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28-30) 인류 역사를 이끄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28-30)

 

신구약의 다른 하나님 

 

예수님은 공사역 중에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악한 인간이나 공동체에 대해 한 번도 벌주거나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죽어가면서까지 당신의 대적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반면에 제자인 유다와 베드로는 로마를 물리쳐서 이스라엘에 공의를 회복하려고 했고, 바울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예수 믿는 신자들을 유대 사회에서 쫓아내어 종교적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시도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이 명하시고 또 구약 성경이 고무 찬양했던 비느하스의 의로운 전통을 따르려 했습니다.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비견될 만한 열심을 품고서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악을 직접 심판함으로써 그분의 영광과 율법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오늘날의 의로운 신자 중에는 세상 공의에 대해 바울과 비슷한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이 꽤 있습니다. 구약의 성부 하나님은 죄를 공의로 철저히 심판하는 분인 반면에 신약의 성자 하나님은 오직 사랑으로 원수까지 용서하고 품어주신다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치웁니다. 그래서 권력과 재물을 이용해 약자를 수탈 핍박하는 악인들을 엄격하게 정죄 심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와 동시에 힘이 모자라 그들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면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소시민들을 끝까지 도와주려고 합니다. 요컨대 악인은 성부 하나님처럼 심판하고, 의인은 성자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와 행동은 분명히 의롭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대한 신학적인 오류를 낳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의 성품과 사역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비유컨대 성부는 잘못한 아이를 엄하게 벌을 주는 아버지이고, 성자는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아이를 뒤로 불러서 사랑으로 품어주는 어머니가 됩니다. 아무리 아빠와 엄마 둘 다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잘 되길 바라지만 어쨌든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고, 또 자식들도 아무래도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거기다 아빠가 가정을 현실적으로 책임지니까 자식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할 때는 아빠의 도움부터 구합니다. 대신에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엄마와 먼저 의논하고 아빠에게 자기를 편들어서 변명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신자들도 자기 소원이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선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니까 마치 성자가 엄마 역할을 맡아서 아빠인 성부에게 자식을 잘 봐주라고 당부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반면에 자기가 지은 이런저런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붙들면 당연히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그 본질, 성품, 속성, 권능, 사역에서 절대로 다르지 않으며 한 치의 우열도 없습니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전통만 해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와 음행해서 하나님께 염병이라는 큰 벌을 받고 있었고, 그런 중에도 음행을 그치지 않는 남녀를 모세의 명을 받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처벌한 것입니다. 그는 이미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쓰임 받은 종이었을 뿐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신자를 핍박한 것은 그와 차원이 다릅니다. 우선 신자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벌을 받고도 계속 그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신자야말로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서 순종한 유일한 사람들로 비느하스인 셈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유대교라는 종교와 선민이라는 잘못된 민족적 자만심만 지키려 했기에 심판받아야 할 악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실현하고 있는 공의에 참여한 비느하스와 달리, 바울은 자신이 판단한 공의를 스스로 세우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구약 비느하스 때와 신약 바울의 때에 각기 다른 의미와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분별하려면.

 

거기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바울이 율법을 정확하게 따르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만 지켰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레19:18) 선언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은 인간 사회를 추악하게 더럽히는 악의 세력이 분명한 로마 제국도 그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라고 (출22:21) 명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방 나그네는 상종도 하지 않았고 동족마저 자기들이 정한 규정에 따라 정죄하여 살인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준행해야만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진다고 믿으면서 사실상 자기부터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의만 실천하면 사랑이 실종되어도 하나님의 뜻에 충성 순종한다고 착각하고서 비느하스의 전통을 명목상으로만 지킨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선 자기가 속한 유대 지도층 계급의 특권을 계속 누리려고 자기들이 제정한 유대 사회의 관습을 여호와의 뜻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인구 숫자로 따지면 아주 소수에 불과한 정통 유대인들은 아직도 공의로운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대로 이스라엘을 편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열방 위에 자기 나라를 최고로 높여 줄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젠가는 예루살렘에 강림할 수 있도록 제4 성전을 지으려 합니다. 일부 신자들마저 예수님을 미워하며 신약성경은 아예 인정하지도 않는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는 데도 그런 움직임에 적극 동참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최고 전문가였던 바울이 예수를 알고 나니까 유대교의 모든 자랑거리가 한갓 배설물이었다고 체험적으로 처절하게 고백했는데도 말입니다.

