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 (16-完)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주기도문의 사족(?)
본문은 언뜻 보면 꼭 있어야 할 위치가 아닌데도 필요 없는 잔소리 같이 붙어 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친 후에는 그 배운 것을 열심히 실천하도록 격려하거나 이렇게 저렇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방안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른 순서다. 아이들에게 구구셈을 가르치면 물건 살 때 단가에다 개수를 곱하면 지불할 금액이 나오니까 그렇게 활용해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9-13절까지 주님은 신자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기도의 내용과 순서에 관해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본문에선 가르친 대로 일하면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든지 혹시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라는 식으로 기도를 실천하는 문제를 언급해야 맞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말 대신에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기도란 일차적으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기도 세미나에 참석하여 아무리 공부하더라도 막상 기도를 안 하면 그만이다. 반면에 아무리 그런 공부를 안 해도 일단 가난한 심령을 갖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성령이 인도해 주는 것이 기도다. 예수님은 기도의 실천 방안 대신에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 따로 있었다.
주기도문 다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본문이 주기도문의 결론 격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본질을 다시 강조하기를 원하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본문 말씀대로 신자가 기도할 내용과 기도할 때의 자세는 궁극적으로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은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라는 뜻이다. 또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가 세상과 교회 생활을 따로 구분해서 살지 않는 한 신자의 삶과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는가? 지금 당장 기도해서 이뤄내어야 할 가장 시급한 일로 간주하고 있는가?
죽음 직전과 직후
신자의 삶에 용서가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니까 별로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지금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에 섰다고 가정했을 때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이겠는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한 것인가? 권력을 마음껏 누려 보지 못한 것일까? 자기 이름을 크게 날려 보지 못한 것일까? 맛 있는 음식을 다 맛보지 못하고 경치 좋은 곳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것일까?
막상 죽음이 코 앞에 닥치면 평생 동안 삶의 중요한 목표로 삼아 뼈빠지게 노력하며 달성해보려 했던 목표들 그 어느 것 하나도 별로 아쉽지 않다. 그 때가서 문제되는 것은 오직 죄뿐이다. 지난 세월 동안에 저지른 모든 실패, 과오, 범죄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을 해보지 못한 후회만 남는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남에게 상처를 주고 원수처럼 지내며 용서하지 못한 것이 가장 괴롭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의 부담과 영혼의 멍에를 메어놓고 떠난다는 것만큼 끝까지 힘들게 하는 것이 없다. 언젠가 예를 든 대로 암으로 6개월 시한부 생명의 선고를 받은 한 대학교수가 있었는데 그 생의 마지막 기간을 그 동안 사이가 비틀어지고 서로 상처 주고 받으며 미워했던 사람을 생각나는 대로 매일 한 사람씩 초대해 식사하며 화해하고 용서했다고 한다.
아직 젊어서 죽을 때가 되어보지 못해 여전히 용서가 그렇게 시급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럼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 보라. 자기 주위에 부모, 배우자, 형제, 친구 등 누구라도 아주 가까웠던 사람을 먼저 떠나 보낸 후에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전에 좀 더 잘 해주지 못한 것 아닌가? 부모에게 진정으로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것이 얼마나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 아내,남편,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고 나면 그들을 더 포용하고 먼저 양보하는 사랑으로 대해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
반드시 호의호식으로 호강 시켜드리지 못했던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정말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하지 않았던 것이 더 괴롭다. 내 속에 그 사람을 향해 품고 있었던 것들 그것이 애정, 연민, 동정, 미련이든지 아니면 분노, 시기, 질투, 증오였던지 간에 완전히 털어내어 서로 간의 오해나 상처를 씻지 못하고 마음의 응어리를 안은 채 떠나 보낸 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다. 이미 후회해도 늦고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비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죽음 직전의 떠나는 사람에게나 죽음 직후에 떠나 보낸 사람 모두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모든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는 바로 그 일이다.
기도의 새로운 정의(Definition)
예수님은 9절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누군가 잘못된 기도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것과 다르게 기도하라는 뜻이다. 주님이 이 기도를 가르치신 일차적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기도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라고 기도했다.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쳐내는 기도를 했다. 자기의 의만 강조해 죄인인 세리와 차별 대우를 요구했다. 자기들은 선행을 많이 하고 착하니까 특별 대우를 해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하고 이제 기도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 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혹시라도 “제가 잘 믿었지 않습니까?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도 성실하게 했습니다. 불신자인 저 죄인보다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믿는 자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축복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아직 제가 이 모양 이 꼴이며 대신에 저 자는 저렇게 형통합니까”라는 마음을 품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은 주기도문에 곁다리로 붙은 사족(蛇足)이 아니라 결론으로서 기도의 정의(Definition)을 바꾼 말씀이다. 기도란 우리의 계획과 뜻을 하늘 나라에서 성취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맨 먼저 강조한 대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간구하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려면 자기만의 유익을 위한 기도를 해선 안 된다. 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서로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는가? 하나님 나라는 용서에서 시작해서 사랑으로만 완성된다.
