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가시가 바로 은혜다.

조회 수 400 추천 수 5 2009.10.27 19: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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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가시가 바로 은혜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8-10)

눈 색깔을 바꿔달라는 기도

약 2백 년 전 스코틀랜드의 아미라는 여자 아이가 서구인 같지 않은 짙은 갈색 눈이 마음에 안 들어 초록색으로 바꿔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단순히 아름다워지려는 욕구 때문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색깔이 바뀌지 않자 하나님에게 섭섭한 심정을 넘어 원망까지 들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그녀는 인도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다 배척 받았는데 이상하게 그녀가 가자 복음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전에 다녀간 선교사들보다 특별히 말씀에 권능이 있거나 신령한 은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이전 선교사들은 제대로 복음도 전하지 못한 채 거부되었기 때문에 이미 뿌려놓은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눈 색깔이 자기들과 같은 짙은 갈색인지라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만약에 서구인들의 눈 색깔이었다면 그녀도 마찬가지로 배척당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어려서 드렸던 기도에 하나님이 전혀 응답하지 않은 까닭을, 아니 얼마나 어리석은 기도였던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하나님이 신자의 아주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에 당장 응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 하나님은 현재의 내 형편을 제대로 알고는 계시는지 의심스럽고, 혹시 모르고 있었다면 이제 기도를 들었으니 무슨 조치를 취해주어야 하지 않는지 불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한참 지나고 나면, 심지어 기도했던 내용마저 가마득할 때쯤에 모든 일들이 다 해결되었음을 불현듯 발견하고는 놀랄 때가 많다. 아무래도 응답이 안 되는가보다, 아니면 응답 안 되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응답인가보다 체념한 지도 한참 지난 후다. 전혀 우연한 일이나 계기로 인해 자기가 기도했던 일들이 오히려 더 깊은 섭리와 풍성한 은혜로 달성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전혀 예상, 기대, 추측, 계산하지 못했던 신기한 방식으로 모든 상황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결말은 너무나 선하고 의롭기만 하다.

우연한 계기란 기도한 내용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니기에 자칫 지나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상호 연관성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난 것을 부지불식간에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기도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응답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이도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동안 침묵한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이렇게 하시려는 뜻이었구나. 정말 놀랍고 신기하다.”라는 찬탄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물론 그 동안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주무시거나 졸지도 않으셨다는 뜻이다. 졸거나 잤던  자는 오히려 기도했던 신자다. 기도를 처음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내내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일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최소한 죽 관념하고 계시다가 가장 적합한 때에 당신만의 방식으로 이루셨던 것이다. 응답된 때와 방식과 결과에 하나님이 아니면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완벽함이 생생하게 드러나기에 자연히 그분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신지라 크게 넘치는 축복으로, 흔히 강단에서 강조하듯이 삼십 배 육십 배의 결실로, 기도 응답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분명히 생각과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또 달라서 더 높다고 했다. 크고 많고 넘치고 좋고 신나고 기쁘다는 개념은 일차적으로 없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와 전혀 다르고 고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비유컨대 유치원생이 손가락 발가락 동원하여 더하기를 하는 것과 수학전공 대학원생이 슈퍼컴퓨터를 동원해 고차원 방정식을 푸는 것의 차이다. 유치원생이 볼 때 대학원생이 풀고 있는 수학은 수학이 아니라고 여긴다.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을 볼 때도 그 지혜가 너무 높아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은 느낌 즉, 침묵하고 부재한 것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 부재(不在)의 원인

그렇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분의 놀라운 섭리와 절대적인 권능에 올바르게 반응하려면 신자 쪽에서도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한데도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길과 생각이 높으면 높을수록 알거나 믿기가 더 힘들지 않는가? 그러니까 더더욱 절대적 신뢰, 내 믿음의 강도를 키우는 차원이 아니라 내 인식 안에서 최대한 크게 하나님의 폭을 넓히는 믿음이 요구되지 않는가?

실제적인 측면에서 말하면 그분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신자 쪽의 소원의 강도가 약했던 것이다. 소원의 강도가 클수록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갈급함은 커진다. 또 자연히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도 더 크게 인식하여서 절대적 신뢰를 유지하게 된다. 반대로 그분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지 못한 것은 기도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헌신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꼭 이뤄져야 할 당위성, 시급성, 중요성은 결여된 채 이뤄져도 그만 안 이뤄져도 그만인 기도를 한 것이다.

