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11)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유?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8)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6-11)

 

치명적으로 잘못된 믿음

 

안타깝게도 오늘날 자기 믿음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에도 교회 생활에 성실하게 참여하니까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신자들이 꽤 많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이 승천하는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도 그런 잘못을 드러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승천하기 직전의 주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으나 너희가 알 바 아니라는 냉정한 답변만 들었습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받을 것이라는 간단한 약속만 주시고 승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조금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진 제자들이 하늘만 쳐다보니까 곁에 있던 천사들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라고 다그쳤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던진 질문과 그 후에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본 일 둘 다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주님께 그렇게 질문할 수 있고 또 하늘을 쳐다본 행동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게 행하게 된 근본 생각이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택함을 받아서 삼 년간 동고동락하며 천국 복음을 직접 배웠습니다. 주님의 공사역과 많은 이적의 현장에서 목격자를 넘어서 협력자로 참여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무참한 실패로 끝난 줄 알았으나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에서 인간의 최후 대적인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여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부활 후에도 종종 만나 교제하고 신앙교육도 다시 받았기에 자신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도 생겼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최고 수준의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여럿 취득한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 믿음에 결정적 하자가 있었다면, 과연 왜 그러한지 또 어떻게 자기들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 만찬 때에 이미 자세히 가르치셨습니다.(요14-17장) 지금은 부활하신 후 40일이 지나고(행1:3) 승천하기 직전인데 주님이 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시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5절) 그 약속대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열흘간 기다린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습니다.(행2:1-4) 

 

예수님은 당신을 대신할 성령이 이제 곧 제자들에게 강림해서 죄인을 구원해 내는 역사가 당신의 공사역 때보다 더 활발해질 것을 큰 설렘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지막까지도 이스라엘 나라의 현실적 회복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승천하신 후 큰 아쉬움으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으므로 주님이 승천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되어 다윗 때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에 스승이 그 신령한 권능으로 이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앞장서 주기만 바랐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스승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고 하신 말씀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누가도 “자기가(주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눅19:11)고 비슷한 의미로 증언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실현하려는 새로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의 현실적 번영이 아님을 3년이 지나도록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교육법이 나빴던 탓이 전혀 아닙니다. 적재적소에 가장 합당한 비유로 가르치고 대화한 내용을 지금 상담학이나 교육학 강의에서 모범으로 가르칠 정도로 주님의 교육법은 탁월했습니다. 당시에도 모두가 서기관들과 다른 권세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원죄로 사탄에 미혹된 인간의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가 그만큼 견고했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 가라.

 

제자들의 마지막 질문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주님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와 기한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딱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헬라어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 둘을 다 사용했습니다. ‘때’는 단순히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로, ‘기한’은 특별한 의미가 담긴 특정한 시기라는 뜻의 ‘카이로스’로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회복에 관해 달력상의 정확한 시점과 그 회복의 의미 둘 다 지금은 가르쳐 주어도 너희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회복의 목적마저 지금 너희가 소망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그분의 뜻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현실적 회복은 아예 거론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너희가 정작 간절한 소망과 뜨거운 열정으로 행해야 할 바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땅끝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신자가 평생을 바쳐야 할 유일한 임무라는 뜻으로 ‘오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요컨대 제자들이 주님께 바라는 것과 주님이 제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열렬히 소망했던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성령을 기다리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훌쩍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제자들로선 다시 만날 수 없는 스승과의 이별도 크게 아쉽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답변을 듣지 못해서 목을 빼고 계속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들도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반드시 다시 오시니까 그때까지 너희 할 바만 하면 된다고 주님이 당부하신 뜻을 다시 깨우쳐 준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천사들이 자살한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호칭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당부대로 어서 빨리 땅끝까지 이르는 당신의 증인이 되어야 함에도 너희의 영적 수준이 갈릴리에서 제자로 택함을 받았던 그 당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를 갈릴리 변방에서 불러내어서 유대 전 지역을 순회하고 예루살렘으로 이끌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그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으면 거꾸로 유대를 거쳐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으로 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하늘만 쳐다볼 것이냐는 뜻입니다. 

