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1-8) 불의한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6)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12:1-8) 

 

항상 굽었던 공의.

 

역사적으로 따져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통당하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굽었다고 의심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나아가 세상에 종말론적 위기가 닥쳤다고 두려워하지 않았던 세대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의심과 두려움에 대한 해답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2:6-8) 

 

하나님은 이 땅을 아담의 타락 이후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조종과 농간 아래에 있도록 허락해 두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초림하셔서 당신의 택한 자들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사탄의 미혹에 붙들려 있게 했고 또 신자들도 사탄의 유혹과 시험 아래 두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신자는 사탄의 선동에 놀아나는 불신 세상에 의해서 현실적, 정신적, 종교적 박해를 계속해서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비밀이라고 말했기에 사탄이 아직은 자기 본색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또 그 활동을 막는 힘이 있다고 했으므로 사탄이 제멋대로 양껏 활동하지 못하게끔 성령이 막고 있습니다. 

 

작금 모든 차원에서 지구가 곧 멸망할 것 같아도 어쨌든 그런대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이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붙들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인간 정치가나 지도자들의 의로운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이 전체적으로 막고 있으므로, 신자의 기도가 꼭 필요한 위급한 때도 있지만, 꼭 그 기도 때문에 위기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지금 미국으로 슈퍼 파워를 갖게 해서 공산 독재로 가는 길을 막아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다 사탄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마지막 때에 본색을 드러내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를 완전히 폐함으로써 신자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고 보장했습니다. 결국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굽어 보인다는 의심에 대한 성경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사람들은 이런저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중에 신자는 끝까지 성령의 거룩한 인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history)는 인류가 아닌 하나님 그분의 역사(His-story)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마감할 때까지의 계획을 완벽하게 짜두었고 그에 따라 세상만사를 거룩하게 주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는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장기적 종합적 관점에서 판단해야지, 눈앞에 당면한 현실 상황과 사건으로 분별하려 해선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욥과 세 친구의 논쟁에서 보듯이 그런 식으로 따져선 하나님이 마치 손을 놓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인식하지 못해도 그분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았던 세대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본문에서 세상에 공의를 세울 당신만의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의로운(?) 유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당신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의 집에 들러서 제자들과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치 중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아주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병째로 깨어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 모임의 회계를 맡고 있던 가룟 유다가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편이 나았다고 마리아를 야단쳤습니다.(5절) 비록 존경하는 스승의 발을 씻기려는 일은 가상해도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일 데나리온은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 미국의 현재 최저 임금을 시간당 15불로 치면 8시간 노동에 120불 가치가 됩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36,000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되므로 유다가 화를 낼만 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마26:6-13)와 마가(막14:3-9)에 따르면, 유다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똑같이 반박했다고 합니다. 또 마리아가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고 했으므로 머리에 부은 기름이 발까지 흘렀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단순히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의 발을 씻어주려는 정결례를 행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장례를 준비했기에 칭찬하셨다고 세 복음서는 동일하게 증언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돈 궤에서 돈을 훔친 도둑이라는 설명은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아마도 나중에 유다가 주님과 결별한 후에 돈궤에서 일부 돈이 비는 것이 발견되었기에 요한이 그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유다로서도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이 이미 일어났거나 어차피 발각되리라 짐작했을 것이며 또 그것이 자살한 동기 중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유다를 두고 도적이자 천하의 배반자라는 그동안의 부정적이기만 한 평가를 조금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돈을 얼마나 훔쳤는지는 몰라도 평소에 돈 관리나 사무 처리에 빈틈이 없는 자에게 회계를 맡기는 법입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눌 때도 예수님이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으나 어떤 제자도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마26:17-26, 요13:21-30) 그만큼 평소 그의 언행에 별다른 하자가 없었고 어쩌면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유다는 스승을 당시 노예 한 명의 몸값에 해당하는 삼십 세겔에 대제사장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당시의 열악한 경제 상황에 비추면 상당히 큰 금액입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에게 지금 예수님이 얼마나 큰 골칫덩어리가 되어 있으며, 또 그래서 사역 초기에서부터 그들이 주님을 제거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유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회계라면 돈 가치를 따지는 전문가인데 정말로 돈 욕심이 있었다면 훨씬 더 큰 금액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흥정하지 않았고 대제사장이 은 삼십을 달아 주는 대로 받았습니다.(마26:15)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 비천한 노예밖에 안 된다고 그 신분을 비하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유다가 그런 의미를 모를 리도 없는데도 그냥 받았다고 해서 그도 대제사장의 생각에 동의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그를 로마 당국에 테러나 암살 등을 가하며 유다 독립운동을 적극 도모했던 열심당원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만큼 의협심이 강해서 세상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스승이 엄청난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녔기에 당신이 체포되어서 그 목숨에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면 로마와 그에 기생하여 부와 권세를 누리는 유대 종교 당국에 자기처럼 행동으로 항거하리라고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직무를 포기한 메시아

