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려고 하지 말라

조회 수 4020 추천 수 360 2005.08.02 17:44:27
팔복 강해(14)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5:7)

순교망상증의 신자들

본문에는 최소한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첫째로 신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이요, 둘째는 예수를 믿는 신자만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으며, 셋째는 이웃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덧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두 번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신자만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이 불신자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들 중에도 신자보다 얼마든지 더 성실하게 이웃을 섬기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긍휼이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인데 바로 그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웃에게 베푼 것들의 질적 양적 수준을 최대치로 끌어 올려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며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섬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를테면 자기 재산을 다 팔고 직장도 그만두고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찾아가서 돕고 또 그러다 풍토병에 걸려 죽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신자 가운데 오지에 가서 빈민 구제하며 선교하다가 죽는 것을 신자가 해야 할 가장 큰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말하자면 순교가 신앙의 궁극적인 완성인양 생각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과대망상증이다. 물론 순교의 의미와 가치는 대단하다. 그러나 순교란 하나님이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목적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한해, 특별한 일을 이루기 위해 허용하시는 일종의 최후의 비상 수단이지 신자 모두를 순교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는 법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하시는 사랑과 동일한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을까? 본문 말씀에 그 정답이 이미 나와 있다. 긍휼을 “베풀어라” 혹은 긍휼을 “실천하라”고 하지 않았다.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했다. 단어의 뜻대로 직역하면 아직은 행동으로 옮겨진 단계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단계다. 요컨대 본문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똑 같은 모습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생각하듯이 똑 같은 마음으로 우리도 이웃을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사랑하겠다고 마음만 먹고 실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더 말이 안 된다. 겉으로 표현되지 않고 또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법은 없다.

간혹 목사님들이 아무리 밉더라도 의지적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여건들을 주시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러면 상대가 변화 된다고 가르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 본질상 의지력으로 결단하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다. 원수를 억지로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사랑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상대가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원수인 상태로 자리잡고 있어선 절대 사랑이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원수로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 사랑할 구석까지는 없어도 최소한 미워할 구석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어야 억지로라도 사랑해 볼 엄두가 나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그 뜻이 신자는 끝까지 핍박 받아 순교해도 되고 대신에 핍박하는 자는 잘되어 형통하라고 빌어 주라는 뜻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이 지금 잘못된 생각과 이유로 핍박하고 있으니 그 핍박을 멈추고 서로 미워하는 구석이, 특별히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없어지도록 하나님의 간섭을 빌어라는 것이다. 아무리 의지적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런 기도가 병행 되어 최소한 자기 마음 속에 미운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는 절대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다.

이웃과 다툼이 생기는 이유

모든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실망, 상처, 갈등, 분쟁, 분노, 저주 등은 절대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의지적 노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정신병자나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이웃을 사랑할 마음은 있고 또 사랑하려고 노력도 한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이웃을 미워하겠다고 덤비는 자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왜 미움과 다툼이 생기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상대가 미운 짓을 하니까 그렇다. 그럼 상대가 나에게 한 짓이 사기, 폭력, 살인 같이 더럽고 추하며 잔인하고 흉측한 일을 했는가? 아니다. 그야말로 별 것 아닌 일이다. 심지어 선한 의도에서 좋은 일을 한 것도 많다. 그럼에도 미워지는 것은 특별히 다른 이유가 없다. 거의 모든 경우에 내가 정해 놓은 수준과 기대에 상대가 못 맞추어주어서 그렇다.

교회에서 남편이 설교 중에 자칫 졸았다간 집으로 돌아가는 차중에서 마누라가 바가지를 끓기 시작하고 곧 부부싸움으로 번진다. 그러나 기실은 남편이 설교 말씀을 안 들은 것이 안타까워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명색이 여전도회 회장에 구역장인데 그 남편이면 아직 믿음이 약해 장로, 집사는 안 되어도 좋지만 최소한 설교 중에 졸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하는 기대가 채워지지 않아 분통이 터진 것이다.  

