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칭찬과 격려와 아부
예수님이 신자가 따라 해야 할 기도의 모본으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첫 구절의 의미를 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간혹 대표 기도하는 장로님들이 하나님에 대해 수많은 미사여구를 동원해 기도를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수식어를 몽땅 동원시키다 보니 기도를 시작하는 부분에 시간을 다 잡아 먹고 막상 간구하는 내용에는 알맹이가 없는 경우도 있다. “광대무비하시며 신묘막측하시며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인자와 자비가 끝이 없으시고 사랑과 온유가 온 땅을 덮고도 남으시며… 등등” 하는 식이다.
신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지 정확히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잘못을 범한다. 찬양이란 영어로 하면 ‘Praise’ 인데 문자적 의미 그대로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이다. 그럼 그런 장로님들의 기도가 하나님을 칭찬한 것이 분명하고, 또 하나님 칭찬은 아무리 많이 해도 좋고 끝이 없는데 왜 잘못이라고 지적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제가 잘못이라고 한 것은 칭찬과 격려 및 아부를 서로 혼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격려’는 상대의 용기를 복 돋우기 위해 장점만 드러내어 강조하고 약점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해 주거나 간과해 주는 것을 말한다. ‘아부’는 상대의 장점은 사실 이상으로 강조하고 약점은 과소 평가 내지 무시하고, 없는 사실도 만들어 내어 실제 이상으로 좋게 말하는 것이다. 신하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경우다.
그럼 ‘칭찬’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장점을 특별히 강조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좋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정해주는 것이 칭찬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잘 된 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사실 그대로 인정해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배가 아픈 것은 왜 그럴까? 사람의 본성이 죄로 부패되어 있는지라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다. 칭찬에는 인색하고 시기, 질투, 비방에는 후한 것이 인간이다.
아이가 산수 시험 점수 100점을 맞아 오면 잘 했다고 말하는 것은 격려도 아부도 아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으로 칭찬이다. 그런데도 “산수만 100점 맞으면 무엇하나? 국어는 평균밖에 안 되는데” 혹은 “10명이나 백 점 맞았다는데 시험칠 때마다 100점 맞아 전교 1등 해야지”라는 마음이 앞서면 아무리 말로는 잘했다고 했을지라도 이미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비난이다. 일어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에 51점 맞아 석차가 꼴 등에서 몇 번째인데도 사장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중간인 50점에서 1점이나 더 얻었으니 잘했네요”하면 아부다. 자기 아들이 전 번 시험에 55점 맞다가 이번에는 60점 맞아 오면 “그 봐!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잖아? 다음에는 조금만 더해 한 70점 맞도록 해 봐. 이번처럼만 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 격려다. 아부가 격려나 칭찬과 다른 점은 장점을 더 크게 과장했다는 데 있지 않고, 그럼으로써 오직 돌아 오는 반대 급부에만 관심이 있다는 데 있다. 이에 반해 칭찬과 격려는 상대로 하여금 힘을 북돋우게 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다. 나의 유익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신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격려하실 수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더러 좀더 힘을 내시지요라고 격려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 아부는 잘 한다. 사실을 과장하면 아부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려다 도가 지나치다 보면 의도적이든 습관적이든 간에 쉽게 아부 수준까지 가버린다.
“하나님을 찬양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어때서”라고 그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해선 안 된다. 바로 그런 일을 두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한탄하셨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 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려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복만 받으려고 무엇이든 자꾸 바치려 드는 것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마당만 밟고 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 없이는 기도라는 종교적인 행위만 한 것이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에게 상달 되지 못한다. 기도가 상달되지 않으니 응답 또한 될 리 없다. 하나님이 제물을 많이 바치라고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대신에 우리의 진실된 중심을 보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 다우심을 있는 그대로 아무 가감 없이 진심으로 인정하고 또 인정한대로 입술로 고백하면 된다. 구태여 특별한 미사여구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장로가 수십 가지의 수식어를 동원하더라도 그 하나하나가 정말 개인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 절실한 고백이라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전인격을 걸고 순종으로 반응한 확신이 없이 단지 종교적 치사나, 머리로만 인정하는 관념적 서술이거나, 최고의 예의만 갖춘 겸손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찬양이 아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고백은 기도자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찬양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조금 복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쉽게 말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진심으로 인정하면서 기도하라는 뜻이다.
