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0:1-7 & 17,18) 생명을 살리는 선지자로 기도하라.

기도 시리즈 (8)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창20:1-7 & 17,18)

 

같은 사건 다른 기록?

 

아브라함이 여섯 번이나 소돔의 심판을 재고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그날 아침에 소돔과 고모라 쪽에서 불타는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았습니다.(창19:27,28) 그가 살던 마므레에서 소돔까지는 약 4-50마일 정도 떨어졌으나 마므레는 고지에 위치했고 소돔은 들판이라 충분히 그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그 불에 탄 폐허를 내려다보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의 소망과 달리 의인이라곤 한 가정도 없었으며 조카의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롯만은 살려주겠다는 언질을 주지 않았고 롯도 깊은 산으로 피신해버렸으니 얼마동안은 조카가 죽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롯이 사위까지 볼 정도로 나이가 들었지만 그 동안 삼촌으로서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던 아브라함으로선 평소에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진심으로 회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심판 계획을 미리 통보해주었기에 생전 처음 사악한 도성이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제사장적인 기도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르에서 불러낼 때에 자기와 맺은 언약에 비추어 자신이 맡은 소명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소돔의 멸망 전에 비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한층 성숙되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이전에 에굽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뤘던 치사한 잘못을 또 범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이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 기원이 다른 다양한 문서를 여러 사람이 종합해서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문서설이라는 신학이론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사실은 한번만 실수했는데 기원이 다른 두 문서가 다르게 기록했기에 성경 편집자가 두 기사를 다 포함시켰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에게서 직접 미리 통보 받았고 그 예언대로 엄격하게 시행된 것을 똑똑히 목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자신이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죄를 저지르면 자기도 그럼 엄중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인식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황당한 잘못을 반복하니까 누가 봐도 믿음의 조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싶고 그런 주장에 솔깃해집니다.

 

그러나 문서설대로 따지자면 두 원본자료 중에 하나는 진실이고 다른 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 어느 쪽이 진실인지 확정지을 수 없으니까 둘 다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성경의 오랜 기록들을 고대의 전설 내지 설화라고 간주했기에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의, 그것도 창세기 전반부의 모든 사건들도 역사적 진실일 뿐 아니라 너무나 정미하게 기록되었기에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도 각기 다르고 풍성합니다. 이 두 사건도 마찬가지로 당시상황, 발생경위, 진행과정은 물론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된 결말이 각기 다릅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죄 많은 아브라함

 

그가 마므레에서 왜 다시 남방 네게브 땅으로 이주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철기 문명에 뛰어난 힛타이트 족속이, 성경은 헷 족속이라고 칭함, 가나안을 침공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추측이 옳다면 애굽 때와 마찬가지로 식솔들의 생명이 걸린 큰 위협에서 벗어나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면 사라로 인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충분히 예상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행하는 군사도 있고 가나안 연합전쟁에서 승리했던 명성도 인근에 상당히 퍼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예뻐도 감히 사라를 뺏거나 아내로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선 세계 최강국이라 아브라함도 감히 맞설 수 없었습니다. 본문의 그랄 왕 아비멜렉은 우선 규모가 애굽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이 맞서 싸우면 이길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전혀 항거하지 않고 순순히 사라를 내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행은 정규군대라기보다 목축을 하는 일꾼들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많이 동행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려한 가나안 연합 전쟁을 빼고는 자기 쪽에서 먼저 가나안의 족속들과 다툰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기록에 따르면 이방인으로 우거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긴 해도 아브라함은 아주 온순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로 주변상황이나 외부자극에 적극적으로 맞서서 헤쳐 나가기보다는 여건의 변화에 적절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훼방이 있자 거처를 점점 남방으로 옮겼고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넘어갔습니다. 애굽에서도 순순히 당했고 가나안으로 돌아왔어도 사라에게 저지른 죄 때문이긴 하지만 아내가 시키는 대로 다 행했습니다. 지금도 헷 족속과 충돌하는 것이 싫어서 그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 할 때도 침묵으로 일관했음이 분명합니다. 고대에는 일국의 왕에게 거짓말을 하면 신하들 앞에서 왕을 모독한 큰 죄가 되므로 현장에서 처형당하거나 아주 큰 곤욕을 치릅니다. 아무리 관습이 그랬다 해도 또 비록 사라가 실제로 그의 이복누이로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런 약조를 했었다 해도(12,13절) 애굽에서 한 번 큰 실패를 겪었으면 다음부터는 아내라고 솔직히 밝혔어야 했습니다.

