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관대하신 토기장이

조회 수 267 추천 수 17 2011.06.01 22: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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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관대하신 토기장이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22-24)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죄의 삯인 죽음의 형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범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낙원에서 쫓겨나올 때에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옮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인간이 타락한 상태로 생명나무 실과마저 따먹고 영생하면 구원의 방도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때가 되면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단의 머리를 밞음으로써 인간을 구원키로 하셨습니다.(창3:15)

다른 말로 아담의 후손들로 사단의 미혹 아래 묶여 있도록 하신 것이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려는 은혜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후손은 아담의 한 허리에서 나온 모든 이를 포함합니다. 유대인의 구원을 이방인의 구원과 연결해 설명한 9-11장의 결론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 여기서 모든 사람은 당연히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혈통과 외모의 구별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차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차등이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긍휼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신구약 성경 전체에 일관된 불변의 진리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서두에서 이를 전제해 놓고 논술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그런데 그 구원의 순서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구약시대에는 먼저 유대인을 택하여 구원을 베풉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섰던 갈렙도 그니스 족속이었으며(최소한 유다 지파와의 혼혈), 가나안 여인 기생 라합이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일부 이방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크게 보아 하나님은 일차로 유대인을 택해(이 또한 당연히 그 전부는 아님)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로 복의 근원을 삼아서 그들을 통해 모든 종족에게 당신의 긍휼이 전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 당시로선 유대인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따로 불러내어 믿음을 심어주고 자라게 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그분의 십자가 대속적 죽음의 은혜를 믿는 자는 종족의 구분 없이 누구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익히 알고 믿던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 받았어야 함에도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욱 완악하게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의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롬9:4,5) 나셨는데도 말입니다..

같은 유대인인 바울로선 동족의 구원 문제로 크게 고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구원 체험에 비추어 봐도 율법의 의로는 도무지 구원이 불가능한데도 계속해서 ‘힘써’ 십자가의 도에 복종치 아니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2-4)

유대인들은 율법은 자기 의를 세울지 몰라도 하나님의 의에는 결코 미치지 못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율법으로 치면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한 예수를 구주로 절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의를 세우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겐 다른 사람의, 그것도 사형수 죄인의 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들은 택함 받은 의인이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로선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에게 아무리 전도해도 예수를 믿지 않는 상황이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롬9:1)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갈망하고 기도했습니다. 우선 이전의 완악했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삼층천까지 직접 가서 보았으니 지옥 형벌이 얼마나 끔찍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그가 깨달은 바는 유대인들이 지금 잘 믿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선 구약시대에는 유대인을 먼저 당신을 따르는 제사장 백성으로 세우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이 먼저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를 깨닫도록 하시고, 그러다 마지막 때에는 유대인도 예수를 믿게끔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없는 구원은 확정된 진리로서 바울이 문제 삼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에 각각의 구원의 시기와 방식도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는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롬11:25)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이스라엘)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이방인)으로 너희를 노엽게”(10:19) 하려는 “너무나 깊고도 측량치 못할 정도로 부요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11:32)이었던 것입니다.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

야곱과 에서의 예에서 보듯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의해 이뤄집니다. 이런 택함에 대해 인간은 하나님께 허물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로 바울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은 순전히 토기장이에게 달렸다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9:19-21) 이제 본문은 그 비유의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더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정확히 해석하려면 무엇보다 바울이 9장 전체에서 두 대조되는 개념을 표현만 달리해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 하나님이 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당신께서 긍휼히 여길 자와 그렇지 않은 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귀히 쓰일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이 그것입니다.

둘로 짝을 이룬 이 표현들을 자세히 살피면 전자가 유대인, 후자가 이방인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예정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뜻합니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도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6,7)라고 설명한 후에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로 나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 받도록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여 남은 유대인들만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로선 당연히 유대인이 예수를 먼저 잘 믿었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이유의 정답을 발견한 셈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방인이라고 다 구원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18절) 하실 뿐입니다. 토기장이에게 두 그릇을 만들 전권이 있듯이 심판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 격인 24절에서도 이런 예정의 원리를 분명히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절)

만약 이방인의 구원도 예정 안에 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비유라면 이 구절은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이니라.”고 진술해야 합니다. 대신에 본문은 유대인 “중에서”와,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라고 합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이방인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일부의 “부르신 자”들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방인도 구원의 예정에 들었다는 “구원의 공평성” 대신에,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에 따라 이뤄진다는 “구원의 방식”이 논증의 핵심 주제라는 것입니다.  

또 이 24절은 원어의 문법적 구성으로는 23절의 긍휼의 그릇만 수식하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23절에 함께 붙어 있는 것이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의 장절은 원본에는 구분이 없고 후대에 붙여진 것입니다. 현재의 장절이 대체적으로 성경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이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미흡한 해석을 낳는 오류도 가끔 있습니다. 24절이 23절만 수식하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자는 긍휼의 그릇이 됩니다. 그럼 22절도 당연히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부르심을 받지 않은 자는 진노의 그릇이 된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9-11장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큰 긍휼을 받았음에도 바울 당시에 예수를 극력 배척한 이유를 하나님의 구속사적 지혜로 풀어가고 있음에 주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방인보다 유대인의 구원 예정을 강조해야만 전체 의미의 흐름상 더 논리적입니다. 거기다 로마서가 8장까지 인간 조건보다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의신칭의의 진리를 다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즉, 이방인의 구원예정도 사실상 이미 논증한 셈이므로(아니 이미 창세기부터 계시하셨고 성경 전체의 진리임), 새삼 9-12장에서 다시 다룰 이유는 없습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토기장이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을 강조하려고 구약의 대표적 선지자 이사야(사29:16)와 예레미야(렘18:6)에 의해 이미 사용된 예화였습니다. 바울도 지금 동일한 목적으로 그 비유를 인용한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진술은 계시의 통일성에 바탕을 두고 해석해야 하기에 본문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뜻입니다.  