간혹 남편이 설교를 잘 들어주기를 진정 원하면서도 짜증내는 경우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유도 대동소이하다. 내 남편의 영적인 수준이 이런 쉬운 설교도 이해하지 못하는 정도인가 하고 자기 수준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초신자 시절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지금 현재의 자기 수준과 비교한다.

남편이 설교 잘 듣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아내라면 절대 바가지를 끓지 않는다. 겉으로는 차분하게 왜 졸음이 왔는지, 설교의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었는지 물어 보고 설명해 준다. 나아가 남편에게 초신자 성경 공부를 권한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남편의 마음에 복음에 대한 장애를 없애고 성령이 역사하여 영적인 눈이 뜨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더욱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갑자기 머리에 이상한 색으로 그것도 몇 개 섞어서 염색하고 귀를 뚫어서 귀고리를 하고 나타나면 다짜고짜 사내 자식이 그 꼴이 뭐냐고 야단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가 사내 자식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외모의 최소 기준을 갖고 있는데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지 않는가? 장로 아들인데도 완전히 양아치나 히피 꼴을 하고 나타났으니 남들이 왜 저러나 뒤에서 수근거릴 것이 뻔할 것을 생각하니 더 화가 나고 무조건 싫다.

자기 아들이 지금 어떤 스트레스에 쌓여 있고 또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고 나아가 어떤 공허감과 상처와 갈등이 심령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에 저런 모양을 했을까에 대해선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해볼 마음도 없을 뿐 아니라 영적인 머리가 그런 쪽으로는 전혀 돌아가지도 않는다.           

상대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대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기대에 맞는 자만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워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그 기대에 맞지 않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반드시 자기 기대대로 끼워 맞추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분쟁, 상처, 원한, 저주는 오로지 상대의 약점과 허물을 자기가 기대하는 평균 이상까지 끌어 올리고 싶고  또 그렇게 고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기인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긴다는 뜻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인간은 단순히 약점과 허물을 몇 개 갖고 있어서 스스로 고치고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대신에 스스로는 도저히 선하고 거룩하고 완전해지지 못하고 평생을 두고도 나아질 가능성이 전무하며 그런 부족한 점 때문에 일생을 휠체어에 타서 고통 중에 괴로워하는 자로 취급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신 것 같이 우리 또한 이웃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은, 이웃의 약점으로 영향을 받지 말고 그들을 휠체어 없이는 꼼짝달싹 움직일 수조차 없는 병신이라고 여기라는 것이다.

만약에 내 남편, 아내, 자식, 교회의 성도, 이웃집 불신자들이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핸디캡이라면, “야 이 놈아! 남들은 잘도 걷고 뛰는 데 너는 걷기는커녕 기지도 못하느냐? 이 바보야!”라고 야단칠 수 있겠는가? 또 억지로 걷게 하려고 훈련시키다 걷지 못하면 미워할 수 있겠는가? 걷게  만들려는 사람이 바보가 아닌가?  

도덕적인 사치와 교만

오래 전에 휠체어 탄 핸디캡 유학생과 그를 뒷바라지 하는 어머님에게 저희 집의 방을 두개 내어 주어 약 3개월간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학교 기숙사의 핸디캡 전용 아파트가 준비될 때까지 대기하느라 그 기간 동안 마땅히 다른 곳에 갈 데도 없어서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내 딴에는 목사로서 선한 사랑을 베풀었다는 자부심을 가졌고 핸디캡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의 식사 교제 때마다 국은 안 먹고 밥하고 반찬만 먹는 것을 눈치채고 국을 안 좋아하느냐, 맛이 없느냐 물어도 씩 웃고만 말았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 하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머님이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 학생은 교통 사고로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불수가 되었기에 소변이 통제가 안되었다. 그래서 호스가 달린 프라스틱 주머니를 항상 허벅지에 차고 다녔는데 소변이 나오면 자동으로 그 주머니에 차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물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자연히 소변이 자주 많이 나오고 그러면 그 뒤처리가 보통 힘들고 귀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은 좋아 하지만 일부러 안 먹은 것이었다.