 

지금도 모든 이의 생각을 대변하며 앞장서서 마리아에게 잘못하고 있다고 꾸짖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일부 지도층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다 가난했는데, 유대 성전과 로마제국에 이중으로 세금을 바쳐야 하는 것도 그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유대 독립운동을 했던 유다로선 더더욱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이 컸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런 비싼 향유를 가졌고 동네 사람을 모아 잔치를 벌일 정도면 상당한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가 마리아를 꾸짖은 것은 심한 빈부 격차에 대한 분노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내심 스승에 대한 불만을 그녀에게 대신 퍼부었을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가 로마를 물리치는 독립운동을 전혀 주도하지 않고 있으니까, 헤롯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마저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물어보았듯이, 평소에 주님의 정체성마저 의심했을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본격적으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일을 행하기 직전입니다. 그런데도 스승은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당신 개인에게 쏟아붓는 헛짓거리하는데도 전혀 말리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지금처럼 가난해지고 이런저런 핍박을 받는 것은 저 포악한 로마제국과 그에 빌붙은 유대 기득권층 때문인데 왜 메시아가 되어서 그런 불의를 방치하고 있느냐고 항변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속내를 모를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대답은 유다의 그런 의심과 불만이 옳다고 맞장구쳐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메시아가 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 가난한 동포를 돕자는 언급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에겐 주님이 메시아 직무를 감당하지 않고 포기하겠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난해진 원인은 누가 뭐래도 로마제국과 불의한 유대 권력층 때문인데 그들을 전혀 꾸짖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예수님이 동족의 압제자 로마의 죄악과 잘못을 추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유대의 공의회도 건드리지 않았고, 성전의 비리와 바리새인의 잘못된 가르침 같은 종교적 죄들만 야단쳤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야단쳐야 할 마리아를 거꾸로 칭찬해 주며 대대로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당신의 장례를 위한 예식을 베풀었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말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유다가 스승의 세상 공의를 외면하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 대답 때문에 주님을 팔아버릴 생각을 확실히 굳혔다고 증언합니다. 마태는 이 대화 기사에 바로 이어서 “그 때에”라고 하면서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가 밀고하기로 통보하고 은을 받았으며 그 후로 그럴만한 기회를 계속 엿봤다고 기록합니다.(마26:14-16)  

 

주님 답변의 의미

 

주님이 답변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하나님이 주도해서 바로 세워주기를 바라는 공의는 너희가 기대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은 로마가 무너져서 이스라엘에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그럼으로써 가난도 극복해야만 공의가 바로 선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에 빌붙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과 또 세리들을 처벌하고 모두가 똑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8절)고 하셨습니다. 유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을 구제하는 데에 당신의 남은 시간을 바칠 수 없고 반드시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인류 유사 이래 가난은 항상 있었고 당신이 재림하여 역사를 마감할 때까지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당장 가난을 없애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지금 로마와 유대 지도층들 때문에 너희가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큰 권능을 발휘해 로마를 물리쳐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주어도 너희 속에 또다시 불의가 성행해서 가난한 자가 계속 생긴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선 가난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불의가 하나님이 역사를 잘못 주도하거나 방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마가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막15:7)라고 기록했는데, 제자들더러 너희가 구제를 담당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가난은 항상 있으므로 너희가 아무 때라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너희가 그러길 원하지 않으면 빈부 격차는 더 나빠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당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을 대대로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아니며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받아들인 그 순전한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당장 가난을 제거하는 것보다 인류에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가난을 그대로 두는 대신에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해 주는 것이 태초부터 마련된 세상 공의를 바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자 그렇게 사랑했던 부부 사이에도 자기 자존심만 높이며 서로 상대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려 들었습니다. 아담은 이브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자기 분신이라고 크게 좋아했습니다. 둘 다 벌거벗었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둘 사이에 하나님이 실종되니까 부부끼리도 상대를 누르고 자기가 위에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최초 인간의 이 타락으로 모든 인간은 모든 선한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대신에 오직 자기만 높이는 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인간 세상은 그 후로 모든 사람이 자기 탐욕과 교만을 최대한 채우려는 추악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