 

고대에는 남편 있는 여인이 혼자서 공공장소에 나다니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라도 사라가 혼자 있을 때에 아비멜렉이 접근했고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살리려고 오래 전에 약속한 대로 그의 누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랬다 쳐도 아브라함은 애굽의 기억을 되살려 뒤늦게라도 아비멜렉에게 실토한 후에 그 처분을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 생명이 걸리는 일이 생기자 비겁하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여전히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을 입은 죄 많은 인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는 용서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매일 체험하듯이 평생토록 죄에서 완전해질 수 없으며 이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비로소 성화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자기 실패를 바로 잡아주셨으니 이번에도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했다면 아비멜렉 집안에 하나님이 큰 재앙을 내려 주리라 믿었거나 그런 저주의 기도를 했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자 다른 족속을 축복해주어야 하는 복의 근원으로 세워진 그가 그렇게까지 완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으로선 자신과 비슷한 규모의 족장 아브라함이 나타나자 사이좋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고대에선 알다시피 왕족끼리 혼인을 해서 동맹을 맺는데 아브라함의 누이는 그의 공동체에선 공주에 해당됩니다. 이어지는 20장 후반부 기록에 따르면 그에겐 아직 후손이 없었기에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번의 실패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역사상 최고의 미인을 클레오파트라를 꼽습니다. 그녀의 치마폭에 로마 황제와 장군들이 꼼짝 없이 놀아났고 당시의 세계역사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모든 세대 모든 사람 중에 사라만한 미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미모가 출중했으면 그 나이의 여자를 애굽의 바로나 아비멜렉이 후처로 삼으려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굳이 사라의 나이를 밝히지 않았겠지만 아비멜렉이 자식을 보려고 덤볐으니 동안으로 따져도 역사상 최강이었습니다.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결국 이번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 혼자서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일을 다 해결하여서 원상 복귀시켰습니다. 여호와가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네가 사라와 관계를 맺으면 남의 아내를 취한 간음죄에 해당되니 너와 네 가문에 죽음의 벌을 내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7절)

 

아비멜렉으로선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로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해명했습니다.(5절) 하나님도 너의 죄 없음을 알지만 죄를 지을까 염려해서 미리 경고한다고 대답했습니다.(6절) 아비멜렉은 그 경고에 순종하여 곧바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아비멜렉과 애굽 바로의 두 경우에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는 아무런 경고를 하지 않고 곧바로 집안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비록 바로가 여러모로 합리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자기 권세를 과시하고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사라를 할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도 단순히 기근을 피해 온 아주 가난한 이방인 정도로만 취급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아비멜렉은 재앙을 내리기 전에 경고를 해서 회복시키고 그의 집안에 닫혔던 태를 열어 왕자를 생산케 하는 축복까지 주었습니다. 그가 사라를 후궁으로 택한 목적이 후손을 보는 것과 아브라함과 사이좋게 지내려는 선한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두 왕의 숨겨진 동기에 따라 공평하게 적용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이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이라고”(7절)라고 예고했습니다. 앞으로 아브라함을 대할 때에 당신이 세운 특별한 종이라는 점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또 나중에 아들을 얻게 되면 그의 기도 덕분인 줄 알아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겐 그의 이름을 열방 앞에 창대케 해준다는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죄를 짓지 않게끔 막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또 아브라함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던 원래 의도대로 그에게 충분한 사례를 해주었습니다. 거기다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15절)고 허락해주었는데 자기 나라에 계속 거주하면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역할을 하며 기도해 달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선하게 해결된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예언한대로 그 집안을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신 것은 당연한 응답입니다.(17절)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다”(18절)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내와 여종에게서 후손을 보려고 많이 시도했으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게끔 하나님이 막았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살펴본 대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사라를 후궁으로 취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왕자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래 상자 안의 개미 같은 인간

