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4:4-7) 기쁨은 선택할 수 있는 선물이다.

조회 수 941 추천 수 21 2012.04.29 14: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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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선택할 수 있는 선물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가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리라.”(빌4:4-7)


아래는 그저께 읽은 챨스 스윈돌의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The Owner's Manual for Christian), 도서출판 디모데 2011 발간)는 책의 p 68-70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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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이상을 목사로 섬긴 여든두 살의 미국 노인의 실화다. 말년에 그는 피부암으로 고생했다. 증세가 너무 심해서 무려 15번이나 피부수술을 받았다. 그는 통증으로 고통을 당했을 뿐 아니라, 암이 그의 외모에 남긴 상처자국 때문에 부끄러워서 밖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만나 상담, 권면, 기도해주는 일이 평생 직업이었던 목사가 그러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을 피해야만 하는 그 고통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 필자가 덧붙임)

그런 어느 날 “계속 춤을 추라!(You Gotta Keep Dancing!)”는 책에서 저자 Tim Hansel이  겪은 고통에 관해 읽게 되었다. Tim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던 등산사고를 당한 후에 견디기 힘든 통증으로 계속 고생했다. 그러다 그 통증이 영원히 자기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내가 이 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그래서 기쁨을 선택했다.” 이 글을 읽은 그 목사는 “미쳤군. 난 기쁨을 선택할 수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 후 그 일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기쁨이 선물이라는 것을 읽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는 “아니 기쁨이 선물이라고!” 너무 놀랐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뭐라고 간구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침묵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그러면 주님, 그것을 제게 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엄청난 기쁨의 덩어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안겼다. “나는 압도되었다.” 가히 베드로전서에서 말하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1:8)와 같았다.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주님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주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을 빙빙 돌며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기쁨에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82세에 이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기쁨에 겨워 비좁은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사람을 피하기만 하다가 그런 몰골로 스스로 먼저 만나러 나갔음, 하나님이 다시 목사 직분을 회복시켜 주신 것임 - 필자) 밖으로 나간 그는 동네 패스트푸드 점에 가서 햄버거를 하나 샀다. 지나가던 한 부인이 그가 이전과 달리 그토록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지내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아, 너무 좋습니다.” 그 부인이 다시 물었다. “생일이신가요?” “아니요, 그보다 더 좋은 거죠.” “결혼기념일이신가요?” “그보다 더 좋은 거에요.” 그 부인은 흥분해서 “대체 그게 뭐죠?” “예수님의 기쁨이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 부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아뇨 저는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해요.”

그 부인의 반응이 얼마나 엉뚱한지! 하지만 그것은 색다른 반응은 아니다. (제가 그 여인의 입장이었어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필자). 기본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기쁨을 선택하는 사람과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쁨을 선택하는 사람은 오늘이 무슨 요일이든... 자기가 몇 살이든... 아니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있든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쁨을 선택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시 웃기로 결심한다. 기쁨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웃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위안을 놓친다. 그리고 그들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웃을 수 없다. 그리고 웃을 수 없기 때문에 웃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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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지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인 것 같습니다. 인생이 항상 기쁨으로 가득 찰 수는 결코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과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벌을 받았고, 세상은 죄인으로 가득 차 있기에 고난은 인생살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요소입니다. 아무리 벌을 받은 결과이지만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면 궁극적으로  고난도 그분에게 기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종내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인생에 기쁜 일로만 가득 찼다면 구태여 기뻐하라고 명할 이유는 없습니다. 절대로 항상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신자의 자의적, 의도적, 의지적, 순종적 선택사항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일에도 억지로라도 기뻐하라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가식적, 위선적이라도 일부러 기뻐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선 외부 환경이나 사건의 부정적 측면이 아무리 해도 긍정적으로 변할 수 없다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결국 본인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외부 요인으로 고통이 평생 떠나지 않아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끝까지 괴로워하며 불평으로 지샐 것인지, 아니면 그런 고통마저 이겨내고 기쁨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소망과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결이 가능한 일시적 고통은, 그 고통의 강도가 아무리 세어도, 기뻐하는 것 이전에 믿음으로 이겨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선택하여 실천할 수 있는 방안도 많습니다. 가만히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의 깊은 의미가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전혀 현실적 옵션이 없는 경우에 차라리 기뻐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기독교 특유의 믿음의 역설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주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해도 기뻐할 수 없는 상황과 사건이라도 주 안에 있기에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억지로 기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 안에 들어온 그 신분, 특권, 은혜, 능력을 온전히 누리며 또 행사할 수 있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책뿐 아니라 연약함도 다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의 고통, 눈물, 한숨, 공포, 염려, 수치도 당신께서 전부 짊어지고 죽으시고 영광스런 하늘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신자라면 그 새 생명(바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에”(롬8:39),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권면은 거기에서 하나 더 나아갑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죄나 타 종교에 대한 포용적 자세를 유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를 기뻐할 수 없게 만든 즉, 고난을 안겨준 사람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해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고통까지 다 감당하신 주께서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주님 안에 있는 자는 고통마저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지만, 고통을 안겨준 자는 전혀 그럴 수 없으니 오히려 그 가해자가 피해 입은 너보다 더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또 다른 역설입니까?