흰 수염의 도사
거룩하신 하나님이란 어떤 하나님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할 때에 여러분은 어떤 특성, 성품, 형상이 떠오르는가? 아마 열이면 여덟 아홉은 얼굴에 광채가 나고 흰 수염을 휘날리고 길다란 장대를 쥔 할아버지 형상을 제일 먼저 떠 올릴 것이다. 장로님들 기도한 그대로 자상하고 인자와 온유가 흘러 넘치되 위엄과 권위가 베어 나와 자기도 모르게 그 앞에 가면 주눅이 들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런 분이다. 한 마디로 자비는 끝이 없으며 못 하시는 일이 하나도 없는 자다. 실감 나게 말하자면 슈퍼맨에다 성모 마리아를 겹쳐 놓은 듯한 이미지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의 의미는 다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전혀 없으며 전지전능한 것이 거룩의 본질이 아니다. 헬라어로 ‘하기아조’인 ‘거룩’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구별이란 반드시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되어져야 할 대상이 있게 마련인데, 세속적인 것이나 세상의 존재로부터 구별되어진 것이 거룩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의 핵심은 세상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사랑과 위엄의 세기가 특별하게 강한 모습을 두고 거룩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어떤 것들과도 같지 않는 것이 거룩이다. 세상과 같거나 정도가 약하더라도 비슷하면 거룩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갖는 피조 세계와 전혀 다른 특성이 거룩이다.
세상과 다르다는 것은 당연히 사람과도 달라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 인간 역사상 위인이라 칭송 받는 자들, 예를 들어 테레사 수녀, 간디, 마르틴 루터 킹 목사, 한국으로 치면 이순신, 세종대왕 등 그들이 갖는 어떤 위대한 장점도 하나님의 거룩성과는 거리가 멀다. 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르고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나아가 신화나 소설 속 인물의 특성도 하나님의 거룩과 비교할 수 없다. 제우스, 헬라클레스, 큰 바위 얼굴 등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품성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다. 혹시라도 그럴 만 하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것 만큼 큰 착각이 없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절대 흰 수염의 도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세상과 구별되어 전혀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 다우신 특성 한 가지만 들라면 무엇을 들겠는가?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면 역으로 접근해 보자. 예수님의 권고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할 때에 어떤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기도하는가?
디모데 전서 1:17로 가보자. “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첫째 썩지 아니한다고 했다. 물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질은 무엇이라도 썩을 수밖에 없다. 다이아몬드도 썩고 인간도 죽으면 그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 물질이 아니라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영원하다.
둘째로 보이지 아니한다고 했다. 신선이나 도사 같이 가시적 형체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감지할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분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고(고전12:3)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속 사정을 알 수 없다(고전2:11)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자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홀로 하나라는 말은 ‘스스로 존재(自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고 서로 의지해야만 존속(存續)할 수 있다. 모든 동물은 먹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그 사슬의 정상(頂上)에 위치해 있다. 그런 인간조차도 매일 먹는 음식은 둘째 치고 물과 햇빛과 공기에 한 순간이라도 차단되어 버리면 당장 죽는다.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란 물, 공기, 햇빛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뿐이다. 이 세 가지 특성만큼은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다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이루는 핵심이다. 그럼 이 셋 특성을 또 한 마디로 줄이면 무엇이 되겠는가?
기독교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은 자가 아니다. “너희 조상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라고 지적된 대로 그와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신들을 섬긴 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은 말하자면 개종자(改宗者)였는데 그 개종하게 된 경위 중의 하나로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대인들의 전승으로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그가 믿는 우상들 중에는 태양신도 있었는데 하루는 석양에 지는 해를 바라 보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크기 색깔이 달라지는 태양이 신(神)일 수는 없다. 내가 믿는 신은 절대 변하지 않는 신이어야 한다.”
인간이 이 땅에서 분명히 보아 알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 가장 힘있고 신비하고 경이로운 것이 태양이다. 그러나 태양도 반드시 때가 되면 그 빛을 잃고 쇠퇴할 때가 있다. 태양이 그러할진대 이 세상에 썩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영원한 것이란 없다. 아브라함은 변하는 것은 절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노아 홍수 이후로 새로 시작된 인류 가운데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우상에만 매달려 있을 때에 하나님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 편에서 이끌어 내어”(수24:3) 성령의 간섭으로 변하는 것은 신이 될 수 없음을 알게 하셨다. 강 저편 우상의 나라에서 구별해 내어 강 이편 영원한 세계로 이끄셨다.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라는 셋 특성을 한 마디로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 없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태어나고 살며 죽는 것이 없다. 성장과 가감과 변화가 없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 또 영원 하려면 변개, 거짓, 사기, 위선 등 이전 상태와 비교해 달라졌거나 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개입 되어선 안 된다. 따라서 당연히 후회도 없으시다 .
