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12)-용서는 해도 잊지는 못해

조회 수 4210 추천 수 376 2005.07.17 22: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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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예배 중에 나가버린 선교사

로버트 스티븐슨이라는 선교사가 타히티 섬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이 분은 매일 가정 예배를 드렸고 예배 때마다 항상  주기도문을 외웠다. 하루는 갑자기 스티븐슨이 예배를 드리다 말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놀란 아내가 따라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오늘 만큼은 도저히 내가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감히 어떻게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크리소스톰이라는 초대교부 중의 한 사람이 4세기 경에 안디옥에서 성경을  강해 설교하며 도덕적, 영적으로 회개하길 촉구했다. 당시 그곳 사람들도 실제로 주기도문을 외울 때에 이 구절이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이 구절 그대로 하나님께 간구할 자신이 있는가?  

본문이 표현한대로 해석하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는 것보다 먼저다. 원문의 시제도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과거형이고 하나님께 우리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사본이 훨씬 많다. 예수님이 다른 부분에서 말씀하신 뜻도 동일하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한 후에 바치라고 했다.(마5:23,24) 이웃을 비판하고 헤아리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비판하고 헤아린 그대로 우리도 비판 받고 헤아림 받기 때문이다.(마7:1,2) 심지어 야고보 사도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2:13)고 했다.

사람은 그 정도는 달라도 누구나 인간 관계의 상처를 갖고 있다.  특별히 미국 이민 와 있는 우리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항상 감정이 예민해 있는 상태라 별 것 아닌 일로 사이가 틀어지고 원수가 된다. 신자라고 예외는 아니며 신자이기 때문에 상처는 더 크고 마음에 부담으로 끝까지 남아 있다.

교포사회에선 한국처럼 교제 범위가 넓지 못하다. 출신과 성장 배경을 잘 아는 사람을 선택해서 교제 할 수 없다. 한국에서 사기꾼이었는지 전과자였는지 검증을 거치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교제하다 보니 내 쪽에서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아무리 신자지만 그런 사람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당황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꼭 교포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 사회는 어느 세대, 어느 장소에서도 서로 죄짓고 상처를 주고 받는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과도 틀어진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자기 남편, 아내, 부모, 형제, 자녀와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말도 않고 원수로 지내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형편에 과연 누가 자신 있게 이 구절대로 주님께 간구할 수 있을까?

용서는 해도 절대 잊지는 못해

문제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느냐 못 하느냐 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기껏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그 용서에도 남을 용서하는 태도와 내용과 방식에 우리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부분이 많다. 먼저 찾아가 진정으로 완전히 마음을 털어 놓고 배상할 것 하고 화해하여 이전과 같은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대가  먼저 빌고 찾아 오길 기다리지 내가 먼저 찾아가는 법은 없다.

우리가 하는 용서의 대부분은 갈 데까지 가버려  현실 여건상 화해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진행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으려고 원수졌던 형제끼리 형식적으로만 화해한다. 종교적 도덕적 의무감으로 별로 내키지 않지만 용서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하는 용서는 “너를 용서는 하지만 죽어도 잊지는 않을 거야”식이 된다. 이 말은 손해 배상 청구만 안 하겠다는 것이지 용서는 아니다. 또 상대는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자기 마음 속으로만 용서한다. 그것도 내 마음 속에 상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린 정도를 가지고 용서했다고 착각한다.

신자의 경우는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번이 아니고 수십 번씩 용서한다. 기도할 때는 회개하며 용서했다가 그 사람 얼굴만 쳐다보면 다시 속이 뒤집어져 미워한다. 그래서 다시 회개하고 용서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상대가 멀리 이사가 내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지든지 죽어 없어질 때까지 혼자서 용서를 반복한다. 그러면 “내가 먼저 가서 고개 숙이지 않아 다행이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그 사람이 안됐다는 식으로 사랑이 넘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 동안 용서 못했던 것에 대한 자기 양심의 가책은 없어지지는 않는다.  