 

주목할 사항은 성경이 하나님이 그 모든 일들을 미리 아셨다고 설명하지 않고 미리 계획해 놓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온유한 성격이라 헷 족속을 피해서 네게브로 이주할 것과 또 애굽에서 범했던 실패를 다시 행할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아셨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집안에 태를 닫은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므로 사전에 계획을 짜놓은 대로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아래의 보충 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두 인간 당사자는 전적으로 자기 이성대로 판단하고 자기 의지대로 결정 시행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로 당신께서 이미 세워놓은 계획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게 해서 당신의 뜻이 완벽하게 이뤄지도록 주관하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와 하나님이 미리 예정한 계획은 서로 별개의 차원에서 이뤄져도 상호 어떤 모순과 충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지만 범사에 간절히 기도하면 진행되어지는 모든 과정과 결과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자기 뜻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와 방식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자에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지게 해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입은 신자도 그 동안 열심히 기도했던 문제나 고난이 완전히 해결된 후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권능을 구체적으로 더 풍성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많은 신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에 제가 항상 드는 쉬운 비유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큰 상자 안에 모래를 깔고 여러 크기와 경사의 모래언덕과 온갖 바위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물이나 먹이도 적절한 곳에 나열한 후에 입구에서 출구로 가는 길을 하나만 만들어 놓았다고 칩시다.

 

상자 입구로 개미 한 마리를 집어넣으면 개미로선 새로운 상황을 마주칠 때마다 자기 판단 하에 다음 행동을 취하지만 결국은 이미 정해진 루트를 통해서 출구로 빠져나오게 됩니다. 개미로선 한 곳의 장애를 통과해도 다음에 어떤 장애가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으며 어디에 물과 먹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무사하게 상자를 빠져나가게 마련인데 전적으로 그 상자를 미리 그렇게 디자인해놓은 인간의 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인생 상자를 그런 식으로 미리 완벽하게 마련해놓았습니다. 아비멜렉과의 사건도 그가 하나님의 필연적인 루트를 통과하는 중에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럼 또 다른 문제가 하나 대두되는데 반드시 계획된 통로를 지나게 된다면 아브라함이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의 모래상자가 아무리 완벽하게 디자인되었어도 신자가 기도해야 할 이유는 크게 둘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자 개미의 상자에도 곳곳에 장애를 숨겨 놓았고 전갈이나 뱀이 설치기도 해서 기도를 통해 그 장애를 뚫어내어야 다음으로 진전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다른 코스로 이탈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방 탈출 게임처럼 다른 방으로 가는 문은 없는 대신에 힌트 징조 예표를 숨겨 놓았기에 기도로 문제를 풀면 원래 계획된 다음 코스로 진행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만큼 그 방안에 갇힌 채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둘째로 그 상자 안에는 불신자 개미들도 함께 살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들이 사는 동네에도 전갈과 뱀들은 있지만 형형색색의 신나는 놀이기구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준 먹이를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이 그칠 새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해진 루트가 없어서 미로처럼 그 자리에 맴돌 뿐 출구를 찾지 못합니다. 인생의 출구 밖으로 나가면 그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너무나 좋은 곳이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실은 그 출구로 가는 하나님의 루트가 어디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는 힌트까지 숨겨 놓았지만 신나게 노느라 찾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리 심판 계획을 알려줌으로써 조카를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라도 소돔을 위해서 기도하게 인도했습니다. 처음부터 응답될 수 없는 기도였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의 근원으로 세워진 소명을 정확히 가르치려는 뜻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당신께 죄악을 사해달라고 탄원하는 제사장적인 기도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본문 말씀대로 아브라함더러 선지자적인 기도까지 하게 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라는 직분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할 여유는 없습니다. 큰 틀에서 남을 위하는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는 역할은 같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죄를 사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선지자는 죄를 회개케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끔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돔은 아무도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아서 모두가 죽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죄를 범하기 전에 돌이켰고 새 생명까지 받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모래상자로 비유하자면 끝까지 하나님이 마련한 출구를 찾을 생각도 않는 불신자 개미는 신자 개미의 제사장적인 기도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살려주려고 계획한 개미는 신자 개미의 선지자적인 기도로 출구를 빠져나가게 해주신 셈입니다.

