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욥을 시험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성경의문2)

조회 수 17362 추천 수 91 2009.01.22 20:55:03
하나님이 욥을 시험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성경의문2)

[질문]


보통 목사님들은 욥기를 얘기할 때 고난을 견디면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신다. 혹은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하게 하신다. 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은 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는 가장 큰 목적* 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욥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욥기서의 후반부에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말씀들을 하시는 중에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40:8)는 말씀을 하셨는데 욥이 스스로 의롭다 하여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려 했는지,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결국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고 변화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질문자님의 지적대로 목사님들이 욥기를 단순히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그를 더 성숙시키려 했다고만 해석하고 치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성격의 고난을 통해서 성숙시키는 것인지, 또 그에 대한 욥의 반응과 성숙되어 가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성숙해진 후의 결과는 과연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분석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인생을 살면서 겪어야 할 고난에도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고통의 세기도 다 다릅니다. 또 신자마다 믿음의 수준도 각기 다릅니다. 고난을 통해 믿음을 성숙시킨다는 언급도 구체적인 설명을 요합니다. 고난에서 영적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인지, 또 그 깨달음은 어떤 내용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고난을 참아 내기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자동으로 믿음도 성숙된다는 것인지 등등 따져 보아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책, 욥기

욥기의 가치는 아주 무궁무진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욥기가 포함되어 있기에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에 틀림없다고 더욱 확신합니다. 욥기의 주제가 어떤 것입니까? 아무 이유 없이 도무지 감당치 못할 정도의 엄청난 고난을 졸지에 당한 욥이 그 원인을 알고자 씨름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구체적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나버립니다. 이런 전제를 가져야만 욥기에 대한 피상적 해석과 적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욥기가 언제 기록되었습니까? 성경학자들은 욥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봅니다.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때 벌써 아주 신실한 신자도 아무 이유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했으며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유마저 끝내 모를 수 있다고 진술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의 어떤 종교 경전이 수천 년 전에 이런 기술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욥과 세 친구의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논쟁의 초점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친구들은 죄를 지었으니 환난을 당했다는 것인 반면에 욥은 자기는 그런 정도의 환난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것이 없으니 하나님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그런데 토론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엘리후와 욥에게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도 세 친구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형편은 어떠합니까? 잘 믿으면 복 받고 죄 지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기복주의 신앙이 얼마나 성행합니까? 최근에는 아예 기독교의 주된 흐름이다시피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기복주의가 틀렸다고 욥기에 명시적으로, 그것도 지금부터 4천 년 전에 이미 선포 해놓았는데도 목사님들이 욥의 세 친구 같은 설교와 가르침을 줄기차게 되풀이하고 있으니 대체 어떻게 된 연유입니까?  

이 책의 오묘한 내용은 그 첫 부분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욥이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발단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늘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욥을 두고서 두 번의 내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랍다 못해 신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분노를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 신비로운 까닭은 지상의 모든 일이 천상에 동시에 생중계 되고, 아니 천상의 계획과 조종대로 지상에서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분노가 치미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사단이 서로 장난치듯이 행한 두 번의 내기에 당시로선, 아니 지금도 도저히 찾기 힘든 신실한 믿음의 종이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몰라도 도대체 하나님이 그럴 수가, 그것도 사단과 힘을 합해서,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욥기에서 파내어야 할 신앙상의 과제가 많고 심오하다고 제가 서두에서 말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성숙된다고 믿으면 하나님은 신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채찍만 사용하시는 분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장 먼저 따져야 할 것은 전체 줄거리입니다. 문맥 전체에서 밝히고자 하는 주제와 신학을 알지 못하고는 단편적이고도 문자적인 해석으로 그칩니다. 욥기는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욥의 세 친구의 말에도 부분적으로 옳은 내용이 곳곳에 많이 숨겨져 있으며 또 계속 논쟁만 이어지기에 구체적인 맥을 잡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분에서 누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조차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 할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따지고 보면 신학적으로 틀린 말이며, 수아 사람 발닷이 욥을 조롱하면서 말한 일종의 욕설에 해당됩니다. 그런데도 단순히 그 문자적 의미가 너무 좋아 신자들이 금과옥조처럼 기도나 권면에 사용하고 집집마다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습니다.(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 # 9번 글, “욥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참조 바람)

또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난 후에 믿음이 자란다는 말씀에만 모든 초점을 모읍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니까 고난 중에 신자 스스로 묵상하고 깨닫고 배우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만 흐르면 자신이 정금같이 변화되어 있으리라는 손쉬운, 아니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기대만 키웁니다.  