 

세상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인간 집단과 개인의 모든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개입해서 엄격하게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방치해서 힘이 센 자가 모두 독식하는 짐승의 우리로 바꿔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인간을 만들지 말았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선 그렇게 할 수 없고 또 아담의 타락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안을 따로 마련해 놓고서 대신에 죄로 타락해 당신을 등지고 살게 될 인류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상황을 미리 정확하게 경고해 주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죄에 찌든 인간으로 인해 땅 전체가 저주받았기에 평생토록 수고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필연적으로 인간들이 자기가 감당할 수고를 적게 해서 편하게 살려고 남의 것을 불의와 불법으로 탈취하는 일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세상 공의가 굽은 것이 인간이 자초한 결과이지 하나님이 방치 외면한 탓이 전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라멕은 마음에 드는 예쁜 여자들을 무력으로 빼앗아 자기 처첩으로 삼았습니다. 졸지에 여자를 빼앗긴 남자와 사랑하지도 않은데 섬겨야 하는 여자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힘이 약한 의인으로선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고 라멕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한에는 이미 굽어진 공의가 바로 세워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당대의 가난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균등하게 기업을 배분해 주었습니다. 동족끼리는 노예로 부리지 말고 혹시라도 부채 관계가 생겨도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경제 활동을 하다 보면 빈부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50년마다 모든 부채를 조건 없이 탕감해 주고 다른 지파의 땅을 차지한 것이 있으면 무상으로 돌려주도록 하는 희년 제도를 두었습니다. 희년이 돌아올 때까지는 가난한 자를 십일조 구제 헌금과 수확할 때 일부를 남겨 두는 방식으로 구제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스라엘 안에서만은 근본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생기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다 마련해 주었습니다. 로마에 압제당해서 가난해진 이유도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 소임을 다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대로만 따르면 가난한 자나, 최소한 굶어 죽는 자는 없으므로, 엄격히 따져서 지금 향유를 팔아야 한다는 식의 불만도 생겨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마저 그분이 세우려는 공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제멋대로 세상 쾌락을 즐겼기에 가난의 문제가 생기고 이 땅의 공의가 굽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유일했던 참 공동체.

 

인간은 세상에서 불공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끼리 불공평해서 세상에 불공평한 일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를 해소하려면 인간의 완악해진 심령부터 완전히 뜯어고쳐야 합니다. 

 

주님은 이제 곧 골고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갚기 위해서 죽으실 것이나 삼 일째에 부활하시고 또 그 사십 일 후에는 하늘 보좌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주님을 대신해서 구원 사역을 계속 감당하실 성령님이 강림하시어 택한 자들을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당신의 뜻을 순전하게 실현할 수 있게 해서 신자들로 당신의 공의를 세우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분부대로 가난의 문제를 자기들이 책임지는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잠시나마 실재했던 참사랑의 공동체였으므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함께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공동체는 오래 존속하지 못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재산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가 나중에 돈이 아까워서 사도들을 속이며 성령을 훼방한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즉사했습니다. 헬라파와 히브리파 과부들끼리 서로 공평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다투는 일도 생겼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그 당대에 다시 오시는 줄 오해하고 타락한 세상과 결별하겠다는 잘못된 종말 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었어도 여전히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이 살아 있기에 이 땅에서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무조건 재산을 나눠서 모두가 똑같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되면 굳이 자기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기에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신자들이 하던 일을 당장 그만두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데반 순교를 계기로 유대교로부터 큰 박해가 생기게 해서 신자들을 각지에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행8:2), 또 글라디오 황체 치하 46-48년에 로마제국 전체에 큰 기근을 일으켜서 공산(共産) 체제라는 공동체가 유지되지 못하도록 와해시켰습니다.(행11:28) 대신에 부자 교회가 가난한 교회를, 정확하게는 모두가 다 가난해도 예수님의 사랑과 심정으로 서로서로 돕도록 이끌었습니다. 