진정한 용서란 단 한 번이면 족하다. 한 번 만에 용서가 안되고 두고두고 생각나는 것은 사실 용서가 아니다. 용서하고 있는 과정이지 아직 용서한 것은 아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훈련을 쌓고 있는 중일 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이웃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럼 혹시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할 때 우리가 남을 용서한 방식 그대로 하시는 것은 아닐까? “나도 너를 용서는 하는데 네가 지은 죄는 죽어도 안 잊을 거야.” “네가 마음 속으로 용서했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나한테서 복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 또는 “네가 기도하고 회개하는 그때만 용서해주지 평소 때 너 하는 꼴을 보니 도저히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워 용서해 줄 가 없어”라고 하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아가 불교식으로 만약 우리가 남을 용서해 준 횟수만큼만 우리 죄를 용서해주신다면 더 큰 일이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우리가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우리를 용서해 주시거나 우리가 용서한 방식대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우리 죄를 용서 안 해주시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일 날 이 자리에 목사를 비롯해 아무도 앉아 있을 사람 없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꼭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되어 있는가?

명령과 결과의 하나님

최근에 어떤 분이 이메일로 기독교 신앙에 관해 이런 질문을 하나 해왔다. “성경에 보면 ‘그리하면… 복 주리라’는 표현이 많은데 그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조건부 하나님인가?” 예를 들어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7:23)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해답을 해드렸는데 가장 핵심 되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은 ‘조건과 상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명령과 결과’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말 표현에는 정확한 구분이 없지만 영어로 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영어로는 이 구절은 “Obey my voice, and I will be your God”이다.  문법적으로 Do 나  Don’t something  다음에 콤마( , )하고 and나  or가 오는 구문이다.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 그러면 (콤마 뒤에 and가 오는 경우)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or가 오는 경우) 어떻게 되리라의 뜻이다. 명령과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만약 이 구절이 조건과 상벌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If you obey my voice, then I will be your God”이다. If…., then…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일 아침 늦어도 집에서 7시에는 출발해야 9시 기차를 탈 수 있으니 반드시 7시 전에 출발해”는 명령과 결과다. 9시 출발하는 기차는 항상 있다. 그 사람이 9시에 도착하든 안 하든 9시면 출발한다. 9시에 출발한다는 항상 예비되어 있는 결과를 누리기 위해선 반드시 7시 전에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내일 기차 역에 아침 9시까지 도착하면 피크닉 가고 그 때까지 도착 못하면 피크닉은 취소야”가 되면 조건과 상벌이다. 피크닉을 가고 안 가고는 순전히 9시까지 도착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

예레미야 7:23을 조건과 상벌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말씀에 순종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너는 사단의 종이다가 된다. 율법주의이자 선행을 해야 천국을 간다는 구원관이다.

대신에 명령과 결과로 해석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인데 그 사실은 영원토록 변함 없다가 된다. 너가 내 명령을 지키고 안 지키고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는 것과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나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내 품 안에서 사랑과 은총을 받으려면 내 명령을 지켜라. 내 은혜와 축복은 항상 예비되어 있고 언제나 보장되어 있다. 영어로는 Obey my voice, and…의 구문으로 정확히 그 의미가 전달되지만 우리말은 그런 구분이 전혀 없다. 두 경우 다 ‘그리하면… 하리라’는 식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주기도문의 본문을 만약 조건과 상벌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면 아무도 제대로 외울 자 없다. 스티븐슨 선교사처럼 예배 중에 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이웃의 죄를 용서 안 해도 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신자는 반드시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하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기차역에 9시까지 도착하지 못했다고 해서 기차가 집에까지 와서 태워가지는 않는다. 집에서 일찍 나와 기차 역에 정시에 도착해야 하는 것은 신자가 이 땅에서 성실히 수행해야 할 몫이다.

명령에 대한 오해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 가장 잘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말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성경을 지으시고 모든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구절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자꾸 읽는 사람 자신의 지성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만 그 말씀을 이해하려 든다.