욥기의 전제

욥기는 천상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욥의 믿음에 대해 내기를 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욥의 믿음을 칭찬하자(1:8) 즉, 도전을 유발하자, 사단은 당장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반발했습니다. 복을 많이 받아 믿음이 좋은 것이지 모든 소유물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경외치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런지 보게 욥의 몸에만 손대지 말고 자녀들과 소유물 송두리째 없애는 환난을 사단이 일으키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1:21,22) 했습니다. 첫 번 내기는 사단이 보기 좋게 하나님께, 사실은 욥에게 완패했습니다. 욥은 자기가 받은 행복 아니 불행의 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순전하게 경외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사단에게 욥을 칭찬해 더 격한 반발을 촉발시켰습니다.(2:3) 또 다시 사단은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큰 질병에 들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2:4)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2:10) 했습니다. 자신이 원인 모를 고질병에 걸려 고통이 극심했어도 하나님께 말로도 불만 내지 원망을 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단의 두 번째 시도 또한 무참한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이만한 믿음의 사람이 고래로 있습니까? 아마 성경 전체에 인간으로는 가장 믿음이 좋은 자일 것입니다. 욥은 아들들이 잔치를 벌인 다음 날에는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한 후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들들이 잔치하며 즐긴 것까지 번제로 성결을 시킬 정도였으니 본인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욥은 어떤 환난에도, 자식들과 소유가 하루아침에 다 사라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한 순간도 편안치 않고 고통이 겹치는 그런 상황에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로선 스스로 노력하여 어떤 고난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 상태에 도달한다는 면에선 따로 더 성숙시킬만한 부분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여 정금 같이 변호시키려는 내용도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훨씬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단과 하나님의 내기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로 욥기가 시작하는 것은 그 시사(示唆) 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서 이뤄지는 일이 인간이 몸담아 살고 있는 가시적인 물질계에 큰 영향을, 아니 사실은 그 전부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욥의 경우처럼 사단이 인간에게 환난과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주권 하에서만 이뤄집니다. 사단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특별히 신자에게, 행세할 권세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과 허락 하에서만 움직이도록 그 활동 범위와 시기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우주가 선한 신(세력)과 악한 신(세력)의 싸움터이며 번갈아서 승패를 나눠가진다는 동양적 이원론과는 그 내용을 달리 합니다. 또 각기 통치 관할이 다른 신들끼리 그것도 순전히 인간식의 감정과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그리스 신화도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 신들의 노리개 감이나 정체모를 영적 세력에 의해 그 일생이 좌지우지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우주의 가시적 물질계든 비가시적인 영적영역이든 그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신자를 돕는 영적 존재인 선한 천사들을 직접 주관하십니다. 또 악한 천사와 그 수괴 사단이 있지만, 하나님이 일부러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원래 선하게 창조됐던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한 것임, 그분의 대적 내지 상대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 오직 신자의 유익을 위해 한시적으로 불신 세상에서 왕 노릇 하도록 허락 받았을 뿐입니다. 또 아무리 사단이 불행을 인간에게 끼쳐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영광은 그 안에서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물질계 안에 제한된 존재인 인간, 욥으로선 하나님과 사단이 자기의 믿음을 걸고 내기를 했고 또 그 결과 자신이 환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이었습니다. 욥의 두 번에 걸친 고백을 보면 하나님께 전혀 불평하지 않는 대신에 범사가 오직 절대적인 그분의 주권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그도 분명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로선 왜 그런 환난이 자기 같은 자에게 일어나야만 했는지 그 원인은 오리무중이었던 것입니다.  

욥기의 진행 과정

욥에게 큰 불행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세 친구가 위로하러 나타납니다. 반면에 욥은  너무나 고통이 심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한탄과 함께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에게 원망을 쏟아 붓지는 않았습니다.  

세 친구는 환난의 원인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 하는 욥에게 정말로 판에 박힌 권면만 합니다.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고 불경하게 한 일이 있으니까 마땅히 벌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유 없는 고난이 없다는 것입니다. 착하면 상주고 악하면 벌을 주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반면에 욥은 시종일관 그들의 말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까지 큰 환난을 받을만한 죄나 허물을 범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를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10:2)라고, 고난의 원인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따졌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며 진행되자 제 삼의 인물이자 연소했던 엘리후가 등장하여 그들 모두를 야단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해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여러 질문들을 던집니다.