절대적 주권이라고 해서 인간의 존재론적 비참한 운명을 강조하거나, 구원이 그저 하나님 기분에 따라 달린 것이라거나, 하나님 하시는 일은 선악을 따지는 것도 불평도 절대 해선 안 된다는 독선적 의미가 아닙니다. 토기장이 비유를 듣고 혹시라도 그런 오해를 할까봐 하나님이 절대적 선택을 하시는 이유를 밝힌 것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불만이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이 하나님이 유대인만 구원으로 예정했다면 불공평하지만 이방인도 예정에 포함시켰으니 공정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은 애초부터 없었고, 당신께서 긍휼을 베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눌 뿐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기도 전에 그렇게 나누지만 당신의 편견, 독단, 편애, 불공평성, 불합리성을 절대 내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먼저 멸망당할 진노의 그릇 즉,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만 심판 받는 것이지 하나님이 제멋대로 일방적으로 택해 벌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유기(遺棄)에는 반드시 “오래 참으심의 관용”이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죄로 치면 당장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은 오히려 회개할 기회를 오랜 기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은 그분의 오래 참으심의 관용 아래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 눈에는 그분의 무한한 자유성에만 따라 행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저주 받아 마땅한 인간의 죄책에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대조되는 택함 받은 긍휼의 그릇 또한 자신들의 죄 값으로는 당장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그분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긍휼의 그릇”이라는 표현 자체가 죄는 많지만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택함 받았다는, 역으로. 긍휼 없이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구원으로 예정되었는가 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누차 강조하지만 그들의 혈통이나 외모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것입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택함 받으나 못 받으나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 가운데 멸망의 예정에 든 자에게는 하나님이 오래 참음의 관용을 보이시다가 당신의 진노와 능력을 나타낼 것이며, 아무 공로 없으나 긍휼에 따라 구원으로 선택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인 된 상태는 모두가 동일하나,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드러내려고 심판과 구원의 예정으로 나눈 것뿐입니다.  

바울이 토기장이 비유에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화에선 없었던 “진흙 한 덩어리”라는 표현을 첨가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한 덩어리에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나눠졌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똑 같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은 “만일 하나님이”로 시작해서 “ ----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로 끝납니다.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아무 억울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죽어 없어져 마땅한데도 하나님은 오히려 오랜 관용으로 참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선 이 땅에서 당신을 대신할 청지기이자 당신과 교제할 대상으로 지은 인간을 몽땅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구원과 심판으로 당신께서 택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 선택에는 단 한 치의 모순과 잘못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구원의 예정은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면에 심판의 예정은 당신의 진노의 능력을 보이시려는 뜻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정과 믿음

결론적으로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이 무조건적이고 무자비하고 일방적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의심, 불평 심지어 불신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인 성경은 인간이 그분에게 결코 허물과 힐문할 수 없다고 엄숙히 선언합니다. 단순히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한 그릇, 진노의 그릇(심판의 예정- 이방인이 아님)은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귀한 그릇, 긍휼의 그릇은(구원의 예정-유대인이 아님) “그(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이방인의 구원도 예정되어 있었다는 의미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본문 24절만으로도 부인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를 불렀다고 하지 않고, 유대인 중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신 자만 긍휼의 그릇이 된다고 했습니다. 본문이 포함된 9장이 절대적 택함에 대한 논술인지, 이방인의 구원 예정에 대한 계시인지는 전체문맥을 살피고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진리와 연결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언뜻 25,26절이 이방인 예정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는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구약예언을 인용한 것뿐입니다. 나아가 10-11 장에서 이방인을 먼저 구원하여 이스라엘로 시기케 하려는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진술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7-29절) 곧바로 이어진 말씀에서도 “이스라엘 중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자”만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바울이 10,11장에서 논술할 내용인, 이방인 중에서 택한 자를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다가 유대인보다 먼저 구원을 주셨고 유대인 중에서 이방인이 먼저 예수 믿는 것을 보고 시기하도록 해서 아주 늦게 그분의 영광을 알게 한들 너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당신의 독생자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공의와 사랑이 공(共)히 또 완벽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절대적 예정을 인간이 힐문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를 30-33절에 들고 있습니다. 비록 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믿음 사이에는 전혀 상충이 일어나지 않고 완벽하게 조화 균형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와 섭리 가운데 긍휼을 주실 자를 택하여서, 모든 주변 여건을 예비하시고, 때가 되면 성령으로 그 영혼에 역사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마저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0-33절)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원리 자체가 인간의 혈통, 외모, 공적 같은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이방인의 구원도 원죄로 타락할 때부터 하나님의 예정 안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구약과 바울 당시의, 아니 지금껏 이스라엘(개인적이 아닌 대략적 의미에서)은 믿음을 외면하고 자기들 행위에만 의존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십자가 구원을 걷어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잘못이 없다는 가장 명확한 실증이지 않습니까? 요컨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구원으로 예정되지 못한 유기에 하나님께 힐문할 근거가 단 한 치도 없다는 뜻 아닙니까?

5/3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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