 

주님의 당부는 일차적으로 십자가 복음이 성전과 율법이 있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끝까지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더 중요한 의미는 인종적 차원으로 주변 이웃에서 동족 전체로, 또 사마리아처럼 유대인과 앗시리아인의 혼혈을 거쳐서, 완전한 이방 족속들에게까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지역, 민족, 문화, 종교 등이 달라도 절대 차별하지 말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증인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름 속으로 이미 사라진 뒤에도 제자들이 하늘을 계속 쳐다본 이유는 셋일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들 세대 안에 빨리 다시 오셔서 로마를 물리쳐 주시든지, 하늘에서 로마가 단번에 멸망하는 심판을 내려주시든지, 자기들에게 크고 신령한 권능을 부어주셔서 마카비 혁명 때처럼 독립군을 결성해 저항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스승이 공사역 중에 로마 당국에 대해서 저항은커녕 한마디 야단도 치지 않았으며 빌라도에게 처형당할 때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준 사실은 아예 무시하고 기억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에게 자기들 요구사항만 갖다 들이댄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따랐으며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약 40일간 교제하면서 자기들도 부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와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실현된 하나님의 구원 진리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은 믿었으나 예수님은 온전히 믿지 못한 것이 본문 상태에서의 제자들 믿음의 치명적 하자였습니다. 

 

죄를 책망하는 성령

 

오늘날 일부 신자들의 믿음이 결정적 하자를 지녔다는 의미도 똑같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세상 만물과 모든 인생을 주관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온전히 믿으나, 아니 아주 열렬히 믿으나 예수님은 아직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신자가 꽤 많습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해 교회에서 수없이 들었던 성경 말씀대로 믿는 신자는 많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감당해 주셨기에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여전히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도 의롭다고 칭해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주님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덧입혀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신칭의의 교리는 수용 동의할 수 있어서 믿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치명적인 결함은 본문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관심이 없고 자기가 바라는 일만 하나님에게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더 풍요롭게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지에만 골몰합니다. 그런데도 교회 생활에 열심히 참여하고 수시로 성경 읽으니까 자기 믿음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때로는 간절히 뜨겁게 기도하여서 응답받으니까 열심히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갈릴리 출신 제자들도 하나님의 택한 족속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까지 되었으므로 자기들의 구원은 전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문제는 주님과 함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일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래도 자신들을 희생해서 동족이라도 살리려는 의로운 일을 주님께 요청했으나, 오늘날 신자들은 오직 자기와 주변의 형통만 간구합니다. 

 

물론 제자들이나 우리나 원죄로 타락해 죄의 본성이 살아있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원 진리를 정확히 기록한 신약성경을 자세히 배울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 질문에 냉정하게나마 주님의 답을 받았으나, 만약 위와 같은 우리의 질문이나 기도에 주님이 완전히 귀를 막지 않을까요?

 

비록 제자들이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했어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령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절 답해주지 않고 성령만 기다리라고 했으므로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성령님이 인도해 줄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그들을 택하여서 사람 낚는 어부로 세우겠다고 약속했기에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 변화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실제로 성령을 받자마자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만 믿다가 성령에 의해서 성자 하나님도 온전히 믿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그런 변화는 자기들 소망 노력 믿음으로 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당부대로 기도하며 기다리던 열흘 만에 홀연히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각자에게 충만히 임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진리의 영이 오셔서 행할 일에 대해 가르치신 그대로 온전히 이뤄졌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하면서, 주님은 특별히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가르쳤습니다.(요16:8,9)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의 신분과 권능에 따라서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고 선포했습니다. 거꾸로 따져 죄에서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 하나님만 믿으면 죄에서 온전히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현실 고통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쳤음에도 제자들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죄에 대한 책망은 성령이 한 죄인의 내면에서 깨우쳐 줘야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도 훈련받을 때 성령의 권능을 일부 맛보았고, 부활하신 주님께 성령을 일부 받았으나(요20:22), 성령에 의한 죄에 대한 책망은 오순절에 비로소 이뤄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여기고 신자들을 극렬히 핍박했습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삼 일간 죽음과 방불한 절망에 빠졌고 자기는 완전히 속수무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성령의 인도로 예수 믿는 일반인 아나니아에 의해 구출 받았습니다. 그로선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 서두에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1절)라고 했고 또 마지막에도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는 이중 부정, 즉 절대 긍정으로 몇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성도라면 몰라선 안 되는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아 신자가 된 까닭이 너희 자격과 선함은 당연히 아니고 너희의 믿어보려는 의지와 믿음과도 전혀 관계없이 오직 성령님의 은혜라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는 믿음