‘영원’을 다른 말로 하면 ‘완전”이다. 완전해야 영원할 수 있다. 불완전한 것은 변하고 썩게 마련이며 한시적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영원하고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전지전능하신 것이지 어떤 존재가 전지전능해져서 신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완전하기 때문에 태초부터 홀로 하나로 있을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완전하지 않으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갖고 있는 모든 속성 또한 필연적으로 100% 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 분은 100%의 완전한 진선미요, 100%의 완전한 사랑, 공의, 정직, 자비, 온유…, 100%의 완전한 지성과 능력이다. 하나님 안에 조금이라도 지적으로 모르거나 능력이 부족한 면이 있다면 그 모르고 부족한 부분을 다른 데서 채워야 하므로 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또 혹시라도 티끌만한 죄, 부정, 더러움, 어두움이 있다면 하나님이라도 썩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 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1:5)
하나님 힘 내셔야지요?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전지전능과 무한한 자비만 떠 올려선 안 된다. 그 두 가지 특성은 거룩을 이루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이지 거룩 자체는 아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과도 다르며 하나님 만이 갖는 유일한 특성은 영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 내가 기도하는 제목들을 그대로 응답 받아내는 데만 오직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기껏 무엇이든 소원대로 이뤄주는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나, 금 도끼, 은 도끼, 쇠 도끼 중 어느 것이 네 도끼냐 묻는 신선처럼 생각한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잘 믿고 착하게만 살면 내 쇠 도끼말고도 금 도끼, 은 도끼까지 다 주시겠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신자가 기도한 대로 제대로 응답이 안되거나 지체될 때에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는가? 혹시 하나님이 내 이 어려운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가? 언제나 이 두 가지 의심이다. 이는 참으로 모순된 생각이다. 기도 시작할 때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붙들고 기도해 놓고 기도 마칠 때는 하나님이 전지저능하지 않은 것 같은 의심으로 끝을 내면 기도는 왜 하는가? 명색이 신자라면서 하나님에 대해 하나라도 제대로 믿은 구석이라곤 없다.
간혹 장로님들이 기도할 때 왜 미사여구 수식어를 그렇게도 많이 동원하는가? 자기의 신앙 실력을 드러내고 싶은 바리새인적인 위선도 있겠지만, 다른 한 편으론 오직 하나님의 보상과 응답에만 관심이 있다는 반증이다. 기도를 길게 한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내 치성과 정성이 모자라 기도 응답이 지체되거나 안 되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은 언제나 기도를 길게 늘어뜨리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칭찬은 아부가 아니지만 아부하기 위해선 찬사를 많이 늘어 놓을 수 밖에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아부가 지나치면 자칫 인간이 하나님을 격려하는 것이 되 버릴 수 있다. 왜 응답하지 않지? 라는 의심은 자연적으로 혹시 하나님이 힘이 모자라는가라는 또 다른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마치 떼를 쓰고 부르짖는 모습이, “하나님 왜 이리 힘이 없으십니까? 저도 지금부터 힘을 낼 테니 하나님도 제발 힘 좀 내세요. 그래서 빨리 이 기도 응답해주셔야지요”로 들린다면 지나친 말일까? 기운 빠진 하나님에게 “으샤으샤!” 하면서 기도자가 힘을 보태 주는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고도 손의 못 자국을 만져 보고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서야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셨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신자가 신통력이 있거나, 성경을 꿰 뚫는 신앙 실력이 있어 보지 않고도 하나님 말씀을 줄줄 외우고, 의지가 굳어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기도의 응답이 당장 눈 앞에 내가 기도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대로 내게 제일 유익한 길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하나님 당신의 뜻과 계획 안에서 반드시 이뤄짐에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 기도 응답이 된 것도 아니고 그럴 징조도 없다. 내 기도한 대로 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신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분만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안에서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에 티끌만치도 의심이 없어야 한다. 보이지 않으시기에 썩지 않으시는 분임을 믿는다.
흔히들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반드시 이뤄 주실 것을 믿는 자가 있다. 마치 미리 김치 국부터 마시듯 응답도 되기 전에 그대로 응답될 것에 감사한다. 자칫 자기 의지력을 믿고 스스로의 신념에 투철한 것 뿐으로 자기 생각에 속고 있지 않는지 잘 점검해 보아야 한다. 기도하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는 하나님 당신 외는 아무도 모른다.