신자의 삶 속에서 자기가 속한 가정, 직장, 교회, 사회와 민족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로 바꾸고 더욱 아름답게 꾸며 나가는 일 말고 다른 어떤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 단 한 치의 가식, 위선, 사기, 숨김, 강요가 개입되지 않게 하고 진정으로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로 바꾸어지길 소원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용서의 본질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 더러 상대의 허물을 고치고 바뀌게 해달라고 해야 하는가? 성령이 역사하여 상대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찾아와 용서를 빌도록 해달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 속에 정말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이 생겨나도록 간구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게 기도한다고 틀리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솔직히 따져 지금까지 그렇게 기도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했는가?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자꾸 상대가 용서할 만한 상태로 변화되고 사랑할만한 조건을 달라고 한다. 최소한 서로 마음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되어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상대가 변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자기라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할 만큼 나의 감정과 생각이 따라 오지 못하니까 결국은 의지적으로라도 용서하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천신만고의 노력과 수 많은 망설임 끝에 어쩌다 죽기 보다 싫은 결심을 하고 용서해보지만 사실 그렇게 해서는 평생에 진정한 용서와 사랑은 몇 번 못한다. 여전히 죽을 때 후회할 수 밖에 없다.
용서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상대가 나에게 끼친 손해, 잘못, 상처들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좋아지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훨씬 나중 문제다. 우리 모두 용서가 이루어져야 할 이 근본 시작은 하지 않고 용서가 생긴 후에 일어나는 결과부터 먼저 하려니 용서가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다. 자기 마음에 용서가 먼저 일어나야 찾아가 상대와 화해가 되지 상대와 화해를 먼저 하려 한다고 자기 마음에까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정해 놓은 상대에 대한 어떤 기준, 예상, 기대치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완전히 제로의 상태에서 상대를 다시 대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상대의 허물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다. 아직 상대가 변한 것 하나 없다. 내 속에 선한 것이 따로 생긴 것도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상대에 대한 어떤 기준과 기대치를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아무리 인간적, 의지적, 윤리적, 종교적 용서를 해도 그것은 참 용서가 아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우리말에 “핑계 없는 무덤 하나 없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모든 인생이 서로 제 잘났다고 자랑하며 자기가 최고라는 것이다. 비록 내가 실패했다 할지라도 내 쪽에 결점, 허물, 잘못과 책임은 하나 없고 몽땅 사람, 세상, 주위 여건 탓이라는 변명이다.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자기가 잘못한 것 없다고 핑계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이다.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가 또 누가 많이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을 긍정적 측면으로 해석하면 공원 묘지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수 만의 인생 중에 슬프고 애절하며 고달프지 않았던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다. 재벌 회장이든 구멍가게 주인이든, 배운 것이 많든 일자 무식꾼이든, 인물과 체격이 좋았든 나빴든 모두 각자 나름대로 수 많은 고민과 갈등의 삶을 살게 마련이다. 인생의 험난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주름살지고 구부러진 흔적들을 남기며 그런 과정에서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며 증오하는 일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 설령 살아 생전에 법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았을지라도 그 사람 내면에는 제삼자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둡고 침침한 영혼의 묶임과 눌림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이태리 수입 대리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가족 묘지에 묻혔거나 국립 묘지에 수 많은 훈장을 달고 누웠다고 해서 따로 선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다. 인간끼리 누가 더 잘났고, 더 똑똑했고, 더 착했다는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의 죽음 위에는 후회와 아쉬움과 자기의 실패에 대한 핑계뿐이다. 전도서 기자의 고백대로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되고 헛된 가련한 인생을 살다 간 것 뿐이다. 핑계가 많다는 것은 물론 그 속에 잘못과 죄악이 분명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또한 남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각자 특유의 온갖 아쉬운 사연과 이유와 억울한 사정들도 숨겨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인간이 인간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과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의 길이가 제각기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자신에게 솔직하게 한 번 물어보자. 지금까지 진정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한 적이 많았는가 시기, 질투, 미워한 적이 많았는가?
혹시라도 나는 특별히 남과 원수질 만한 일을 별로 한 적이 없다고 자신하는가? 그런 분들은 이렇게 물어보라. 나로 인해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적이 많은가 나쁜 영향력을 끼친 적이 많은가? 상대를 시험하고 유혹해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는 뜻이 아니다. 지나고 나니 그 때 내가 좀더 따뜻한 말로 대할 수 있었는데, 목소리의 톤을 한 칸만 낮추었더라면, 눈만 흘기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한 일이 얼마나 있었는가라는 뜻이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모 자식 간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형제나 친구들끼리 말이다. 도저히 헤아릴 수 도 없고 기억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르고 지나갔지만 나의 그런 무관심과 부주의로 인해 내 아내, 남편, 자식이 느꼈을 실망감, 열등감, 모멸감, 수치감이 얼마나 그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겠는가? 또 그것들이 용서와 사랑으로 제대로 씻음 받지 못해 마음 속 깊이 견고한 진이 되어 평생을 괴롭히는 응어리로 지금도 남아 있는지, 나아가 그 인생을 실패로 치닫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는지 우리가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런 일이 있으리라 추측이라도 해 보았는가?
