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의미는? (2)
2. 성경전체(context)와 연결 된 뜻 - 구원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
구약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요5:18)으로 인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상기본문은 그런 논쟁 중에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神性)에 대해 변증하는 말씀입니다. 요점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은 곧 당신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하려는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 전체가 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데 바로 당신이 그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메시아를 대망하고 영생을 얻고 싶다면 구약의 그에 대한 예언들을 온전하고도 세밀하게 연구했어야 했으며 또 그러면 당연히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바로 앞에서 “그 말씀(하나님의 구원진리와 보내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라”(요5:38)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본문에 이어서 유대인들을 견책하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5:45-47)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직접 고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대신에 모세가 고소한다고 합니다. 이미 1500년 전에 죽은 모세가 어떻게 고소합니까? 예수님은 모세가 기록한 글을 믿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모세오경 즉, 율법을 비롯해서 구약성경 전체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얼마나 중시했습니까? 모세를 믿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설명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학적으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이 토론에서 말씀하신 앞뒤 내용과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상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 말씀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택함 받은 족속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 받아 소지하고 있고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 구원은 이미 얻은 것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율법적 행위만 중요시 했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와 또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은 너희가 율법조차 제대로 믿지 않았고 또 지키지 못했으니 바로 모세가 아닌 모세를 통해 받은 그 율법이 너희를 고소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원리를 명백히 밝혔습니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2:12b) 율법을 준수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답변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럼 자기들이 그렇게 자부심을 갖던 바로 그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므로 주님은 모세가 그들을 고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문자적 준행과 열 번째 계명
문제는 유대인들 스스로는 절대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어쨌든 증서를 주고 이혼했으며, 하나님께 서약한 것은 부모를 희생하고라도 지켰으며, 안식일은 더더욱 철저히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외에 장로들이 고안한 세부적 실천규정까지 준수했으며, 의심과 혼동이 생길 때마다 랍비의 해석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준행은 극도로 문자적 형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말1:8,9)라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희생제물의 종류와 개수만 맞추려니까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좋은 것을 도리어 자기들이 차지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에서 가장 핵심이자 근본인 십계명마저 사실상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첫 네 계명들을 그들 나름대로 성실히 지켰습니다. 예컨대 야훼 하나님의 이름은 아예 부르지도 않았으며 안식일은 추가규정을 39개나 만들어 지켰지 않습니까? 또 인간관계에 관한 나머지 계명인 부모공경,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의 금지 등도 겉으로는 비교적 잘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인간관계 계명 중에 다른 것은 행동으로 짓는 죄지만 마지막 계명만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살인은 이웃의 생명, 간음은 이웃의 아내, 도적질은 이웃의 재물, 거짓증거는 이웃의 인격을 직접적인 행동으로 파괴한 것입니다. 탐심은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런 악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이 간음이요, 말로 형제를 욕한 것이 살인이라고 죄의 의미를 더 고차원적으로 해석해준 까닭입니다. 이 마지막 계명에 넘어지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신실해도 단 한 명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실은 그 이전에 유대인들은 다른 십계명들도 행동으로 무수히 어겼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5-17)
이스라엘이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 손에 죄로 인한 피가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을 학대했습니다. 저울을 속이는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제대로 변호하지 않는 악행은 거짓 증거로 약자들을 수탈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소망하는 공평과 정의가 완전히 실종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무수한 제물을 갖고 와도 받지 않으며 성전 마당만 밟고 간다고 한탄했던 것입니다.(사1:11-12)
바울도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죄를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2:23) 그래서 1:18-32까지 열거했던 이방인의 죄도 함께 감안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선언하였느니라.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9-18)고 선포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인류의 영적 상황일뿐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는 현재와 장래의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상태입니다.
율법의 역할
결국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의 도덕적 성결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속 선포하게 했던 메시지는 손에 피가 가득할 정도의 악행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교적 의식에 충실했어도 당신의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한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율법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고백케 만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믿기 전의 바울을 포함하여 지금껏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 갖고 있던 개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이미 소지한 택한 백성이므로 구원을 받았거나, 최대한 양보해도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여겼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4:15) 요컨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이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4:5,6)
율법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행할 기준이었습니다. 열국들에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백성임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입경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원 받았음을 상징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 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단지 그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표준이었습니다.
출애굽 첫 세대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히3:15,16) 때문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고 그 마음에 하나님은 실종되고 애굽에서의 즉, 세상의 풍요와 안락과 형통만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과 언약
구약백성에게 율법 준행이 구원의 기준이 아니었다면 다른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대표적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약 5백 년 전 사람이었습니다. 율법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4:3, 창15:6)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창12:1-3)이 실현될 기미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하나님 그분의 신실함을 믿었기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롬4:13a)을 믿었습니다. 그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롬4:13b)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기 후손을 통해 이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언약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불현듯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하나님이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 사탄을 저주한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을 패배케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복음이라고 해서 ‘원시복음’(Protevangelium)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연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그 자리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인 자기가 대신 차지하려 한 까닭입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아니 태초에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요1:1) 그 구원은 윤리적 선행과 공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을 타락 이전의 원래 위치대로 복귀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구약시대에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원시복음이자 최초의 언약이 그 표현과 내용이 조금씩 더 구체화되면서 에녹과 노아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인 외아들 이삭을 거쳐 모세와 다윗에게까지 계승 확대 발전되었습니다.