주로 자연의 이치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자연의 이치란 눈에 보이는 물질계의 운행질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에 욥은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인생의 영적인 문제에 관해 하나님과 변론해 이유를 알고자 덤비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40:2)고 물었더니 그가 무슨 대답, 아니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40:4,5) 욥도 하나님의 질문에 숨은 뜻을 눈치 채고는 동식물이 생장하는 이치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주제에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따지고 든 것은 잘못이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40:8) 여기서 하나님이 말한 “내 심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주관 운행하는 일반적 통치와 지금 욥 개인에게 내린 환난, 두 가지입니다. 물론 욥기 전체의 주제에 비추어 보면 욥에게 죄가 많아서 그에 상응하는 큰 환난을 주었다는 문자적 의미의 심판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욥더러 당신을 대신하여 직접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보라고 제안했듯이 먼저 당신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해 불만과 의혹을 드러내는 욥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 욥이 친구들과 토론 중에 자신의 의를 고집하는 태도를(6:24-30, 10:7, 13:13-24, 16:17, 21:4-7, 23:1-9, 27:5-6, 29:11-25 31장 등등) 끝까지 버리지 않은 잘못도 지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는 대신에 자기 같이 의로운 자가 환난을 당한다고 의혹을 드러낸 뜻은 역으로 말해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욥의 그런 속내를 예리하게 지적해내신 후에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찌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40:9-14)

참으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반어적(反語的)인 꾸중입니다. 욥이 지금 의로운 자기는 환난을 당하는 반면에 악인들이 형통한다는 의혹을 가졌었는데, 만약 그가 하나님 자리에 오른다면 불평했던 그 악인들을 정말로 공평하게 치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저 악인을 벌주고 의인에게 상을 달라고 아우성치지만, 하나님으로선 일일이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당신만의 온전한 긍휼과 인내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치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던진 말씀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만약 인간끼리 정말로 선과 악을 엄밀히 구분해서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욥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해도 될 만큼 선하다면, 인간 자력(自力)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반어적으로 전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기에 흔히들 착한 자가 구원받고 악한 자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 종교의 구원관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또 욥 같이 성경 전체에 최고 믿음이 좋은 의인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합격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욥기에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보석 같이 숨겨져 있다니 말입니다.

욥기의 결론

하나님은 또 다시 욥에게 세상의 통치와 자연의 이치에 관한 많은 질문들을(40,41장) 던집니다. 여전히 그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욥이 마침내 가까스로 입을 뗀 내용은 이러합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2-6)

그럼 욥이 자기가 당한 환난의 원인을 알았습니까? 또 하나님이 그 이유를 밝혀 주었습니까? 둘 다 답은 ‘No'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환난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욥도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 공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게 되자, 도무지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문제까지 알려고 든 자신이 잘못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다른 말로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고 선하다고 겸비하게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나님께 변박하거나 의혹을 갖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에 오직 자신의 사정과 생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아뢰어서 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껏 하나님께 따지다시피 환난의 이유를 알려고 덤벼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이후에 욥이 환난 전보다 더한 복을 받는 내용이 따라 나옵니다만, 욥이 친구들을 위해 빌어준 선행을 보상하거나 환난을 잘 참아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욥은 이제 어떤 일에든, 심지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롭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시인했기에 복을 받은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말년에 설령 복을 주지 않았더라도 욥은 더 이상 원망은커녕 그 이유조차 묻지 않는 자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으로선 욥기 서두에 사단과 내기를 한 잘못(?)이 있는지라 욥에게 복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욥이 벗들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들의 잘못을 야단을 치고 욥을 찾아가 사과를 하라고 명했다는(42:7,8)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이 책의 주제는 잘 믿으면 복주고 악하면 벌을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욥의 고난과 그 의미를 다각도로 논쟁하는 가운데 밝히려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욥기의 결론이 너무 어이없게 끝난 것 같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인 하나님은 절대로 옳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또 정작 그렇게도 극심한 고생을 겪은 욥의 믿음도 크게 자란 것 같지 않을뿐더러 환난의 이유마저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로 끝났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욥기는 사실은 그 본인보다 성경을 읽는 후대 독자를 위해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시작하는 콜롬보 형사 시리즈처럼 사실은 처음부터 환난의 원인은 밝히고 들어갔습니다. 영적 차원에서의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가 그 원인이었지 않습니까? 문제는 당사자와 주변 친구들, 즉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마저 몰랐던 것입니다. 문학적 구성으로 보면 구태여 다시 원인을 설명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끝까지 환난의 원인을 몰랐던 욥에게는 싱거운 결론일지 몰라도 그 전후사정 전부를 아는 오늘날의 독자에겐 이만큼 귀한 책이 없는 것입니다.