 

두 부류의 신자

 

인간 세상에 공의가 굽어 보이는 일이나 상황에 대해서 크게 분개하는 신자들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도덕적 불의에 참지 못하고 크게 분노하여 직접 나서서 행동으로 도덕적 의로 바로잡으려는 신자로 유다가 그런 유형의 대표입니다. 그 의도와 시도는 아주 선하며 때로는 직접 힘으로 맞서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우선 그런 불의에 하나님 쪽에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순 왜곡 불의 불공평 등은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 내기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일일이 막아주지 않는 것도 오히려 그분의 큰 그림이자 장기적인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억울한 고통 속에 괴로워해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냉정하게 외면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당장 나쁜 상황과 사건을 의롭게 고친다고 해서 근본 해결책이 안 되므로 인간 자체를 바꾸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인간들끼리 공의를 충분히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지금껏 또 마지막 재림 때까지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지지 않게 당신께서 전체적으로 막아주시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바꿔주었으나, 불행하게도 초대 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여전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불의와 불공평을 만들어 낸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인간의 죄로 함께 저주받은 피조 세계부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고 인간을 당신과 같이 죄와 무관한 신령한 존재로 바꿔주셔야만 비로소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불법이 깨끗이 고쳐질 것입니다. 

 

따라서 둘째 부류의 신자는 세상 공의는 재림까지 불가능하다는 원리를 잘 알기에 따로 모여서 종말적 공동체를 이루거나 집에서 혼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서 빨리 주님 오시기만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도덕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종교로 해결을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초대 교회에서부터 완전히 실패한 모델이자 하나님이 바라시는 방안도 아닙니다. 나아가 신자들만 따로 천국 가려는 독선적인 배타주의가 되며,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세상의 불의 불법에 대해 외면하는 비겁한 짓으로 이단적인 종말주의가 됩니다. 

 

혹시라도 주님이 빨리 다시 오시면 어차피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냐고 단순하게 생각해선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하라는 소명을 맡겼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33:6)고 엄격히 경고했습니다. 세상의 악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벌을 내려 주시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경고나 고치려는 조치를 하지 않은 신자는 하나님이 따로 벌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기대 내지는 모략을 완전히 무산시켰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발휘해 로마를 무찌르지 않고 거꾸로 말없이 십자가에서 도덕적으로 최고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다는 그 살인의 도덕적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절감했고 또 그 사실은 죽기보다 견디기 힘든 불명예였습니다. 그 큰 죄를 자기 죽음으로라도 씻어보려고 인간적인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인간 세상의 공의는 전혀 고쳐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더 나빠져만 갑니다.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는 인간의 도덕과 종교로는 인간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으로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자기만 높이려는 인간의 탐욕과 교만한 본성부터 완전히 죽여야 세상이 깨끗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평생토록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하나님이 남겨 두신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은 것을 넘어서 이젠 아예 그 실존조차 완전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을 동원해 로마를 물리치고 세상의 악한 부자들도 다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봐야 더 심한 악인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며, 신자들마저 평생토록 자기 것부터 챙기느라 알게 모르게 공의를 굽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러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죄로 고난을 자초했음에도 주님은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이 너무 안쓰러워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자들더러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구제 기관을 세우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먼저 당신의 십자가 죽음에서 가난의 원인이 또 세상의 공의가 굽은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온 당신의 택한 제자들더러 재림 때 세워질 천국의 모형으로 사랑의 공동체로 교회를 이 땅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누룩이 되는 모습으로 공의를 바로 세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 안에 녹아 들어가서 자기 주변에서부터 한 사람 두 사람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자기 몸처럼 참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웃 간의 관계에서부터 굽었던 공의를 바로 세워나감으로써 땅끝까지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조금씩 조금씩 더 확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교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많은 신자가 자기 잘못으로 가난해지고선 주님께 자기 가난을 해결하라고 뒤늦게 떼를 씁니다. 평소에 실력을 쌓고 올바른 분별력을 발휘해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주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를 사용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행해야 하나, 그렇게 하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잘 나갈 때는 자기가 똑똑해서 그런 줄 알고, 재물을 얻을 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순종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서로 도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고난이 닥치면 마치 하나님이 그것을 고의로 일으켜 주었거나 막아주지 않았다고 의심 불평합니다. 가룟 유다보다도 더 잘못되고 치사하기 짝이 없는 헛된 믿음입니다. 

 

주님이 유다의 의로운 요구는 외면하고 대신에 마리아를 칭찬한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만약 도덕적인 의와 종교적 경건으로 세상 공의를 세울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사탄의 농간에 놀아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의 시도가 자살로 끝난 것이 그 간접적 증거이며, 주님이 그렇게 시도하려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직접 야단쳤지 않습니까? 지금 정말로 진지하게 우리 각자의 믿음을 되돌아봅시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지기보다 그에 앞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서 파수꾼의 역할부터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12/2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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