결국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갈4:4,5)이었습니다. 아담 때의 약속을 골고다 십자가에서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구태여 따로 그 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의 범함과 깨달음만 있고 구원의 방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아브라함
바울은 구약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2,23) 몽학선생은 고대의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특별히 여러 아들 중에 유업을 얻을 아들을 선택해 가르칠 정도의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런 몽학선생에 비유된 율법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유업을 잊게 만들어주는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 가르치고 십자가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예수님의 놀라운 이 선언을 보십시오. 예수님보다 근 이천 년 전의 아브라함이 당신을 보길 소망하다가 실제로 보았기에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는 유대인들과 구원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 그들더러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기에 당연히 구원받는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신의 후손에서 약속의 씨앗인 메시아가 날 것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 윤리적 잣대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도무지 없지만 그분께서 언약의 계승자로 택해주시어 그 언약을 이뤄갈 수 있게끔 자신의 삶의 모든 면에서 보호 인도해주셨음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자신을 품어주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구원 받을 아무 공로 없음을 인정했기에 그의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의 조건 없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인 믿음이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2-24) 아브라함은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율법 준수가 구원을 얻는 수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혈통적 후손에게도 그 원리는 당연히, 아니 더더욱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뜻 보기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가르치니까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막는다고 여기고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한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로 은혜로 인한 값없는 구원을 두고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고 말합니다. 참으로 성경이 정미하지 않습니까? 이전에 율법의 최고 전문가로서 가장 유대인다웠던 바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두고 율법과 선지자를 폐한다고 간주했지만, 성경은 거꾸로 예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이 정반대로 틀렸다는 것입니다. 2장 답변 서두에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으려고 성경을 상고하나 실패했다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대로입니다.
살펴본 대로 십계명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기에 율법에 따라 온전한 의를 이룰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도덕적 영적 실상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임을 율법 자체가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리스도가 와서 인간 쪽의 공로와 전혀 무관한 값없는 구원을 주실 것이라고 계속 예언했는데도 유대인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무수한 제물을 받지 않으며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한탄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예언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주홍이나 진홍 즉, 가장 진한 붉은 색으로 손에 가득한 피(15절)를 상징합니다. 그럼에도 눈과 양털처럼 희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이처럼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 의한 대속적 구원을 증거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겠다.”는 말씀은 당신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돌아가시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심으로써 구약성경의 계시를 성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 은혜를 믿는 자는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되어서 그분의 친 백성이자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롬8:1,2)
3. 첨언 - 예수님이 율법을 폐했다고 믿는 오류
질문과 연관해서 덧붙이고 싶은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전히 대체했기에 더 이상 율법은 소용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서 용도 폐기된 부분이 일부 있습니다. 바로 제사법과 정결례와 음식법과 사회법 등입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동물 제사로는 속죄가 완전하지 못하며 일시적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 제사법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은 개혁될 때까지 즉,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완성되고 성경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온전히 계시될 때까지 잠시 맡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잠시 맡겨두었다는 것은 때가 되면 용도가 다한다는 것입니다.
제사법과 정결례 등은 그 전부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영단번의 제물로 바쳐진 이후로는 더 이상 동물 제사나 정결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법이라는 명문화 된 종교의식과 절차만 폐지된 것이지 그 안에 담긴 대속의 원리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되었습니다.
또 음식법과 사회법은 당시의 상황과 여건에 맞춘 것들입니다. 예컨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 위생적 처리와 보관이 힘들었기에 부패를 염려한 것입니다. 시대적 환경이 완전히 변하고 발전된 지금은 그 규정에 얽매일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종교적 의식과 절차보다 자신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뜻이었다면, 복음이 율법을 대체한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해한 것일 뿐, 살펴본 대로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경륜 안에서 복음과 율법은 상호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이 상호 대칭, 반목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체될 성격이 아닙니다. 율법은 윤리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방인들 앞에 여호와를 아는 백성답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구원과 연관해선 모든 이로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고백케 해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신약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도 동일합니다. 산상수훈을 따라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수훈의 첫 말씀대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합니다(마5:3). 그렇게 심령이 가난해져 천국을 가진 자들이 세상 앞에서 빛과 소금으로 선한 행실을 보임으로써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구약 율법을 주신 뜻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구원 받은 신자는 아무리 더 이상 영원한 심판의 정죄함이 없어도 산상수훈은 물론 구약의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으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대치 관계로 오해하는 자들에게선 극단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복음으로 율법이 완전히 무용화 되었으므로 모든 종교적 의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교회, 주일성수, 목사, 제직, 교단, 십일조 등등은 이젠 아예 필요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복음으로 모든 죄에서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롬6:1,2) 신자는 더더욱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력화시킨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외식적 율법주의와 잘못된 선민사상이었습니다. 대신에 율법과 선지자는 완전케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복음 외에도 할례 같은 종교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유대율법주의처럼 되어선 안 되지만,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인식하여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자를 볼 때에 그리스도도 함께 보게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 구속의 진리를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일에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1/23/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