예컨대 암 말기에 병원에서도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하면 죽기 살기로 기도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아예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지 나아도 그만 안 나아도 그만인 경우는 없다. 독감에 걸렸다면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도 그리 절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솔직히 아주 절실하지 않은 문제는 기도도 거의 하지 않는다. 설령 기도해도 간절하지 않기에 응답되던 안 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무시거나 조는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계기는 아주 중차대한 문제에 국한된다. 그것도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 하나님은 절대 주무시거나 졸지 않으시는 분이다. 간단히 역으로 생각해보라. 만약 그분이 주무시거나 졸면 어떻게 되겠는가? 도무지 말도 안 되지 않는가? 신자가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 그분은 응답해 주시려고 즉각 준비하신다. 단 당신의 방식과 때에 따라서 말이다.

반면에 신자는 좀체 내 길과 내 생각을 포기는커녕 심지어 수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 기도한 대로, 내 때와 방식대로 응답이 되는지에만 신경을 쏟고 있으니 아무리 가도 감감 무소식일 때가 많다. 자연히 그분마저 부재(不在)한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물론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 아주 조급해진 것은 사실이다. 또 조급해지다 보니 자꾸 자기 생각에 더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큰 문제일수록 자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에 집착해선 안 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도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일수록  뒤로 물러서서 냉정하게 바라볼 줄 알고 또 그러면 의외로 적합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신자가 기도해놓고 기다릴 줄도 모르면 불신자보다 못한 셈이지 않는가?

결국 신자 들이 범하는 잘못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경건하고도 신령하게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그분 대신에 자신을 앉혀 놓고 있다. 너무나도 불신앙의 행위다. 나아가 어리석다 못해 웃기는 짓이다.

기도의 가장 기본적 전제는 하나님이 신자의 모든 일을 세밀하게 주관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영원토록 변함없는 절대적인 진리다. 신자의 소원, 열심, 정성, 생각, 느낌, 심지어 믿음 그 어느 것과도 상관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 외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당연히 기도는 오직 그분만을 자기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모시는 일이며 그렇지 않다면 종교적 겉치레에 불과해진다.  

믿음은 때로 사고의 개념만으로 가능할 수도 있지만 기도는 그 개념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첫 걸음이자 거의 전부다. 신앙은 기도에서 시작되고 기도에서 마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주로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을 기도하면서도 자기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선 하나님을 그 밑에 엎드리라고 요구하는 꼴이라면 대체 왜 기도를 하는가?

거꾸로 되어도 너무 거꾸로다. 아예 기도를 안 하느니 못하지 않는가? 역설적이긴 하지만 기도를 하지 않는 만큼이라도 그분을 종으로 부리는 배역 행위는 덜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아니 많은 신자들이 실제 그래서 기도를 잘 안 한다. 기도할 제목들을 스스로 생각해도, 사실 그리 심각히 따져 보지 않고도, 욕심에서 나온 인간적 소원인 줄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신자가 하나님의 길과 생각을 미리 알아서 기도할 수는 결코 없다. 그분의 뜻을 사전에 알면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준비하여 시행하면 되지 구태여 기도할 필요 없다. 그 시행함에 만전을 기해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더러 자기 인생을 주관해달라는 항복 선언이자 순종할 자세를 갖추는 일이 기도다. 그럼 그분의 뜻을 알고자 묻는 작업인 셈이다. 그래야 그 뜻대로 따를 것 아닌가? 그런데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분을 의심, 불신, 심지어 불평을 터뜨리면 도대체 기도가, 아니 신앙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지금껏 한 기도도 시간낭비이지 않는가? 하나님더러 빨리 내 사정을 알아먹고 당장 무슨 수를 쓰라고 요구, 강요한 꼴 밖에 더 되는가? 그럼 하나님이 그 사정을 기도 안 했다고 모를 리 있는가?

하나님의 길을 사전에 알지 못함에도 자기 길을 고집하지 말라고 하면 신자의 손발이 묶인 셈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그것이 기도의 출발이다. 손발이 묶였다는 것 이상 기도에 대한 좋은 표현도 없다. 손발이 묶였다고 기도 안 해도 된다거나 처분만 기다린다는 한 마디로 기도를 끝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자기 소원과 계획을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아뢰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그렇다고 자기 뜻이 그분의 뜻에 맞는지도 모른다면 그 수 말고는 없지 않는가? 단 진정으로 그분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시고서 말이다. 그 모든 일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고 입술로 시인 고백해야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분이 언제 어떻게 응답하실지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기도할 때부터 자기 뜻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더할 나위 없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러지 못하니 기도는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대신에 기도한 후에 매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언제든 자기 뜻을 버릴 준비가 철두철미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  

최소한 기도한 일을 두고 끝까지 기다릴 줄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십 년, 혹은 수십 년, 나아가 기도자가 죽은 후에도 당신의 방식으로 반드시 응답하신다. 일부러 신자로 골탕 먹이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가 정말 소망을 갖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나아가 매사를 당신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될 때까지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기도했던 모든 일에 대해서 너무나 신기하고도 완벽한 응답을 언젠가는 반드시 주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만드시는 것이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서두에 예를 든 선교사의 경우는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인가 아닌가? 전혀 응답하지 않았다. 인도 선교사로 가게 된 것은 그 기도와는 전혀 연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아예 무시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후에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는 방식으로 응답한 것조차 아니다.