 

신구약의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과 계획에는 한 치의 수정이 없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전혀 변함없이 똑같습니다. 바울처럼 신약의 성자 하나님을 잘 알아야만 구약의 성부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세상이 상식과 양심을 벗어나는 말도 안 되는 죄악으로 타락해 가고 온갖 재앙이 끊이지 않습니다. 신실한 신자들도 하나님의 공의에 관해 의심과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예수 믿기 전의 바울처럼 공의의 반쪽 하나님만 믿고 따라선 안 됩니다. 

 

세상의 굽어 보이는 공의를 정확히 분별하려면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어떤 목적을 갖고서 어떤 방향과 방식으로 이끄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본문이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그 해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합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온전히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당신을 믿는 신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활짝 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목할 말씀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주님이 목마르다고 하시면서 신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28, 29절) 요한의 뜻은 주님이 시편의 두 예언대로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22:15)와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69:21)라는 두 말씀입니다. 

 

다 이뤘다는 것은 ‘모두’만이 아니라 ‘완전히’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주님이 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공사역 때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도 당신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시기 직전에 다 이뤘다고 선언했기에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어야만 이뤄지는 더 중요한 일에 대해 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예언해 놓았는데 그 일을 완벽하게 성취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구약의 인류 역사를 주관하신 목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실현하는 것 하나였다는 뜻인데, 왜 그러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당부하신 두 가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인간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모든 생물에게 다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둘째 인간에게만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창1:28) 그리고 이 땅을 잘 다스리도록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단순히 에덴동산의 한 과일나무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동산의 각종 나무 열매를 임의로 다 먹으라고 허락했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 전부를 온전히 맡겨 주신 것입니다. 단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과일이 상징하는 대로 이 땅의 진짜 주인인 하나님이 따로 계심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다스리려면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서 그분의 뜻대로만 행하라는 것입니다. 

 

최초 인간은 에덴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잊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따르기만 하면 평생토록 그 땅에서 나는 모든 좋은 것을 맘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할 일은 단순히 하나님께 감사 경배만 하면 되는데 하나님은 심지어 그렇게 하라고 직접적으로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동산을 자기 맘껏 다스리고 그 전부를 즐길 수 있다면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지주가 과수원 몇백 평을 평생 아니 자손 대대로 무료로 사용하고서 소출 전부를 맘대로 가지되 단 하나 그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만 절대 부인하지 말라고 했다 칩시다. 법원의 등기부상의 소유주는 절대 바꿔주지 않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열매 전부가 자기 것이 되므로 매일 물을 주고 병충해를 막고 가지치기도 하면서 얼마나 아름답고 비옥하게 가꾸겠습니까? 스스로 가꾼 고추, 상추, 오이, 사과, 복숭아 등으로 유기농 식단을 꾸밀 때마다 그 주인에게 감사하며 먹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주인을 자랑하며 나눠줄 것입니다. 그 땅을 자기 명의로 바꿀 꿈은 전혀 꾸지 않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자식들에게도 자기처럼 행하라고 잘 가르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마지막 남은 그 과일마저 따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수원의 주인을 몰아내고 자기 소유로 바꾸려 했습니다. 사탄은 인간이 그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싫어해서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하나님에 대한 아담과 이브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주인이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므로 살짝 등기서류만 변조하면 과수원을 쉽게 빼앗을 수 있다고 속인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아담과 이브도 에덴동산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고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한 삶을 살면서 그분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다 사탄의 달콤한 꾐에 넘어가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설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그들의 삶을 감시 통제 명령하지 않으셨기에 그분을 우습게 보고 그래도 되려니 여긴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영원토록 절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배은망덕한 죄악을 하나님이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작은 과수원 주인이라도 당장 쫓아내고 손해 배상을 청구하며 백 미터 이내 접근 금지 명령을 법원에서 받아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쫓아내고 생명수 나무를 옮기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천사에게 시켜 지키도록 해서 막았습니다. (창3:23,24) 인간은 동산 밖의 척박한 땅에서 이마에 땀이 나야만 생존할 수 있는 비극적인 운명을 자초한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인간끼리 서로 소산을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게 됨으로써 인간 사회의 공의가 굽게 된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 약속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의 평생 무료 사용권을 허락할 때부터 틀림없이 인간이 주인 노릇 하려고 반역하리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영계에서부터 최고의 천사가 당신의 자리를 욕심내길래 지상으로 쫓아내었는데(사14:12-15), 그 사탄이 자기 본성대로 인간을 꼬드겨서 똑같이 당신을 배역하게 이끌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탄의 타락부터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알고도 사탄을 막아주지 않았고 또 인간을 아예 당신께 반역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지 않았다고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어서 그냥 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평생토록 자유의지를 절대로 빼앗지 않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기꺼이 당신을 사랑 순종 감사 경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달리 참 인간답게 살도록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던 아담을 먼저 찾아와서 짐승을 죽이고 그 피로 그들의 완악한 죄를 씻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다시 받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선악과 금령을 위반해도 당장 육체적 죽음으로 심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모든 선의 원천인 당신을 거역하면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절대로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간더러 체험적으로 스스로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그런 처절한 실패를 겪어봐야만 진정한 사랑으로 당신과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타락으로 인간에게 완벽했던 생존환경인 에덴동산은 사라지고 또 하나님만 기뻐하며 사랑했던 인간의 본성마저 추하게 오염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후손은 태생적으로 당신을 멀리하고 또 그 결과 인간 세상은 죄인끼리 아귀다툼하느라 고난이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사탄이 타락한 본성에 찌든 인간들을 계속 미혹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사탄과 당신을 비교해 보면 누가 선이며 진정으로 인간을 위하는 은혜로운 존재인지 인간더러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죄로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더 선하고 완전한 방안을 태초부터 마련해 놓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용서해 주면서, 사탄에게 저주를 내리는 형식으로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3:15) 여자의 후손이란 남자인 아버지 없이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탄이 장차 올 여자 후손의 발꿈치만 상하게 하지만 대신에 사탄의 머리가 그 후손에 의해서 상할 것이라고 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입니다. 

