며 사래를 온전하게 되돌려주었습니다. 보상금으로 준 것도 회수하지 않고 평안하게 애굽을 떠나도록 해주었습니다. 추측컨대 사래가 애굽 왕궁으로 데리고 가자마자 곧바로 하나님이 바로의 집안에 재앙을 내렸을 것입니다. 또 그래서 아브람이 망연자실해져서 기도는 물론 현실적 대책을 궁리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바로가 마음을 바꿔먹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물 밑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일반인도 자기 가족에게 큰 손해를 입힌 자를 복수나 피해보상 없이는 용서해주지 않는데 일국의 왕은 그 위신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 없습니다. 바로가 다시 호출해서 문초했을 때 아브람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정반대로 바로의 자비로운 조치를 듣고는 그가 느꼈을 기쁨은 더 엄청났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절로 튀어나오고 여호와에 대한 경외감이 온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바로는 애굽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 받으며 스스로도 그런 자부심을 갖고 모든 일을 행합니다. 고대는 신들의 능력 대결에 따라 나라의 국력이 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세계 최강국 애굽의 살아있는 신은 당연히 최고 강력한 신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출애굽 때의 바로가 그 큰 재앙을 열 번이나 겪으면서도 모세와 여호와께 끈질기게 덤벼 든 까닭입니다.

 

그런 바로가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은 애굽의 신이 아브람의 신에게 완전한 항복을 선언한 꼴입니다. 물론 그가 원래 인성이 온유하고 영적으로 비교적 깨어 있었던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이 그의 심중에 아브람의 신에 대한 큰 두려움과 경외감이 생기도록 역사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와는 우상숭배가 최고로 번창했던 세계최강국의 심장부에서 당신만이 세상만사를 거룩하게 다스리는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당신께서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직 나라가 없고 단순히 한 가정의 가장이며 소수의 추종자들만 있을 뿐입니다. 아브람 부부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직 온전치 못했습니다. 신전과 신상과 경전은 물론이고 마땅한 예배 의식도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가는 곳마다 조각하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 마음의 중심을 바치며 기도 경배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당시의 상황과 관습이 허락했어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자기만 살려고 한 것은 여호와의 뜻을 위반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도 전혀 묻지 않고 정반대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상상도 못한 선한 결과로 뒤집어 주셨습니다.

 

기도라는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은 인간 사고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으로 응답해주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브람의 당신에 대한 의심 불평에 대해서 지루할 정도로 침묵하다가 이번에는 단번에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 응답해주었습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형통을 위해서 자기 소원이나 욕심은 구하지 않고 지혜만 구했기에 구하지 않은 큰 재물까지 주신 응답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아브람을 위한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완벽한 계획을 마련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기도한 내용과는 별개로 그 계획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물 밑에서 묵묵히 작업하다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겉으로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아브람 쪽에서 보면 모든 행동과 말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고 기도조차 참으로 단순하고 미약했습니다. 그저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 특별히 어려운 일들만 해결해달라고 매달렸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람을 탓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아직은 자연인의 상태나 다름없이 믿음이 미숙한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은 시공간으로 제한되는 물질계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육체를 입은 한갓 피조물일 뿐입니다. 모든 사고활동이 당장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외부적 자극에 의해 일차적 중점적으로 영향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신자가 급한 일이 생겨야 겨우 기도하는 까닭입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도 기뻐하는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맞춰나가는 기도

 

그런데 너무나 엄청난 일을 겪고서 네게브로 돌아온 아브람이 분명하게 깨달은 영적 진리가 하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기도한 대로 똑같이 응답하지는 않아도 큰 맥락에서 그렇게 역사하시면서 가장 적합한 때에 더 좋은 방식으로 행해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아가 그 결과가 내게 유익한 방향이기도하지만 반드시 당신께서 약속하셨던 내용을 실현하는 방향으로만 모든 일을 이끌고 계신다는 진리까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각과 기도는 물론 그 다음에 행할 행동도 미리 다 아셨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아브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오래 전부터 장기적 종합적으로 통괄해서 주관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우선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람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애굽의 바로와 직접 상대했고 애굽 사람들을 노비로 하사받았기에 약소한 가나안 부족들로선 정말로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서기에 충분한 외적 조건까지 갖추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당장의 문제를 당장의 눈에 보이는 정황으로만 판단해서 자기 생각으로 대책을 세우고 또 그렇게 해결해달라고 매 건당 하나님께 매달리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한 가지 바뀐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이전보다는 훨씬 더 넓게 접근 이해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내 뜻만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과정에 따라서 그분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춰나가는 씨름이라는 점을 생전 처음 깨달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영적으로는 너무 어리석어서 매사에 그분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물질계에 제한된 존재인데다 자기를 앞세우는 본성이 살아있기에 자기 소원대로 보이는 대로 매달려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계획, 특별히 그 시기와 방식을 아뢰기는 하되 최소한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주님의 처분에 맞추어서 언제든 바꿀 수 있는 태세는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반드시 주목해야할 사항은 아브람이 애굽에서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곳이 이전에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았던 곳이라는 것입니다. 세겜 땅 상수리나무가 있는 모레로 우상 신전이 있기에 싫어서 동쪽 산으로 옮겨 가버렸던 바로 그곳입니다.(창12:6,7) 여호와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신다고 다시 상기시켜 주었던 장소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아브람에 대한 계획은 싫어서 떠났던 바로 그곳에 그를 정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기도가 이전과 비교해 어떻게 바뀌었는지 더 확실해졌습니다. 거짓말 했던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애굽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당연히 맨 처음 했겠지만 새로운 내용의 기도가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상 신전이 있어도 여호와가 주신 약속을 경시하고 좀 더 편안하게 살려고 스스로 거처를 옮긴 결정부터 크게 회개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 혼자서 모든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관하셔서 바로로 당신 앞에 무릎 꿇게 하는 모습을 아브람은 목격했습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축복해주자 여호와도 바로에게 더 이상의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하란에서 불러낼 때에 주신 자기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당신께서 직접 실행하셨습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당신께서 직접 시청각교육을 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래서 자기가 열방 앞에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자로만 서있으면 아무리 열악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분이 보호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 그래서 앞으로는 세상 권력자들 앞에서도 절대로 비굴하게 굴지 않고 의롭고 선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내 소원이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고 당신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도록 가장 먼저 기도한 후에 또 그로 인해 자기가 복을 받게 해달라고 간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그분의 약속에 비추어서 해석 분별 적용 실천하기로 했을 것입니다.