 

선지자적인 기도를 하라.

 

아브라함은 소돔의 멸망을 보고 큰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롯마저 의인의 가정에 들지 못해 심판 받았기에 그 동안 자기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지라는 후회가 계속 밀려왔을 것입니다. 소돔에 롯 말고도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어쨌든 간에 자기에게 호의를 배풀었던 소돔 왕도 생각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심하다는 의심과 불만도 생겼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는 아무리 선한 뜻으로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마저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아내가 아비멜렉의 후궁으로 취해진 후에 다시 정말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치사한 잘못을 또 범하고 보니 잠간이나마 하나님께 가졌던 불평과 의심이 얼마나 말이 안 되고 부끄러운지 새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잘못부터 회개하고 도저히 염치없지만 이번에도 하나님 제발 간섭해주셔서 사라를 보호하고 원상회복 시켜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또다시 하나님은 아무 벌도 주지 않고 그대로 응답해주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의로운 면이라고 없었습니다. 복의 근원으로 세웠기에 당신께선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와 맺은 언약이므로 당신께서 신실히 지켜나가면서 그를 그에 걸맞게 훈련시키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서 사라를 돌려받을 때에 그에게 왕자가 없다는 어려운 사정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아직 아이가 없던 터라 동병상련의 긍휼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인생만사를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고 내년에는 아들을 얻게 된다는 약속까지 받았기에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돔을 위한 기도가 죽음으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생명이 잉태되는 복을 주었습니다. 롯에 대한 후회로 실망에 빠져있던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멸망으로 정해진 소돔 때와는 달리 자신의 그 연약한 기도마저 얼마나 큰 권능을 가지는지 새삼 확인했을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는 자기가 선지자적인 깊은 차원의 기도를 하고 있고 그 결과가 은혜롭게 끝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단순히 아비멜렉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기도해준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남의 어려운 형편을 위해 기도하면 그 본인의 이해타산 이기심 고집 자존심 등이 개입되지 않은 순전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큰 은혜를 받은 셈이므로 그 은혜를 보상하고 싶어서라도 더욱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지켜주신 것도 당신의 언약을 지키지 위해서였습니다. 육신적으로 반드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야 약속의 씨앗이 됩니다. 아비멜렉이나 바로의 씨가 되어선 절대 안 됩니다. 사라의 정결을 지키는 것은 그분에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삭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와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본문에 바로 이어서 이삭의 출생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류 역사 전체를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광대한 상자가 태초부터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상자는 그에 비해 너무나 작은데 그를 우르에서 불러낼 때에 하나님의 그 큰 상자 입구에 자리 잡게 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 상자의 출구는 이삭 인생 상자의 입구와 연결될 것입니다. 이삭의 후손들의 상자들도 죽 연결되어서 예수님의 성육신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구약성경의 내용입니다. 예수님 이후 모든 신약 신자들의 상자도 믿음의 후손들의 상자로 이어지게 하고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그 크고 거룩한 상자에 담겨서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어져야 하고 이어질 것입니다.

 

어떤 상자에서 살고 있는가?