 

이 약속은 성자 예수님이 처녀인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나심으로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4-6) 누구나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은혜를 순전히 믿는 자는, 바울처럼 율법 아래 있으면 예수 믿는 신자를 극렬히 핍박했던 자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든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고 영생까지 얻습니다. 

 

모든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것과 그 후로 평생토록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근거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엄마 격인 주님에게 자기 잘못을 용서받거나 성자더러 성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게끔 요구하려는 뜻이 되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한시도 참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예수가 목적인 이유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를 골고다 십자가를 향해 이끌어 온 까닭은 현재 살펴보고 있는 그분의 공의와 연결해 보면 간단합니다. 신구약 성경을 철저히 배우는 현대 신자들마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각기 별개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이성으로는 아무리 판단해도 공의를 실현하려면 사랑이 희생되고, 사랑을 베풀려면 공의가 굽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사랑이 많고 공평하다고 볼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살펴본 대로 아빠와 엄마가 교육 역할을 분담해야 하듯이, 인간은 그 둘을 절대로 동시에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서 먼저 테러를 가하고 아직도 인질을 억류한 하마스가 분명히 도덕적으로 더 큰 악이므로 완전히 패배시켜야 공의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노약자 여인 어린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므로 사랑은 비참하게 무너집니다. 

 

공의 측면에서 인간이 당신께 지은 죄를 따지면 아담의 타락 이후 모두가 사형입니다. 그대로 집행하면 지구상에 당신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며 당신을 대리해 이 땅을 다스릴 존재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사랑 측면에서 무조건 모두를 용서해 주면 죄에 대한 공정한 처리가 되지 않고 구원의 은혜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없어서 사실상 구원이 이뤄진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세상의 공의와 사랑을 인간이 제멋대로 망치도록 그냥 방치하는 꼴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는 철저히 처벌하신 완전한 공의이며, 그와 동시에 죄인을 끝까지 품어주시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당신의 죽음으로 그 죗값을 온전히 갚으심으로 당신의 공의가 충족되었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므로 세상에 없는 완전한 사랑도 실현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 가장 공의로운 심판은 소돔과 고모라 사건일 것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심판 전에 어떤 거래를 했습니까? 하나님은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으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았을 악인들까지 다 용서해 주겠다고 공의의 심판에 앞서 사랑의 구원부터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그 열 명조차 없어서 심판받았기에 인간 세상의 공의는 인간이 굽게 만든다는 가장 여실한 증거였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도 그러했는데, 선악과 금령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완전한 은혜였습니다. 모든 열매를 임의로 다 먹어도 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잊고서 당신을 거역하면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만 임하게 한 것은 완전한 공의였습니다. 