세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물어왔습니다; 1)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는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인지?, 2) 후반부에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3) 욥이 스스로 의롭다 하여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려 했는지?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고 변화되었는지? 이에 대한 답변은 상기 설명에서 이미 다 드린 것과 다름없지만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욥 개인의 입장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알아야할 내용으로, 합시다.

우선 시험의 목적은 즉, 신실한 신자마저 겪는 환난의 이유는 가장 먼저 신자더러 하나님이 이 땅을 운행하시는 원리를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질병이 하나님이 신자가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그럴 때도 있지만 당신의 인내의 한도가 차거나 또 신자를 강권적으로라도 고쳐야 할 때만 하나님이 직접 손을 들어서 치십니다. 그 외의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인간 스스로의 잘못과 사단에게 기인합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5:7)라고 말했듯이 삶에서 환난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세 친구의 변론에도 전체 맥락에선 틀렸어도 부분적으로는 신앙적으로 합당한 진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욥기는 그래서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잘 따져서 읽으면 너무나 풍성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피조세계가 함께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끼리 부딪히며 사는 세상에서 실패와 잘못은 당연히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자기에게 닥친 환난을 두고서 잘 믿는데도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의심과 불만부터 가지기보다는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는 환난이라도 하나님의 공의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그분만의 뜻과 계획은 있는 것입니다. 욥의 믿음을 훈련시키려는 목적도 바로 그런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재삼재사 말하지만 그더러 거푸 겪은 환난 각각에 대한 구체적 이유를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환난에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숨겨져 있다는 영적 진리만 깨닫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하신 말씀의 거의 전부가 욥에게 던진 질문이었는데도 그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럼 그 목적은 당연히 대답조차 못하게 만드는 것 즉, 욥이 하나님의 세상 운행 이치를 알려고 했지만 인간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미처 이해되지 못하는 고통이 있으며 또 그런 고통이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가 굽어진 표시가 아님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욥이 스스로 의롭다한 예들은 위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했습니다. 또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선 분명히 자기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릴 수는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한 말이 잘못이라고 시인했으므로 하나님은 절대 불의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욥기에 숨겨진 복음

좀 더 첨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공의만 있지 사랑은 전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의와 죄에 대해 일일이 그에 상응하는 상과 벌을 준다고 주장했지 않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영적인 진리가 바로 이 부분에서 도출됩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으로 알 수 없는 환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작동될 수 있는 계기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빤히 알 수 있도록 상벌이 분명하다면 기계적이고도 율법적인 하나님일 뿐이지 그분의 인자와 긍휼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또 만약 인간이 범사의, 특별히 환난의 원인을 다 알 수 있다면 스스로 그에 대한 대응책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 상과 벌을 자기 행한 대로 이미 정확하게 받았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회개할 이유도 따로 없습니다. 이유 없는 어려움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이자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을 괴롭게 만들어서 다시 행복을 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소위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욥의 경우도 사단에게 불행을 일으키도록 허락만 했지 당신께서 직접 손을 들어 욥을 치시지는 않았습니다.(1:12, 2:6) 그리고 끝까지 그의 생명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구원을 미리부터 예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 있는 한에는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계획과 영광이 신자를 통해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사단더러 환난을 허락한 후에 나중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니까 결국은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런 진술이 옳으려면 하나님이 환난을 허락하신 목적 자체가 나중에는 반드시 복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과 달리 순교로 그 믿음의 여정을 끝나게 만드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지 않습니까? 또 욥의 경우도 고난을 주고 견뎌내게 한 후에 복을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환난에 대한 소중한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욥기처럼 나중에는 복을 받았다고 결론내리는 것과 또 사단과 하나님이 천상에서 내기했다는 것 같은 성경상의 진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되 영적 진리를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한 목적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환난과 질병이 사단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단과 내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또 끝에 가서 복을 다시 주어 욥을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단 단독으로 신자를 마음 놓고 주무를 수 있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병 주고 약 주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단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간이 병을 겪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방치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과 권능으로 인도하십니다. 욥의 경우 그 기간이 길었고 환난 정도가 심했을 뿐입니다. 사실 그마저도 그렇게 심한 환난 중에도 욥은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진리를 증명케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엘리후의 변증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하나님)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34:19)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35:6-8)