 

전능성보다 전지성을 붙들고 기도하라.

 

이제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살펴보기로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대체로 기도가 너무 표피적 단편적 일방적입니다. 자기가 당면한 문제만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니까 오직 기도한 대로 응답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에만 관심을 둡니다. 주로 급한 일을 기도하니까 응답의 시기와 방식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어야만 합니다. 가뜩이나 성격이 급한 한국 신자들에겐 그런 경향이 더 심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고 신자에게 복 주시길 원하시고 신자가 고난으로 힘들어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하나님이시지 않느냐 그런데 왜 지금 이 문제 하나 해결해주시지 않느냐, 당신의 자녀가 죽을 지경인데도 왜 외면 침묵하시느냐? 거기다 왜 또 다른 큰 고난을 보태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의심 불평이 앞섭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에 하나님의 능력만 빌려서 최단 시일에 가장 효과적으로 손쉽게 해결하는 것만이 기도인 줄 압니다. 그러니까 최대한의 능력을 얻어 쓰려고 최대한의 정성을 바칩니다. 금식 작정 기도는 물론 천일 새벽제단 쌓기 등을 합니다. 어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 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는 사실상 관심을 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부터 그분이 전능하신 분인 줄 잘 아니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에게 혹시라도 능력이 모자란다고 여겨지면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으니까 곧바로 현실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이 고난 해결에는 훨씬 빠르고 쉬운 방안입니다.

 

아브람의 경우에서 보듯이 인간은 부분적 미시적 제한적으로 개별 사건 중심으로만 기도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응답은 그의 인생 전반에 적용되도록 종합적 거시적 포괄적으로 이뤄집니다. 갈대아 우르, 하란, 가나안, 세겜, 모레, 남방 네게브 사막, 애굽, 바로의 왕궁 할렘까지 모든 공간에 주님이 안 계셨던 곳이 없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부터 마지막으로 바로가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고 나아가 다시 모레 땅으로 돌아와 여호와께 단을 쌓을 때까지 모든 시간의 주인공도 그분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가장 절실 할 때에 부재 침묵한 것 같아도 지난 모든 일들을 당신께서 완벽하게 주관해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쉽고도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단번에 결말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를 고의로 실컷 고생시킨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당신의 이름을 높일 뿐 아니라 아브람이 나중에 믿음의 조상으로 서는데 가장 합당하게끔 당신의 능력을 적절이 조절 절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도 그분이 무슨 일이든 못하는 것이 없다는 전능하심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것을 꿰뚫어보실 뿐 아니라 사전에 완벽하게 계획해놓으신 전지하심에 초점을 맞추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되어져 가는 상황에 부분적으로 계시되었고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다고 해도 평소에도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자기 생각과 기도 내용을 바꿔나가면서 그분을 조금씩 알아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분의 뜻을 미리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서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평생토록 해나가야 합니다.

 

기도에서 세 번째 핵심을 정리함으로써 마무리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기도 응답이 지체되고 오히려 새로운 고난이 더 생길 때는 하나님께 의심 불평하기 전에 자신의 기도가 혹시 잘못되지 않았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어져 가는 상황을 기도했던 내용과 면밀하게 비교 분별하여서 기도 내용도 그에 맞추어 자꾸 조정해나가야 합니다. 나아가 아브람을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로 다시 돌아오게 했듯이 내 믿음의 상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자리에 서있는지도 심각하게 항상 검토해봐야 합니다.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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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창35:1-5) 세상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보았는가? master 2020-09-07 186
180 (창32:24-31)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겨보았는가? master 2020-09-04 1026
179 (창32:7-12) 하나님이 나에게 진 빚을 청구할 수 있는가? master 2020-09-04 44
178 (창31:26-32) 야곱의 반의반이라도 따라가자. master 2020-09-04 107
177 (창31:6-13)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master 2020-09-04 46
176 (창30:25-32) 정말로 바보처럼 살고 있는가? master 2020-09-04 244
175 (창30:1-5, 22-24)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master 2020-07-26 76
174 (창29:31-35) 교회 밖 구석진 곳에 계시는 예수님 master 2020-07-25 265
173 (창29:21-27) 야곱보다 더 영악하신 하나님 master 2020-07-25 110
172 (창29:15-20)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어있는가? master 2020-07-25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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