‘믿슙니다’와 ‘믿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완전하시다. 신실하시고 거짓과 변개가 일절 없으시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그 분이 나를 어떤 계략으로 조종해서 일부러 이렇게 힘든 고난에 빠트린 것이 아님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아시고 또 나를 사랑하시되 그 사랑에 단 한 점의 먼지와 오류가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다. 그 분이 신자에게 하신 약속만은 천하는 바뀌어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은 구태여 성경을 몰라도 누구나 아는 ABC 같은 상식이지 않는가?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기껏 &n"sp;One Bed 아파트에서 Two Bed 아파트로 바꿔주고 이번 달 렌트비에서 500불 모자라는 것을 겨우 채워주는 정도로 알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그 정도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사50:2)
그럼에도 왜 신자들이 이번 달 렌트비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믿슙니다’로 기도하는가? 그만큼 상황이 위급하다는 뜻도 있겠지만 혹시 하나님이 그 일조차 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불신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칭찬이 지나쳐 하나님께 아부하고 있거나 하나님 더러 힘 내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는 자는 ‘믿습니다’로 그만이지 ‘믿슙니다’가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진정으로 인정하는 ‘믿습니다’는 찬양이지만 입에 침 튀겨 가면서 고함 지르는 ‘믿슙니다’는 아부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어떤 자인가? 돈이 많고 권세가 많은 자가 아니다. 그것들은 있다가도 금방 없어진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목에 칼이 들어 와도 한 번 뱉은 말은 끝까지 지키는 자 아닌가? 절대 거짓말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덕 부리지 않고 한결 같은 자다. 사람을 믿을 때도 이러한데 하나님을 믿을 때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오직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돈과 권세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세상의 권력자와 부자 곁에는 아첨꾼만 들끓게 마련이다. 마치 이사야 시대뿐 아니라 요즘도 살진 짐승을 바치려고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신자가 들끓듯이 말이다.
신자의 참 소망
동독이 자유화되기 전 아직 공산독재 국가였던 시절에 있었던 실화다. 맥클렌부르크라는 시골 마을에 하나님을 믿는 10살짜리 여학생이 있었다. 기독교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부모가 신자라 집 안에서 비밀로 그 믿음을 물려 받았다. 하루는 학교 선생님이 자기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하며 “하나님은 없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온전히 믿는 그녀로선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말이라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화가 난 선생님이 집에 가서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을 50번 적어 오라는 숙제를 내 주었다. 부모님과 상의하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그녀는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라고 50번 적어 갔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하나님은 절대로 없다”를 백번 적어오라고 했다. 다음 날 그녀는 “하나님은 절대로 존재하십니다”를 백번 적어갔다. 화가 머리까지 치민 선생님이 “너를 비밀 경찰에 고발해 벌을 받게 할 테니 너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는지 두고 보자”고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신고하러 나갔다. 채 학교 운동장을 벗어나기도 전에 자전거가 넘어지고 선생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이런 간증을 듣는 신자는 당장 그 선생이 죽었다는 것, 하나님이 대단하신 능력의 소유자라는 데만 신경을 쓴다. 물론 신자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은 어떤 기적적인 방법도 동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지으신 분이 한 사람 죽이고 살리는 것이 무슨 큰 대수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숙제를 받은 어린 여학생이 집에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설마 상대 선생을 죽여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을 리는 만무하다. 단지 그런 핍박을 그치게 해달라고는 기도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소녀의 더 중요한 기도는 그 다음이다. “내일 이 숙제를 선생님 요구대로 해가지 않으면 어떤 수난을 겪을 지 모릅니다. 설사 또 다른 핍박을 받는다 해도 이겨 낼 믿음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소망과 구원과 의지되시는 하나님 당신만은 절대 놓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 항상 “이 환난과 핍박을 그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앞 부분의 기도는 잘 한다. 그것도 머리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 들고 있는 슈퍼맨 혹은 무슨 엉석이든 받아주는 마리아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러다 응답이 지체되면 그저 하나님께 아부 내지 격려하기 바쁘다. 그래도 감감무소식이면 그 때부터 신앙이 흔들리고 실망해 넘어지기 시작한다. 자기가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 온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다.
예수님이 우리더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기도하라는 뜻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부나 격려가 필요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이 세상에서 한 분 완전하신 그 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칭찬하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으신 그 분 앞에 나올 때는 우리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 없는 믿음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세상과 절대 같지 않다. 하나님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오직 한 가지는 영원하시다는 것, 완전하시다는 것, 변개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만이 신자의 기도가 응답되는 유일한 근거이자 전부다.
우리 또한 환난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 어린 여학생처럼 우리의 소망, 의지, 위로, 능력, 구원의 모든 근거를 하나님께만 두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이 내가 기도한대로 응답하지 않으실지라도 나는 절대 하나님을 놓지 않겠습니다는 확신 가운데 있기를 소원해야 한다. 모든 기도의 근거를 하나님의 능력에 둘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기도하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 그 때 비로소 기도에 능력이 생기고 내 인생이 변화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부하여 성전 마당만 밟고 갈 것인가? 아니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할 것인가?
너무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