다른 말로 그녀로선 하나님이 왜 이리 오랫동안 침묵하시는가, 혹은 부재 하시는가라고 하등 의아해 여길 필요조차 사실은 없었다. 눈의 색깔을 바꿔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도 원칙적으로 응답할 수 없는 기도다. 당신의 섭리를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인데 아주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다. 단순히 예뻐 보이고 사람들의 호감을 사겠다는 것이 기적을 일으킬만한 특별한 사유는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그녀에 대한 영원한 계획은 처음부터 깊고 푸른 눈이 아니라 서양인인데도 오히려 동양인처럼 짙은 갈색 눈으로 만드신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사람을 돌연변이를 거쳐 인도인처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인도에 선교사로 보낼 특별한 계획을 하나님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마련해 놓으셨던 것이다.

틀림없이 그녀는 특이한 눈 색깔로 사람들의 놀림을 받았거나 최소한 인기가 없었기에 색깔을 바꿔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마련해 놓은 그녀의 평생에 대한 계획을 바꿔달라는 기도가 응답될 리는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생각은 그녀로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호감과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선교사로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더 좋고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사실 우리 신앙이 너무 싱겁다. 하나님의 일은 당연히 너무나도 옳고 좋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그 옳고 좋은 길에 참여된 신자도 옳고 좋다는 것을 진심으로 절감해야 한다. 아니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만드신다. 신자로 당신의 뜻과 계획에 완전히 항복시켜서 전심(全心)과 진심(眞心)으로 기꺼이 참여케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반드시 그 전에 고난의 길을 겪게 만드신다. 이 또한 신자를 일부러 고생시키려는 의도는 그분에게 전혀 없다. 당신의 길이 옳고 좋다는 것을 절감하게 하려면 인간이 흔하게 가는 길이, 때로 신자가 가는 길마저, 틀렸고 나빴다는 점을 명확히 대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복음의 열매가 열리기 전까지는 자신의 눈 색깔이 그녀에게는 계속 콤플렉스이자 불만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기 전까지는 기분 나빴던 체험뿐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홍수 나기 전까지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고, 요셉도 기근에서 구원 받은 형제들과 완전히 화해할 때까지 그 인생에 진정한 평강과 기쁨이 없었지 않는가?

그럼 뒤집어 말하면 어떻게 되는가? 신자가 겪고 있는 현재의 고난, 슬픔, 멸시, 핍박 등이 하나님의 길로 가는 가장 좋고도 유일한 과정임을 확신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당장 이해 혹은 수긍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 길로 가는 필수적 과정임을 믿어야 한다. 요컨대 지금의 고통과 슬픔이 나중에 반드시 역전되어서 더 큰 성공의 발판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처한 모든 상황, 여건, 문제, 환난에서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다 그러하다. 특별히 다른 사람과 달리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지금 이 일이 하나님의 최선이자 유일한 길이라면 만약 내가 이 일을 겪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 자체가 최적의 방향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최소한 중지, 연기, 우회되는 셈이다.

하나님의 길이 신자의 길과 다르다면 그 필연적 결과로 최소 두 가지가 따라온다. 첫째는 지금 겪는 바로 그 힘든 일들이 나중에는 반드시 선한 일로 바뀐다는 것이다. 환난과 슬픔을 잘 견디어 냈기에 따로 보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힘든 일 자체가 좋은 일이 된다는 것이다. 선교사의 눈 색깔이 처음에는 부정적 결과만 맺었지만 그 색깔은 그대로 있는 채 나중에 긍정적 열매가 맺혔지 않는가?

둘째는 신자가 옳고 좋게 여기는 열매는 반드시 하나님의 열매여야 한다. 신자에게 현실적 인간적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당신의 거룩한 통치가 더 확장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열매가 더 맺히게 된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신자의 길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뤄졌으니까 말이다.

고난을 더 받으려는 바울

바울이 몸에 난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대신에 그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라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만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니 바울로선 당연히 감사하며 참아내기만 했는가? 아니다.