 

지금 신자라면 익히 아는 기독교 교리를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심각한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많은 신자가 성령을 받아 회심해야만 구원받는다는 진리는 잘 알고 있으나 막상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확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아도 그런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순절에 성령으로 일시에 변화된 120여 명의 제자와 바울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없이는 기꺼이 순교를 감당할 수는 없고 그 전에 핍박을 겁내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지도 못합니다. 베드로가 부활 예수를 전파하다 유대 감옥에 갇혔으나 천사의 이적으로 풀려 난 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오히려 크게 기뻐했지 않습니까? (행5:41)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단순히 이전보다 도덕적으로 더 의롭게 되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니까 이전의 자기는 없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전혀 다르다는 의미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로마와 유대 당국에 스승이 항변 한번 못하자 자기 목숨도 위태해질 것 같으니까 비천한 여종의 추궁에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는 자신이 너무나 비겁하고 가난하고 비참해서 다 큰 어른이 목 놓아 통곡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이나 그런 자기를 용서하며 사랑해 주었어도 여전히 다윗 왕국이 회복되면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을 잔뜩 기대했고, 그 일을 완성해 주지 않고 하늘로 올라 가버린 스승을 지금 못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자마자 성전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님 승천 직전까지 자기들이 소망했던 유다 독립운동을 시작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처럼 대제사장에게 잡혀가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수 있음에도 그들이 죽인 나사렛 예수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러 온 메시아라고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골고다에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갔던 그가 대적들의 심장부로 곧장 쳐들어가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대놓고 야단친 셈입니다. 그 설교에 동족 3천 명이 영적으로 크게 찔림을 받아 그날로 회개하고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침례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오순절을 지키려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이제 율법의 시대는 끝났고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야 할 때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성전 한복판에서 유대 사회의 관습과 규례를 복음으로 대체한 예수를 아주 당당하게 자랑했습니다. 그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며칠 만에 절대로 그렇게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 열흘 동안 구약성경도 읽었을 텐데 성령이 그의 영적인 안목을 바로 세워서 구약성경에 계시 된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라고 시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베드로에게 풍성히 부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예수가 주는 것 없이 밉다가 오순절에 회심한 삼천 명처럼 성령의 간섭으로 자기 심령에 정말로 진지한 찔림을 받게 되면 현실적 축복을 하나도 받지 않았어도 예수가 까닭 없이 너무 좋아지지 않습니까? 

 

당시로선 기독교와 교회를 빨리 정착시킬 필요가 있어서 성령이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보편적으로 역사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는 것은 태초부터 영원한 절대적 진리입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자신이 철두철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단순히 이런저런 윤리적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행동과 말의 죄는 생각에서 나오고, 그 생각은 또 사탄에 미혹되었던 영혼에서부터 솟아 나오므로, 자신이라는 인격체 전체가 시커먼 죄로만 가득 찬 덩어리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 대적했던 지난 삶과 인생이 사실은 자기만 높이려 했던 정말로 추악하고 비참해서 철저한 실패였음을 자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니며 하나님을 믿었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면 죄에서 건짐을 받지 못했으므로 사실상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영적 사망 아래 있는 상태에선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만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고 또 그래야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일은 영적인 시체인 인간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비추어 자신의 완전히 벌거벗음을 인식하고 오직 그분의 처분에 맡기는 중생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후로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자기가 바라는 대로 도와달라고 떼만 썼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정말로 어떤 삶과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지 먼저 묻고서 순종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극적 전환이 이뤄지려면 이전의 삶이 실패를 넘어서 그대로 가면 영원한 죽음이었다는 사실부터 절감해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후로 그분의 보호 인도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는 새로운 삶과 인생이야말로 참된 생명과 활력과 의로움이 넘치는 축복이라고도 절감해야 합니다. 당연히 자기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식도 이전과 정반대로 180도 바뀌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방향과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승천하기 직전에 당부하신 지상 명령을 실현하려고 오직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서 십자가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참믿음

 