바로 십자가 복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이나 당신이 지은 백성으로 동일하게 긍휼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와 악은 인간 세상에서나 통할 뿐이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욥이 아무리 스스로 의인이라고 해도 그 또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극심한 환난 가운데도 당신께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는 믿음은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바꿔 말해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 취할 태도는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는 분”(33:13)이기에 인간이 그분과 변쟁할 수는 결코 없으며, 대신에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는”(34:10) 분임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로 바꾸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환난을 통해 변화되고 믿음이 성숙된 모습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의로운 행위만 했지 악행은 안 했으니까 자기는 의인이라고 자부하며 하나님께 이유 없는 환난을 당할 수 없다고 쟁변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하나님만이 옳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했습니다. 즉 진짜 의인은 오직 그분만이 의롭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의인은 이해할 수 없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오직 그분 당신을 믿는 믿음으로만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화난을 허락하고 친구들과 엘리후를 통해 논쟁을 거치게 했고 마지막에는 당신께서 직접 나타나신 모든 과정이 욥을 믿음으로만 사는 의인으로 바꾸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류 구속의 진리는, 비록 욥에게는 수건으로 가린 것처럼 어렴풋한 소망만 가지게 했지만,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히 밝혀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신자들이 욥기를 보는 시각이, 아니 강대상에서 욥기를 강해하는 내용의 폭이 넓고 깊어져야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구체적으로 살펴볼 내용들이 욥기에는 무궁무진하지만 지면 관계상 간략하게만 살펴보았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욥기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에 비추어서 세밀하게 읽고 또 읽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깨달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1/22/2009

운영자

2009.01.22 20:59:10
*.108.164.34

아가페님

그동안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좀 있어서 답변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또 가능한 줄이느라 노력했지만 상당히 긴 답변이 되었습니다.
(방문자님들도) 가능한 프린트 아웃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질문도 준비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가페

2009.01.24 11:04:23
*.216.87.227

바쁘실텐데 이렇게 세심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명절인데 주안에서 기쁜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사라의 웃음

2013.01.31 22:47:19
*.109.85.156

사실 욥기를 읽을 때 마다 그런 생각이 줄곧 떠나지 않았었습니다. 욥이 무엔가 잘못한 것이 있을거야~~, 그 자녀들도 잦은 파티로 어떤 죄를 저질렀을거야~~, 욥의 스스로 의롭다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의로움이니 그렇게 혼이 났을 것이야~~ 등등 성경 속에서 자꾸만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읽고 싶은 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쩌자고 사람을 가지고 천상회의에서 마귀에게 그런 내기를 하실 수가 있는지 정말 하나님이 이상하게만 여겨졌드랬습니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내기를 하셨다면?? 이런 저런 생각에 못내 섭섭한 맘까지도 솔직히 들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가르침 받아온 이유와 또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속에도 자꾸만 하나님을 오해하게 이끌림 당하는 제 안에 무엇인가가 있기에 그러한가 봅니다. 왜 의심하느냐?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언제는 야단치시는 듯, 무섭게 혼내키시는 듯, 아주 미워하시는 듯 들릴 때도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정말 따스하게 다 이해하시며 가르쳐 주시려, 안스러워하시며 그 부드러우신 성품으로 매만지시며, 더 다가오라시며 더더욱 가차이 가차이 와 주시며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심을 시시각각 또 말씀을 통하여 배워가며 그 말씀들이 실체 삶에서 또 따스한 온기로 다가옴을 느끼도록 또 가르치고 또 말씀하여 주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매일 매일 조그씩 조금씩 배워감이 너무도 기이한 복인 것 같습니다. 늘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너무도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성품을 자꾸만 가르쳐 주시는 목사님께 감사함을 또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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