물론 우리가 상처를 준 것도 많지만 우리 또한 받은 상처가 얼마나 많으며 아직 다 청산되지 못한 채 우리 인생의 찌꺼기와 주름살로 남아 있지 않은가?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가? 물론 세상과 사람과 환경과 악의 세력이 우리를 넘어뜨린 일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가긴 기준과 잣대에 상대를 끼워 맞추려 하다 맞지 않으면 남편이든 아내든 바로 그 자리에서 인상부터 먼저 찌푸렸기 때문이다.
병이 나으면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바바리아 지방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헤젤바우러란 사람이 중병에 걸려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는 목사님이 와 보니 병실에서 간절히 그가 기도 드리고 있었다. 목사님이 궁금해서 무엇을 기도 드렸는가 물었더니 그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했다고 대답했다. 그럼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달라’고 본문에서처럼 다른 사람의 과실을 전부 용서하는 기도를 했느냐고 재차 물었더니 딱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다 용서했다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전부 다 용서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는 목사님이 권하시니까 그 원수도 용서하겠는데 대신 내 병이 다시 낫게 되면 없었던 일로 칩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자기가 정해 놓은 규격과 기준을 이 땅에 있는 한 죽을 때까지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모든 인생은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괴로울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천하의 성자라도 그렇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도 완벽한 도덕 선생과 3년간이나 함께 생활하며 훈련 받았음에도 스승이 돌아가기 전날 밤에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련지 자리 다툼을 했고 자기들 중에 누가 배반자인지 서로 의심하고 있었다. 인간은 누가 착하고 누가 죄가 더 많은지 구분지울 수 없다. 특별히 누구만 용서 받아야 할 자라든가 어떤 특정인이 더 나빠 용서를 더 많이 받아야 하는 법도 없다. 우리 모두 허물 투성이요 부족하고 불완전하며 연약하다.
이 문제는 철학적,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따져 볼 필요도 없다. 우리가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냈는지 잠간만 생각해 봐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특별히 이곳 교민 사회를 보라.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게 살며 구구절절 눈물겨운 사연이 없는 자 하나 없지 않는가? 그런데 이민 사회에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사랑이 많은가?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많은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허물과 죄악과 시련과 눈물을 십자가에 다 못 박는 대신 그 고통을 예수님이 감당하게 하신 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셨다. 어떻게 용서하셨는가? 우리를 변화시켜 용서 받을 자격과 조건을 갖춰 놓고 용서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너무나 우리를 좋아하고 짝 사랑 해서 무조건 용서하셨는가? 둘 다 아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너무나 증오하셔서 독생자를 죽이시기 까지 진노의 형벌을 쏟아 부으셨다. 대신에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의의 기준을 포기했다. 선행과 공적으로 인한 인간 쪽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셨다. 아니 처음부터 그것을 받으실 계획은 아예 갖고 있지 않으셨다. 우리의 체질이 너무나 연약하고 진토인 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신자가 해야 할 기도
예수님은 주기도문으로 신자가 해야 할 기도를 좀더 윤리적으로 고급하고 영적으로 더 신령한 차원으로 높이신 것이 아니다. 기도의 본질을 바꾸신 것이다. 신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를 가르치셨다. 우리더러 신자가 꼭 해야 할 기도, 세상사람은 할 수 없는 기도를 하라고 했다. 신자에게 참되고도 올바른 기도를 할 책임을 맡기셨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자들이 서로 상처주고 받으며 헛되고 헛된 삶을 살며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셔서 이제 신자더러 그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다. 신자만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살아 그 무덤에 핑계거리를 엉뚱한 데서 찾지 않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자기 실패의 변명거리로 삼는다. 아무리 남과 세상을 핑계 삼아도 자기 잘못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내가 정해 놓은 틀과 규격을 버리고 상대를 인정하고 살려야 한다. 그래야 신자 자신도 산다.
내가 가진 기준과 잣대를 버려 상대의 허물을 인정해 준다고 해서 상대를 포기하고 방임하고 상대가 제멋대로 해도 무조건 참고 견디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 모두 완전히 버려 제로의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내 쪽에서 진정으로 남에게 줄 것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참 용서와 사랑을 할 수 없다.
언젠가 가장 성공한 인생을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살아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했는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다. 그럼 다시 우리 모두에게 자문해 보자.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모든 규격과 틀을 완전히 내려 놓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주위에 있는가? 정말 우리 속을 완전히 까뒤집어 보았을 때에 심지어 내 남편과 아내, 자녀들, 교회 성도들에게 조차 그렇게 할 자신이 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모두 아직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주님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며 은혜와 권능으로 인도하신다. 매일 매 순간 그런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이 신자인데 왜 남에게는 그렇게 못하는가?
기도가 내 소원을 열심히 빌어 형통을 이뤄내는 작업이 결코 아니다. 매일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참으로 어리석고도 교만하며 알량한 기준과 잣대를 버려나가는 싸움이다.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모시는 진정한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가 되도록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회상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