모든 신자가 해외 선교사로 가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불신 이웃을 찾아가면 바로 그곳이 땅끝입니다.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영적인 간격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하나님과 영적인 죽음의 담이 가로막고 있으며, 이전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또 그래서 그들 사이에도 시기 질투 불화 다툼 분리 분쟁 증오 등만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원죄로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왜곡 타락된 인간적인 양심과 사랑으로는 절대로 그 담을 허물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실현되었고 신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예수님의 참사랑만이 땅끝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들을 건질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원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수시로 죄로 넘어져 그 실현이 더디긴 해도 분명히 인생을 완전히 유턴했던 체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다들 앞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로 결단 헌신했는데 본인이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만약 모른다면 내면에 제2의 창조가 아직 일어났지 않았거나, 본인이 그런 중생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했다면 시간이 흘러 잊어버린 것입니다. 

 

행위 구원을 믿는 기독교 밖의 사람들은 평생토록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선행과 공적이 하나님의 구원 기준을 넘어설 자신이 도저히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유일한 목적도 죽은 후 심판받지 않아야 하니까 도덕적 수양으로 자신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이웃 사랑에 진심으로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간혹 불쌍한 자들을 도와도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형상인 양심에 따를 뿐 예수 참사랑의 실현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원하는 일이 무엇이며 또 이 땅에 그분의 통치가 확장되는 그분의 나라를 건설 실현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으며, 그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모릅니다. 

 

정말로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은 해도 십자가의 예수님은 끝까지 부인합니다. 의로운 자가 천국 가야 한다는 원리가 절대적으로 타당하므로 아무 선행 없이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원리는 성경을 모르니까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간섭하여서 생긴 결과적인 변화이자 반응이지만 자기 스스로는 평생을 가도 도무지 자기 죄를 고칠 수도, 씻을 수도 없음을 절감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의지, 선행, 지식, 성장, 각성, 통찰 등으로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면 끝까지 확신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완성했고 실제로 성령의 미세한 음성으로 자기 죄를 책망하며 주신 구원인데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해당하는 구원 영역을 마치 인간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침범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겸손한 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수시로 죄에 넘어지므로 자기가 과연 구원받는 자가 맞는지 곤혹스러울 수는 있습니다. 나아가 일부 기독교 교파에서 예수 믿은 후에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가르치니 더욱 혼동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의미가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은혜임을 정확히 알고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 때문에, 즉 그분의 제자가 된 자기 신분과 특권을 제대로 알기에 반드시 구원을 확신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해 주었다면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그 십자가를 배워갈수록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자기 구원이 확고해집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 십자가에는 정작 자신이 올라갔어야 했다고 절감한 신자라면 자기 구원에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천하 만민에게 실제로 똑똑히 보여 준 종교입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개인별로 구원해 주셨기에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로 시작해 예수로 끝나며, 믿음도 예수로 새사람이 되어서 예수 안에서 새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을 입으면 땅끝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수동태로 말씀하셨습니다. 신자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성령이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죄의 본성이 남아 있고 세상의 위급한 일들로 넘어지고 게으를 수는 있어도,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장벽을 인간 신자가 그것도 혼자서 무너트리기에는, 세상과 사탄의 훼방과 모략이 매우 교묘하고 음흉하며 강력하기에, 너무 역부족입니다. 성령으로 인생의 극적인 전환을 이루어서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그분 가신 삶이 너무 좋아서 그렇게 사는 자들이 함께 모여야 하고 그러면 지금도 오순절 같은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 믿음을 스스로 진지하게 점검해 보기로 합시다. 세상만사를 전지전능하심으로 통치하는 하나님만 믿고 있는지, 그래서 내 필요와 소망을 그분이 이뤄주기를 기도하고 어떻게든 그 일만 이루기 위해서 교회 생활에 충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보다는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알게 하려고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을 온전히 믿습니까? 정말로 예수님만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살았던 모습대로 살기로 결단 헌신 실천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사탄에 미혹되어 여전히 세상의 정욕만 채우려는 자들을 보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겨집니까? 종교심은 있으되 자신의 선행으로 이루려고 평생을 해도 성공하지 못할 멍에에 묶인 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든 소개하고 싶습니까? 이 모든 질문을 하나로 줄이면 자신부터 오직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기쁩니까? 

 

(6/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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