 

타락 후에도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의 죗값을 짐승의 죽음으로 갚게 한 것은 완전한 공의였고, 언약을 어긴 아담을 먼저 찾아와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평생 그들과 함께하며 지켜주신 것은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담과 이브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에덴에도 십자가 복음이 명백히 선포되었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신자들은 아직도 더 많은 이들이 구원받게끔 복음을 더 일찍 인류에게 알게 해주었어야 했다고 계속 원망합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자기 소원과 욕심대로 풍요롭고 사치스럽게 사는 것, 최소한 아프지 않고 고난 상처 다툼 없이 잘 사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것을 바라는 것이 나쁜 일은 절대 아니나, 그런 선을 베풀어 주는 분이 누구인지, 나아가 그분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신자 중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범사를 그분의 뜻을 따라서 그분을 대신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려는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거기다 의로운 신자일수록 눈앞의 환경과 사건만 보고서 조금이라도 불공평하게 여겨지거나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못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생각에 끼워 맞히려 하니까 그분의 공의가 굽었고 세상 불의를 그냥 방치한다는 의심밖에 못 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태초부터 계획된 것입니다. 일일이 설명할 여유가 없지만, 구약 성경 전체에 복음이 넘치도록 일관되게 계시 되어 있고, 삼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한 공의와 완전한 사랑이 동시에 만족되는 방식으로만 보호 인도해 왔습니다. 복음이 겨우 이천 년 전에 인간을 그냥 두어선 안 되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삼위 하나님이 긴급회의를 해서 결정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임시 방책이 절대 아닙니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세상의 굽어진 공의를 하나님이 방치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사항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엄청난 의미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조의 경륜을 다 이루었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보다는 다 이뤘으므로 하나님으로선 추가로 더 이루실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땅에 쏟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수치, 비우심, 낮춤, 겸손, 긍휼, 안타까움, 열심 등은 없습니다. 인자로 오신 예수님만의 완전한 공의와 사랑을 다 이뤘으며, 그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에게는 영원토록 그런 공의와 인자로 함께해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충분하니까 그 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완전히 내버렸다는 고백이 신자들의 기도의 마침 구절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다 이뤘다는 선언을 쉽게 바꾸면 하나님으로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더 이상 다른 방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삼위 하나님이 인류 역사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개입해서 이룰 일은 없습니다. 사탄이 본색을 드러내며 최고조의 악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성령이 막아주는 일을 빼고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재림에 관해서 공사역 중에 포도원 주인과 아들의 비유로 제자들에게 정확히 가르쳤습니다.(눅20:9-18)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에게 맡기고 멀리 출타하고서 그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으나 농부는 그 종들을 죽여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신 약속대로 인류 역사를 이끌 것이므로 당신을 순전히 믿고 따르며 살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마저 율법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지자,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회개를 촉구했으나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이 아들을 보냈으나 오히려 아들을 죽이고 과수원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로도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비유를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진멸할 일만 남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재림까지 과수원 주인이 하실 일이 따로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여 심판을 완성하는 일만 남았고, 주님의 초림 이후로도 인간 세상의 공의가 굽은 것은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인간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공의는 창조부터 종말까지 당신의 원수까지도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는 방식 하나로만 세우십니다. 공의만 실현하려면 사랑이 희생되나 완전한 아가페 사랑은 궁극적으로 공의까지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의 공의를 세울 책임은 아무래도 정치가를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죄에 찌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예수의 사람으로 바뀌지 않는 한 모든 방도가 허사일 뿐입니다. 지금 모두가 멀리 중동까지 갈 필요 없이 미국과 한국에서 목격하고 체험하듯이 끝없는 정치적 쟁투와 소모전만 남깁니다. 

 

예수님은 당장에라도 로마 제국 무너트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 중공 북한 극렬한 모든 불법 테러 집단, 나아가 세상의 죄인들을 다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보듯이 인간은 외부 환경이 풍족해진다고 절대 거룩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인을 심판해 봐야 더 완악한 자들이 또 생기고 더 중요하게는 그들도 당신께서 당신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의 의미는 인간이 굽게 만든 세상의 공의를 바로 세울 방도는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에 실현한 당신의 완전한 사랑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심각하게 잘 따져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 원망하기 전에 과연 내 존재와 삶과 인생에 예수님이 정말로 주인이 되어서 그분을 닮아서 거룩하게 자라고 그분이 맡기신 소명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내 주변에도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싶다는 열정, 소망, 호기심,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까? 전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공의가 신자에게서부터 바로 세워지고 점점 주변을 거쳐 땅끝까지 온전히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1/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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