그 어머니에게 “많이 힘드시지요?”라고 위로 반 호기심 반으로 물었더니 돌아 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죄송한 말이긴 하지만 나이 40이 다 된 병신 아들을 수발하는 것이 왜 안 힘들겠어요. 정말 남들에게 말 못할 고통과 난처한 일이 수도 없이 많아요. 그래도 저런 모습으로라도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평생 오줌통을 차고 다닐지라도 오래오래 살아만 준다면 다른 소원은 없어요.”

그제서야 그 동안 제가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는 자부심이 얼마나 엉터리였음을 알게 되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나름대로 인간적 도움을 주었던 것은 기껏해야 인간적 의를 내세운 도덕적 사치요 교만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가 이웃의 시련과 상처와 고통을 알면 얼마나 깊이 알겠는가? 이웃을 섬긴답시고 한 일들의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사람들 앞에 사랑의 흉내만 낸 겉치레요,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앞장 세운 일인지 모른다. 심지어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 일조차 실제로는 상대의 고통에 진정으로 동참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형제, 동료, 이웃, 불신자들을 이 어머님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 보고 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이 많아도 단지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이웃, 내 성도인 것만으로도 감사하겠는가? 그래서 평생 동안 설령 어떤 갈등과 다툼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그런 허물 많고 부족한 모습이라도 오랜만 있어 주는 것이 간절하고도 유일한 소원이 되어 있는가 말이다.

하나님과 동격이 되어라

예수 믿는 신자만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이 신자의 교만이거나 기독교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다. 단순히 남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라는 정도도 아니다. 대단히 심각한 말씀이다. 그렇다고 남에게 최고의 희생으로 사랑하라는 것도 아니다. 남을 사랑하거나 불쌍해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그런 긍휼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생각하듯이 생각하고, 인간을 판단하듯이 판단하고,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와 사단과 사망에 묶여 있는 불신자들에게 갖는 안타깝고도 측은한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또 이미 그분을 알고 따르는 신자조차 현실의 여러 시련, 환난, 상처로 괴로워하고 시험과 유혹에 빠져 죄악으로 달려 갈 때에 당신께서 얼마나 한숨 쉬며 애타할 것인가 그 심정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동격의 수준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만이 가지는 긍휼한 심정을 바로 신자가 가져서 남을 그 긍휼로만 판단하고 대우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더러 갑자기 인격적으로 완전히 거룩해지라는 것이 아니요, 바다 같이 포용력이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인간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런 성자는 될 수 없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저도 일종의 핸디캡이 되었다. 몇 년 전에 큰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남이 잘 모르는 어려움을 평생 지니게 되었고 나아질 가망성은 없고 오히려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짐으로써 더 악화되어 간다. 휠체어 탄 그 학생을 이전에는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고 동정심을 갖고 측은하고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이제 나도 일종의 핸디캡이 되고 나니까 그 학생을 향한 안타까움이 완전히 새롭게 변했다. 나는 겨우 이 정도로도 이렇게 힘든 데 그는 얼마나 더 힘들까? 그의 고통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전혀 필요 없이 그가 느낄 고통이 내 가슴 속으로 가득차도록 밀고 들어 오는 것 같았다. 비로소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일반적인 사랑, 동정, 섬김 그런 것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속에서부터 저절로 생겨났던 것이다.

핸디캡은 핸디캡이 되어야만 참 된 사랑을 할 수 있다. 흔히 하는 속담으로 과부 사정은 과부만이 알아준다지 않는가? 핸디캡이 아닌 자도 얼마든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핸디캡인 자를 성심껏 도와 줄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강자로서의 여유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진정한 긍휼보다는 인간적 동정심이 우선될 수 밖에 없고 인간적 자랑과 가식이 끼여들게 마련이다. 또 그런 여유가 떨어지면 섬기는 것도 끝나거나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 있다.    