선교사의 눈 색깔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먼 장래를 위한 계획이었듯이 사단의 가시를 그대로 둔 것 또한 그랬다. 바울더러 앞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자고하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래서 바울의 능력이 약한 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케 해주었다. 바울의 약함이 끝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해졌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까 바울의 약함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약함과 하나님의 은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곳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바울은 반드시 약해져야만 했다. 육체의 가시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 가시를 참아내니까 기특해서 당신의 은혜를 더 부어준 것이 아니다. 만약 가시가 제거 되면 그는 자고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줄고 복음의 열매 또한 줄어든다.

따라서 바로 육체의 가시 그것 때문에 복음이 확장되는 것이다. 바울이 고난을 겪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뜻을 충분히 깨달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자신의 고난을 통해 복음이 더 확장되기를 소원했다. 분명 육신의 고통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자신도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이 너무 좋고 감사해서 기꺼이 또 충분히 감내한 것이다.  

신자가 현재 겪는 힘들고 고달픈 일은 반드시 감사할 만한 좋은 일로 바뀌거나 바로 그것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기게 된다. 고난 자체가 나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로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현재 받는 환난은 장래 축복으로 가는 통로일 뿐 아니라 이미 보장된 축복의 표상이자 증거다. 축복이 잠시 환난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을 뿐이다.  

현재의 어려움이 바로 하나님의 선이자 축복이라면 항상 깨어서 환난 가운데 있는 은혜와 축복을 찾아내어야 한다. 환난의 가면을 벗겨내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낼 줄 알아내어야 한다. 주위 여건과 사건들이 어지럽게 뒤엉킨 가운데서도 그분의 숨겨진 섭리의 그림을 찾고 덧칠 된 겉 표면을 갉아내어 속에 감춰진 그분의 진리의 암호를 해독해야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사고를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아직도 완전히 납득되지 않는가? 현재 사정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분의 사랑은커녕 능력의 낌새조차 맡을 수 없는가? 그럼 계속해서 힘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주무시고 조는 것 같은 생각 밖에 나지 않게 된다. 그럼 오직 현재 자신에게 닥친 고통만 빨리 끝내달라거나, 어쨌든 잘 견뎌낼 테니까 나중에 곱절로 복 달라는 의도밖에 더 되는가? 결국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과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바울이 사단의 가시가 남아 있는데도 즉, 자기 기도가 전혀 응답되지 않았는데도, 뭐라고 했는가? 하나님 뜻이니까 끝까지 참아 내겠다고 한 적이 있는가? 아니다. 전혀 다르다. 그 고통을 기뻐했고 심지어 자랑했다고 하지 않는가? 또 자기의 약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한 것이라고 했지 않는가? 그는 현재 자신의 고통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뀐다는 차원마저 넘어섰다. 현재의 고통이 바로 현재의 은혜라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십자가 복음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했다. 그 일을 바로 자신의 일로 간주했다. 죽기 살기로 기도하고 모든 것을 걸고 이뤄야 할 일이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었다. 나아가 그 일을 평생 동안 큰 고통을 안고서라도 끝까지 계속하기로 했다. 더 이상 고통을 없앨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고통이 없어져 자고해질까 걱정했다. 고통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난을 겪는 신자의 일반적인 반응은 어떠한가? 우선 하나님께 당장 해결해 달라고 무조건 떼를 쓴다. 그와 동시에 고난을 믿음으로, 사실은 믿음을 빙자한 의지력이지만, 이겨내려는 데에 초점을 모은다. 또 그렇게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었으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선 신자의 성숙과 승리란 하나도 없는데도, 그분이 몇 배로 보상해주리라 기대하거나 믿는다.  

보상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고난을 겪은 후에는 자연히 은혜가 따르리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고난을 겪어야만 은혜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고난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개입과 상관없이 어떤 인간에게라도 힘든 일만 평생 지속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아주 힘든 일 다음에 고난이 조금만 줄어도 당연히 좋은 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신자가 고난 뒤에 은혜가 따른다고 단순히 생각하면 치우면 실제적인 측면에선 불신자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온전한 믿음은 현재의 고난이 장래의 은혜의 표상이자 증거임을 아는 것이다. 그 고난이 나중에 은혜로 바뀔 뿐 아니라 바울처럼 현재 고난이 바로 현재 은혜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일만 이뤄지기를 바랬다. 또 평생을 두고 모든 것을 그분께 온전히 바쳤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그대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만 바랐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비록 고난일지라도 그 고난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가 머물기를 소원한 것이다. 쉽게 말해 고난을 없애기보다는 복음만 확장된다면 고난을 더 많이 받겠다고 한 것이다.

작금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러분은 그 어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바울처럼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이 더 확장되는 일까지는 몰라도 그 고난에 숨겨진 은혜와 권능은 발견하는가? 최소한 발견하려 애는 쓰는가? 아니면 고난이 가면을 쓴 축복이라는 사실만이라도 아는가?

5/1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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