성경은 절대로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서 그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 말씀을 통해 신자에게 구체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이 말씀의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본심은 과연 무엇일까? 읽고 또 읽으며 묵상해야 한다.

본문의 뜻이 예수님이 단순하게 신자더러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권면하는 정도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그런 정도는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말할 수 있다. 모든 선각자, 도덕 선생들이 다 이야기 한 것이다. 심지어 아무리 불신자라도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누구에게 죄를 지어 원망 들을 만한 사이가 되어 버리면 괜히 뒷골이 댕기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고 자꾸만 마음 속에 이래선 안 되는데 라는 후회와 자책감이 파고든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진 그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양심의 형태로 누구에게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볼 때 절대 놓쳐선 안 되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조건과 상벌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결과의 원리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명령이라고 하면 우리 모두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명령하신 것은 힘들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고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상관 없이 강제적으로 부과된 임무처럼 오해한다. 그래서 그 명령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상을 주고 불순종하면 벌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다. 그 동안 한국의 군사독재와 가부장적인 문화와 관습에 젖다 보니  명령이라면 무조건 싫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억지로 떠맡아야 하는 것처럼 인식 되어버렸다.  

누구에게 명령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명령을 받는 사람이 어떤 일정한 능력과 수준과 위치에 도달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명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군인에게 총기를 분해 소제해 실탄을 장전하라는 명령은 최소한 논산훈련소 신병 훈련을 마친 자에게만 할 수 있다. 이제 갓 훈련소 입대해 머리 깎은 첫날 그런 명령을 내리면 오발사고가 나 몇 명 죽을 수 있다. 국민학교 일학년에게 구구셈도 안 가르치고 바로 나누기 곱하기 하라고 시킨다면 그 선생이 잘못이다. 틀리는 것 꼬투리 잡아 골탕 먹이고 벌 주려면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러나 학생의 실력을 진정으로 키우려는 선생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용서하지 않는 앙갚음

영국의 오글도르프 장군이 “나는 결코 그 원수를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웨슬레는 “당신이 앞으로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겠다면 그렇게 하셔도 된다”고 맞받았다. 죄를 지은 횟수와 용서하는 횟수를 일대일로 맞추라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인격이 고매한 장군이라도 평소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남에게 죄를 지어 원수 같은 상대로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느 인간도 평생 사는 동안 남에게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남의 죄를 용서해 주라는 것이 그렇다고 어차피 모두 죄인이고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누구는 벌주고 누구는 벌을 안 주고 골치 아프니 너희들 끼리 알아서 사이 좋게 지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 믿었다고 남에게 죄를 안 짓고 나아가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줄 만큼 신령하고 거룩해졌기에 우리더러 이런 명령을 하시는 것은 아니다.

남을 용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앙갚음을 하겠다는 뜻이다. 복수와 신원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 놓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용서하지 않고 있는 그것 만으로라도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겠다는 의미다.

신자더러 남을 용서하라는 것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원과 복수는 오직 하나님의 몫이다. 용서와 사랑은 우리가 맡아야 할 부분이다.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는 까닭이 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와 상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그 억울함과 상처와 비탄과 한숨의 의미를 안다. 그 모든 것들 내가 십자가에서 씻어 주겠다. 이제 내가 너희를 나의 자녀로 삼아 성령을 부어 주겠다. 이미 너희는 성령의 전이다. 너희 겉 사람은 후패할지 모르지만 너희 영혼 속에 좌정한 성령이 너희 속 사람을 날마다 새롭고 강건하게 해 준다. 매일매일 너희 죄와 허물과 상처들을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겠다. 너희는 신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아니 이미 되었다. 너희는 빛과 영원한 생명 속에 있다.”