정상인이 비정상인을 섬길 때에 절대 할 수 없는 일은 그 사람의 고통에 동일한 아픔을 갖고 동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핸디캡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들여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긍휼이란 그 핸디캡이 단지 불쌍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핸디캡 때문에 더 사랑스러워지는 사랑, 그리고 그 핸디캡이 더 악화되어도 그 사랑도 함께 더 커지는 사랑이다. 동일한 고통을 똑 같이 가슴으로 체험하여 그 아픔이 구구절절이 자기 안에 완전히 녹아 내리지 않고는 도움이나 섬김은 할 수 있어도 긍휼을 절대 베풀 수 없는 법이다.  

불신자는 왜 긍휼히 여기기 못하는가?

불신자도 자신이 몇 가지 약점과 허물이 있는 죄인이라고 인정한다. 또 그런 결점들을 고치려 노력하고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잘못들을 뜯어 고치고 많은 선행을 베풀면 상 주고 구원해 주는 하나님까지도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믿는 셈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꼭 죽어야 하느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 이 땅을 그분의 왕국으로 바꾸는 신령한 일에 대해선 나면서부터 완전한 바보천치요, 병신이요, 심지어 시체라는 사실은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스스로 자기 죄를 고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남들에게도 똑 같이 그렇게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다. 자기 같으면 벌써 고쳤을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왜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러니 참된 용서와 사랑이 따를 수 없다. 부족하고 잘못하는 자를 도와줄 수는 있다. 단 상대가 자기가 기대하는 수준까지 그 약점을 고치려고 성의를 보이는 한도 내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절대로 상대를 휠체어가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핸디캡으로는 보지 못하니까 긍휼을 베풀 수 없는 것이다.

신자는 어떤 자인가? 바울의 고백대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고 하면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도저히 스스로는 고쳐지지 못하는 핸디캡이라고 고백한 자다.

자기 속에서부터 종잡을 수 없이 솟아 오르는 온갖 더럽고 추한 죄성들을 아무리 뜯어 고치려 들어도 실패만 거듭했기 때문에 도저히 자기 혼자 힘으로만 감당할 수가 없음을 잘 안다. 그래서 단지 치료 약이나 심지어 수술 정도로는 안 되고, 사망의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줄 자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 자다.

그래서 그 때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간절히 찾게 되는 자다. 그러면 그분이 단 한번도 외면하지 않고 당신의 거룩한 빛을 신자의 눌리고 찢기고 상처 받은 영혼에 비춰주어 가장 먼저 그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확신시켜 주신다. 그리고 그분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신자를 붙들고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그때 비로소 신자는 아무리 동족을 수탈한 죄 많은 세리, 현장에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분을 본 받으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 그 죄인들 속에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사랑할 만한 것들을 발견해서 긍휼을 베푸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 속에는 여전히 더럽고 추하고 죄에 찌든 모습밖에 발견 못하지만 문제는 그들 속에 있는 것들이 똑 같은 모습과 크기로 내 속에도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도 오직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 했고 그 긍휼만이 나를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었듯이, 저들에게도 똑 같이 오직 그분의 긍휼만이 필요 하며 그 외의 어느 것으로도 저들을 살릴 수 없음을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자에게 어떻게 권면하고 있는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다. 어떤 마음인가 “그는 근본 하나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빌2:5-7) 된 마음이다. 예수님은 육신만 인간의 모습을 입은 것이 아니라 고통과 상처와 죄악 중에 상해진 인간의 심령으로 인해 함께 괴로워 하고 안타까워 했었다. 신자더러 바로 그런 마음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신자가 되었다고 섣불리 죄인과 원수들을 사랑하려 들지 말라. 테레사 수녀처럼 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남을 섬겨야지라고 결심도 하지 말라. 오히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심령이 얼마나 가난하며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지, 그래서 그 분의 긍휼 없이 제대로 살 수 있는가 없는가부터 점검해 보라. 그때 비로소 나와 똑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이웃의 상한 심령을 바라 볼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순희

2011.01.29 12:18:11
*.174.67.195

매일 넘어지고 똑같은 자리에서 또 넘어지는 곳, 바로 이웃에 대한 기대치 그리고 실망치..
자신이 잣대가 되어버린 이 습성..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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