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꼬리를 잡는 신자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榮光)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전통적으로 가부장적 유교 문화 때문에 침묵이 금이라고 세뇌되어진(?) 한국인들은 대화나 토론에 아주 미숙합니다. 거기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기질 때문에 사고에 논리성, 합리성,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정이나 사회나 건전한 토론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기보다는 상명하달이 아니면 끝없는 시비 둘 중 하나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국가 장래와 국민 복지를 책임지는 정책을 결정해야 하기에 건전한 토론이 가장 절실한 정치판이 오히려 더 그러합니다.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끝까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그에 동조하면 동지요, 반대하면 원수로 편 가름합니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화자가 말한 전체 대의는 물론, 강조코자 하는 주제는 아예 무시하고 오직 말꼬리 잡는데 혈안이 됩니다.
예컨대 코끼리의 머리와 꼬리를 거두절미(去頭截尾)하면 몸통 밖에 남지 않기에 누가 봐도 도무지 코끼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님은 그나마 자기가 만진 것에 대해선 정확하게 표현이라도 합니다. 멀쩡히 코끼리를 전부 다 보고나서도 몸통만 코끼리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우기니 차라리 장님보다 즉, 아무 것도 안 보느니 못한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들을 비평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다락방 강화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권능의 약속인데 신자들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기도하면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이해로 그치면 그야말로 거두절미한 해석이 됩니다. 아니 오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한다고 다 응답되는 법이 없음을 실감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만 이해합니다. 나아가 이 말씀을 기도 응답의 가장 확실한 근거로 하나님께 들이대며(?) 열심히 뜨겁게 기도합니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로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대에 빨리 찾아서 서로 대조 연구하기 편리하게 편의상 붙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 죽 이어진 글입니다. 다른 말로 성경은 절대로 거두절미해서 읽어선 안 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어쩌면 누구에게나 성경에서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인데도 현실에선 실제 적용이 가장 안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아주 심오한 영성을 지녀 어려운 탓도 아니요, 예수님이 크게 과장했거나 공수표를 발행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신자들이 머리와 꼬리 모두 잘라내고 읽고, 해석,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머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앞의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제 우리의 해석과 적용의 잘못이 무엇인지 조금 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이제 아버지께로 가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즉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신자)의 자격과 특권에 힘입어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과 계속 이 땅에 남아 계실 것 같으면 그런 말씀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약속은 하셨지만 특정한 범주(範疇,category)로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셨던 일과 동일한 범주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심지어 같은 범주라면 얼마든지 더 큰 일도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하는 “무엇이든”과 주님이 뜻하는 “무엇이든”의 범주가 과연 같은지 따져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은 아무리 사소해도 단 한 건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간, 물론 그럴 리는 만에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지 않음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그런데도 단순히 주님이 신적능력으로 큰 이적을 일으킨 겉모습만 보고서 우리가 구하는 모든 일에 그 능력이 함께 해달라고 간구해선 아주 큰 잘못이지, 최소한 어긋난 적용이지 않습니까? 주님이 일으키신 모든 이적의 목적 또한 모든 이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만 죄인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역으로 따져 우리 기도에 그런 목적만 있다면 얼마든지 큰 기적을 구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의 꼬리도 당연히 바로 뒤의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2절에서 제한을 가한 무엇이든 구하는 기도의 범주를 다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행했던 일보다 더 크게 구하라고 했습니다. 문맥에서만 따지면, 우리로선 현실적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정말로 주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또 주님이 성부의 계명을 지켰던 것보다 더 성실하고 열심히 준행하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16절)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늘 보좌의 영광으로 복귀하시니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어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내주토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17절) 말하자면 기도할 때에 과연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수 있으니 가르쳐 주는 영으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겨우 바로 앞뒤 한절씩만 보지 않았는데도 전혀 다른 해석과 적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다시 코끼리로 비유하면 가장 중요한 기다란 코와 꼬리, 큰 귀는 물론 기둥 같은 다리까지 다 없애고 그냥 드럼통 같은 몸통만 들고 끝까지 코끼리라고 우깁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든 구하면 다 시행해 준다고 해놓고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또 무엇이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구하라고 하니까 자기가 정한 아주 큰 계획을, 물론 종교적 도덕적 겉치장은 조금 합니다만, 약속과 달리 이뤄주지 않는다고 떼를 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해석 적용해야만 뜨겁고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정치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새벽마다 울며불며 하나님에게마저 몸통만 들고서 코끼리라고 우기는 신자들을 하늘에서 그분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겠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는 정말 구해야할 것을 모를 때가, 사실은 이런 원리는 알면서도 잊어버리는 일이 너무 잦습니다. 그래서 일단 무엇이든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야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만 하셨던 주님처럼 구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또 그런 범주 안이라면 정말로 무엇이든, 아무리 큰일이라도 담대하게 구하고 있는지도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거룩해지고, 주변에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자기를 통해 전해지는 바로 그 일 말입니다. 나아가 그런 간구라면 마땅히 응답될 것을 확신하기에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는지도 말입니다.
5/7/2012
전해지는 바로 그 일 말입니다." 아멘!
저는 하나님의 친권대사가 되고 싶어요. 저는 제가 속한 공동체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모인 무리가 모두~~다, 모두~~다
성령이 충만해져서 마치 술에 취한 자들처럼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그 기가막힌 사랑에 취하여서 감사의 찬미를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드리는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고 싶어요...
이런 고백들이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고 어딜 가든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심령의 담대함도 구하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