신자가 이 사실을 잊지만 않는다면 그 결과는 거룩과 의의 모습이 될 것임을 하나님이 보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의 죄를 용서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이미 빛의 자녀로 바뀌었다.  얼마든지 그 명령대로 따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그런 위치와 신분에 도달한 것을 전제로 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남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나의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도 얼마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는 항상 내가 먼저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는가  생각한다. 이 기도를 외울 때 신자의 생각의 무게 중심이 어느 쪽에 가 있는가? 후반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에 가 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련가 아닌가에 만 모든 관심이 집중 되어 있다. 전반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는 이차적인 관심이거나 복을 받는 조건으로 밖에 생각 못한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너희가 지은 죄가 정말 네 영혼을 갉아 먹고 있고, 네 인생의 짐이 되는가? 네 모든 일들이 그  죄에 뒤엉키어 제대로 형통하는 법이 없으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쌓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철저하게 깨닫는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남을 용서하는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는 그 죄를 진정으로 죽기 보다 싫어하는가? 한 쪽 눈을 빼고서라도 천국 가기 소원하는가?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고 용서해주길 원하는가?”

예수님 명령의 참뜻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친 것은 제자들더러 그대로 따르기를 원한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그대로 따라 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명령이란 명령권자의 뜻대로다. 명령 받은 자가 명령의 내용을 함부로 바꾸거나 왜곡시킬 수 없다. 명령한 그대로 따라야 한다. 말 그대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구절만 나오면 쥐구멍을 찾아선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문자적으로도 그대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주님 제가 저에게 상처 주고 손해 입힌 자들을 진정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의 사랑 가운데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렇게 되지 못하는가?

이 문제를 두고 신자가 매번 하는 기도는 어떤 모습인가? 같은 사람을 두고 수십 번씩 용서하는 기도만 한다. 그것도 상대를 용서하는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한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가 다음 번에 만나면 정말 용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에게 그런 힘을 주시옵소서.” 그럼 그 다음 번 기도는 당연히 “용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모든 것을 간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되어야 함에도 “또 다시 용서하지 못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 용서 못하는 죄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만 읊는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해도 되고 또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그렇게라도 기도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기도만 할 것인가? 예수 믿고 난 이후 평생을 본문 말씀의 전반부는 생각지 않고 후반부만 기도한다.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 마음대로 쉽게 할 수 있는 것만 선택해서 따른다. 성경 말씀을 신자가 기록했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예수님은 왜 신자더러 일용할 양식을 구한 다음에 이 용서의 기도를 하라고 하셨겠는가? 너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당연히 남을 용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웃과 틀어지고 죄 짓고 원수지는 것도 결국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자존심과 체면 세우는 문제 때문 아닌가? 그래서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서로 원수진 그 문제는 너희가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용할 양식이 해결되었는데도 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가?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라면 그 은혜에 걸 맞는 자로 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나아가 남을 용서하는 것 뿐 아니라 네 죄도 씻어 신령한 자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에게 이제 내 모든 인생을 의탁하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을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대로 사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항상 감격이 넘치고 찬양 부르며 구름 위를 붕붕 떠다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조건과 상벌의 하나님이 아니고 명령과 결과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축복과 은혜는 항상 먼저 예비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고 그대로 따르면 당연히 누리게 된다. 신자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때가서 복을 준비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순서가 뒤 바뀌는 법은 절대 없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바로 그 순서를 바로 잡은 것이지 않는가? 정확하게는 순서를 바로 잡은 것이 아니다. 태초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은 명령과 결과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도 사단의 영에 사로 잡힌 인간이 거꾸로 알고 있었기에 순서를 바로 깨우치도록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그 분과 원수 되었을 때 확증하셨다.  

이제 예수 십자가를 바로 알게 된 신자는 남의 죄를 용서하라는 명령을 기쁨으로 순종해야 하며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다. 주님의 영이 함께 하므로 신령한 자가 되었다. 명령을 수행할 능력이 있고 그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면  남은 것은 그 명령대로 따르려는 소원뿐이다.    

이전에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형제와 배우자 마저 원망하며 미워했던 것들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세상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더러웠던 모든 육신과 정신과 영혼을 매일 주님의 보혈로 씻고 하나님의 빛과 생명으로 채우길 소원해야 한다. 더 이상 내 속에 더러운 것이 발 붙이지 못하고 나를 흔들어 시험에 빠트리지 못함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진정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씩 실천해야 한다.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를 우리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도록 다 예비해 놓으셨기에 명령하셨다.