그럼에도 어쨌든 이는 아주 어려운 계명이자 권면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이 평생 이어지는 큰 고난이 닥치면 예의 목사님처럼 “미쳤군. 난 기쁨을 선택할 수가 없어”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니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고난 중에 있는 자 앞에는 기쁨의 찬양과 고통의 한숨, 둘 중 하나의 선택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러기 너무 힘드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고난을 그치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지금 평생 없어지지 않는 고통에 관해서 논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없어지지 않을 고난을 두고 계속 기도하면 그야말로 헛수고이자 시간 낭비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평생의 불치병을 가진 예의 목사님에게만 해당되는 권면이라고 여기면 그 같은 착각도 없습니다. 어차피 모든 이가 평생토록 고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어떤 고통이 닥쳐도 굳센 믿음과 인내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겨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또 다른 고통이 반드시 닥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평생토록 믿음으로 고통 없애달라는 싸움만 하고 그칠 것이 아닙니다. 어떤 큰 고통이 계속 닥쳐도 그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하며 바로 그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쁨을 택하기 위한 기도이기에 당연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문에서 그런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어떤 고통이라도 없애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쁨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져 고난 중에 신자가 가장 우선적 집중적으로 기도할 내용이 무엇이 됩니까? 기쁨을 선물로 받는 일, 최소한 그것을 선택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모든, 항상, 아무 것도(모든 것이라는 뜻임), 기뻐하라(평강, 생각을 지키는 것도 마찬 가지 뜻임)입니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해는커녕 수용도 안 되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그래서 하나님을 불신하는 일을 넘어서 불평과 분노가 절로 튀어나오는 그런 고통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 있기에, 주님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있기에, 그분이 지금도 나와 함께 울고 웃고 있기에,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또 도무지 기뻐하기 힘들면 기쁨을 선물로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특별히 저 같은 경상도 출신의 중늙은이는 웃음에 아주 인색합니다. 저도 상기 예화의 목사님과 같은 직업에다 불편하고 짜증나게 하는 고통과 연약함이 평생을 두고 떠나지 않으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외부 환경이나 사건의 부정적 측면이 아무리 해도 긍정적으로 변할 수 없다면 결국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저의 선택일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성경도 분명 기쁨은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동안 제가 웃음에 너무 인색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공짜 선물을, 그것도 삶을 활기차게 만드는 너무나 좋은 선물을 일부러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뜻이 됩니다. 주 안에서 이 같이 어리석은 짓은, 아니 믿음 없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말로이제부턴 예화의 목사님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지만, 그전에 기쁨을 선택하지 않는 길 가던 부인의 본은 절대로 닮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29/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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