 

이 거룩하고 엄청난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그 가운데 아브라함의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두 번의 처참하고 비겁한 실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더러 연약한 모습일지라도 제사장과 선지자적인 기도를 하게 해서 당신만의 거룩하고 완벽한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그분께 그와 동일한 신분과 특권을 받아서 지금 이 자리에 불려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완벽하게 디자인 된 거룩한 상자의 입구에 이미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간적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무지함과 때로는 개인적 욕심 자존심은 물론 죄성을 발휘하고 심지어 당신을 향해 불만과 원망을 하도록 허락해놓고도 반드시 당신께서 당신의 루트대로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으십니까? 영광스런 부활이라는 출구도 확정되어 있음을 알기에 세상에서 죄악, 사람, 사탄과 담대하게 맞서고 있습니까?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까닭이 단순히 신자만 보호 인도하여 천국으로 이끌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자 안에 여러 불신자 개미들을 함께 살도록 배열해 놓았고 그들을 위해서 제사장적 나아가 선지자적인 기도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선지자(先知者)적인 기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미리 알고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중에 그럴 수 있을 만큼 영적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도 없고 구약의 선지자들도 대부분이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면서 사람들로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가라고 권유하며 또 오직 그렇게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요컨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바탕에서 그가 가장 괴로워하는 일을 붙들고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진심으로 간구하면 됩니다.

 

비록 우리의 너무나 서투른 기도라도 당신의 뜻에 합당하다면 다른 이의 생명을 살려주고 죄악의 도성의 심판마저 미뤄주십니다. 요나가 자기 민족을 잔인하게 괴롭힌 니느웨가 너무 싫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도망쳤습니다. 그러다 다시 붙들려 와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참된 회개가 불같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할 자격이 도무지 안 된다고 여겨집니까?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처럼 마누라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이고 혼자만 살려는 치사한 짓은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럼 아브라함보다 못한 것 하나 없고 그 생각이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떠는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대해선 담대해야 합니다. 불쌍한 이웃에게 불쌍한 마음이 가는대로 하나님에게 담담하게 아뢰십시오. 그럼 그것이 제사장적 기도요 선지자적인 기도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기도 같아도 하나님은 당신의 크기만큼 응답해주십니다.

 

(2/20/2022)

 

*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닫은 시기에 관한 보충설명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이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태를 열어 주셨다.”(창20:17 표준새번역) “Then Abraham prayed to God, and God healed Abimelek, his wife and his female slaves so they could have children again,”(NIV)

 

유독 표준새번역본과 NIV만 17절에 ‘다시’(again)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마치 아비멜렉에게 왕자들이 있었으나 사라를 후궁으로 들이자 그 벌로 그 집안에 태를 닫았고, 그녀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자 태를 다시 열어주어서 생산이 다시 가능해진 것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럼 제가 해석한 내용과 큰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면 그런 의미로 볼 수 없는데;

 

-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사라를 택한 형벌로는 분명히 너를 죽인다고(a dead man) 했지(3절) 여자들의 불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집안이 불임이 된 것은 과거완료로 표현되었듯이 사라의 일보다 먼저 이뤄진 일로 봐야 합니다.

 

- 만약 그전에 생산을 해서 왕자들이 있었고 사라를 취한 후에 불임의 벌을 받았고 그녀를 돌려주자 다시 태를 열어 왕자들을 생산케 했다면 형벌로서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왕자들이 있는데 잠시 불임이 되었다고 해서 심각한 벌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 무엇보다 사라를 택한 후에 그 벌을 내렸다면 현실적으로 그 벌이 취소되어서 다시 태가 열린 사실을 아는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먼저 불임의 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아비멜렉이 아내와 여종들 모두와 관계를 맺고서 최하 3-4개월 후에 일일이 검사해야 합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에게 그 사실을 알리며 기도를 부탁하여야 하고 아브라함이 기도한 후에 동일한 절차와 시간이 또 걸려야 합니다. 성경에 그런 사실이 간단히 언급되거나 최소한 유추할 수 있는 힌트도 전혀 없습니다.

 

- 애굽의 바로는 오직 그릇된 사적 욕심으로 사라를 취했기에 벌부터 받았고, 아비멜렉은 설교에서 설명 드린 대로 아무 잘못이 없는데다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고 또 왕자를 보려는 나름의 선한 뜻으로 사라를 취했기에 하나님이 경고하여 막아주신 것으로 봐야합니다.

 

- 따라서 표준새번역과 NIV의 '다시'는 단순히 “이왕에 다 태를 닫아놓았지만 열어주었다는” 의미로(열린 것을 닫고 다시 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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