그래서 신자는 더 이상 이 구절의 기도에 꽁무니를 뺄 필요가 없다. 정말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제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모든 이웃의 잘못과 상처를 사해 주었습니다. 이제 내 죄를 사해주시고 나에게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담대하게 기도 하셔야 한다.

바리새인들처럼 선행과 구제와 십일조 한 것을 자랑해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제가 이제 십자가 사랑을 알아 남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된 것, 예수님의 고귀한 이름을 부르게 된 이 위치, 이 신분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자리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면 죽을 수 밖에 없었으며 제게 소망이라고는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젠 두 번 다시는 주님의 은혜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그 크신 긍휼과 은총 가운데서 제 남은 생애를 다 바치게 해 주시옵소서. 더 이상 더러운 죄의 사슬에 묶이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소원하는 기도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제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제 죄를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전에는 긍휼을 행함도 없이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두 번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제가 긍휼하지 않으면 저에게서 긍휼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본문은 기도가 아니라 명령이다. 나아가 결과가 보장 되어 있는 기도다. 이제는  우리 모두 이 구절을  정말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자.

사라의 웃음

2012.08.05 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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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참 복잡하고 미묘한 구조를 가진 것 같습니다. 말씀을 자신의 이성으로 받아들여서 가뜩이나 복잡스런 생각들로 말씀을 이상하게 적용하고 있는 자신임을 발견합니다. 그 가장 근본 잘못은 십자가의 보혈로 닦아 주시고 또 닦아 주시려 곁에 매일 그렇게 서 계신 예수님을 부러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는 잘못 그러하기에 자신과의 화해가 너무도 더디고 어려운 숙제가 되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모난 것, 부족한 것, 어리석은 것까지 다 이미 아시기에 십자가에서 다 에둘러 덮어주시고 닦아 주시는 보혈의 공로를 더더욱 의지하길 기도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7.27 18:38:44
*.14.99.253

한동안 유독 용서가 안되던 불신자 한명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시니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그저 혼자 마음속으로 한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기도드릴때마다 그가 떠오르며 진정으로 용서 한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본문에 지적하신것 처럼 이문제로 용서를 수년간 몇번씩 했는지 모를정도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죄에 찌든 나도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는데 그것에 비하면 나에게 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며 용서한다고 스스로 다그치기도 수십번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마음 뒷편으론 본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용서하지 않는 앙갚음의 마음도 확실히 있었습니다. 앙갚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끄럽지만 그가 잘풀리지 못하기를 응근 바랬던 그런 악하고 추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거 정말 안되겠다 싶어 회개하며 그를 위해 기도도 하고 진정으로 용서하려 했으나 시간이 흘러 문득 그가 생각나면 미워했던 마음부터 먼저 되살아나 그를 위한 기도마져 의도적으로 빼버리며 이제껏 주님을 속이며 용서한척 했던 거짓되고 완악하기만한 제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그사람에 대한 용서가 어려워 그저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길 바라며 언젠가는 용서할 수 있게 저를 이끄시겠지라는 마음이 최선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날 이문제로 내가 그동안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이어감에 날마다 그분의 말씀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고 또 그것이 순종으로 이어질때 내영혼이 진정으로 즐겁고 기쁨이 넘침을 알게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오랫동안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그 미움과 증오를 그분의 말씀과 사랑으로 힘을 잃고 사라지게 만드셨습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그 증오하는 마음보다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기쁨이 훨씬 더 커졌습니다. 즉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더라면 그분의 말씀 또한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워 그분의 용서하라는 말씀 역시도 사실 전혀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그간 진정 용서하지 못했던 이유가 제 중심에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기보다 증오와 미움으로 점철되어진 완악한 내 마음을 마치 우상처럼 더 우선시 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면 그분 말씀대로 순종치 못할게 전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주십니다. 지금 이글을 쓰면서 한편으론 교만한 마음이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느끼고 있는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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