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제 사(四)의 믿음의 자세

조회 수 407 추천 수 5 2009.11.09 23: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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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한 제 사(四)의 믿음의 자세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찌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찌로다.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찌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시104:30-35)


기도하다 죽은 대주교

웨일즈라는 영국 작가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주교가 어느 날 “거룩하신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오냐. 내가 여기 있다.(Yes, here I am!)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큰 음성이 위로부터 들렸다. 대주교는 그만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단순히 우스개로 듣고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 같은가? 넓은 예배당에서 혼자서 철야기도나 새벽기도를 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 죽기까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놀라 기절초풍하고 겁에 질려 벌벌 떨 것이다. 소설의 대주교는 고혈압 같은 지병이 있는 노인이라 충격이 훨씬 커서 죽었겠지만 솔직히 우리라고 그와 별반 다름없지 않겠는가?    

그 소설이 의도한 바는 신자들이 단지 종교적 의무감에 따라 건성건성 기도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것도 일반 주교가 아닌 대주교가 말이다.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정말 제대로 믿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정신적 위로나 도덕적 수양을 위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라도 예배당 같은 신령한 장소에서 전혀 예상치도 않게 갑자기 초자연적 현상을 접하게 되면 크게 놀라고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도란 한마디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그럼 최소한 하나님이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음은 확신하고 기도해야 하지 않는가?

아니 기도란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통해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이지 않는가? 나아가 기도하는 그 자체가 초자연적 현상에 동참하는 것이지 않는가? 물질계의 시공간에 갇혀 있는 아주 미약한 존재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와 서로 교통이 가능하지 않는가?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의 기도에 따라 어찌 우주만물을 창조 운행하는 주권자가 역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얼마나 신기하고 어마어마한 일인가?

오래 전에 한국의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소련이 민주화가 된지 얼마 안 되어 공산주의로 다시 돌아가자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제 겨우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었는데 다시 돌아간다면 큰일이다 싶어서 그 뉴스를 접하자마자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틀 후에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신문에 났다.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응답이 언젠가는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먼 소련 땅에서 한 개인의 문제도 아닌 전국가적 중대사가 바로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자 감사보다 경이가 앞섰다.
  
물론 그 목사님 혼자만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아니다. 전 세계의 신자들이, 특별히 소련 크리스천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다. 또 설령 그 쿠데타가 성공되었어도 이미 자유를 맛본 소련 사람들이 순순히 복종할 리도 없다. 필경 언젠가는 실패할 쿠데타임에는 틀림없다. 나아가 그 목사님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실재와 권능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의심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드린 기도가 응답되면 새삼 놀라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나 너무나 경이롭기 때문이다.  

"Yes, here I am!"  

불신자들은 기도 응답을 우연의 일치로, 또는 신자가 착각했거나 생각을 바꿔 먹은 것이라고 평가절하 내지 무시한다. 그렇지 않다. 우연의 일치란 말 그대로 반드시 우연이어야 한다.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사안들이 정말 아주 희소한 가능성을 갖는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 냈을 경우만 우연에 해당된다. 예컨대 비오는 날 길 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는다든지 골프 치다가 홀인원을 하는 경우다. 평생에 걸쳐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반면에 동일한 요소들이 작용해서 반복해서 특정한 결과가 나타나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동전을 공중에 던져 특정 면이 나올 확률은 분명 50%다. 그런데 백 번, 천 번을 던져도 앞면만 계속 나온다면 사전에 그렇게 의도된 제 삼의 힘이 분명 작용된 것이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기도가 바로 그렇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된다는 뜻은 아니다. 반드시 어떤 필연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우선 기도했던 내용과 연관된 일들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다. 당연히 기도를 듣고 그에 따라 신자의 인생에 개입하는 하나님이 그 배경에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평생 한번 될까 말까한 홀인원만 목표로 골프를 치는 어리석은 자는 없다. 이전에 많은 기도 응답의 체험도 없이 평생 한번 응답만 목표로 새벽마다 교회에 기도하러 가는 신자는 없다.
      
예를 든 소설처럼 신자가 기도하러 엎드리는 순간 하나님은 바로 신자 곁에 무릎을 가까이 대시고 들을 준비를 하신다. 귀에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오냐. 내가 여기 있다.(Yes, here I am!)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다. 우선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신 것 아닌가?

그러나 그분이 신자가 소원하는 내용을 듣고 나서야 판단, 시행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가 아빠에게 다가올 때에 아이가 말을 안 해도 무엇을 원하는지 아빠는 알지 않는가? 또 아빠가 뭣을 원하느냐 구태여 묻지 않아도 그 마음은 이미 그 말을 하고 있는 셈이지 않는가?

만약 모든 신자가 기도할 때마다 그런 육성이 들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 세계에 단 한 명 남김없이 순전히 기도 응답만 받으려고 당장 교회로 다 모일 것이다. 그럼 기도는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는 것이며,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불려 나온 거인 노예가 되어버린다.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이 신자에게 귀 기울이신다는 말은 신자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 그분과 대화하기를 요청하자 그분이 기꺼이 응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신자 쪽에서 먼저 그분과 대화를 열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기도라는 것이다. 신자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은 성령의 감화로만 읽어야 하는데다 이미 하나님이 말씀을 계시해 놓으셨다는 면에서 어떤 깨우침을 얻어도 사실은 하나님 쪽에서 먼저 주도권을 갖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자가 가져야 할 세 가지 근본 자세

이런 맥락에서 신자가 기도할 때에 꼭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세 가지 믿음의 자세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신자가 기도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임재 하시어 그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이다. 신자가 울면 같이 울고, 힘들어 한숨 쉬면 함께 안타까워하신다. 반면에 당신께 감사, 찬양, 경배를 드리면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를 회개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맡은바 소명을 잘 감당하겠다는 헌신의 기도다.

둘째는 어떤 방식이 되었든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이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자신이 소원 내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응답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만의 방식과 때로 응답되었으므로 신자가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다. 따라서 항상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미 기도했던 내용과 잘 연결시켜서 묵상해야 한다. 그럼 아무리 그분만의 방식과 때로 응답되었어도 그 깊은 의미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이 도무지 응답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정욕에 쓰려는 잘못된 기도였음을 깨닫게 해주신다. 물론 신자가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도해도 되고 그래야만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대로 기도할 수는 없다.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자칫 죄와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 잘못된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마저 신자가 깨닫도록 역사하신다. 사실 기도하는 시간이나 횟수보다는 이런 깨달음이 많은 쪽이 더 믿음이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신자의 기도보다 더 현명하고 완전하겠는가? 아니면 어리석고 불완전하겠는가? 삼척동자라도 그 답은 빤하지 않는가? 또 그럴 수 있는 이유도 그분이 신자를 지었고 부모, 친구, 그 본인보다 당신께서 신자를 더 잘 아시고 앞으로 닥칠 인생의 계획을 당신께서 세워 놓았기 때문 아닌가? 비록 그분 응답이 더디거나, 미처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놓쳐도 신자로선 전혀 걱정할 바가 못 된다. 그분의 응답이 완벽함을 확신하고 기도했다면 모든 선한 결과는 사전에 미리 다 보장 받은 셈이지 않는가?

셋째는 더 현명하고 완전한 응답이므로 반드시 신자에게도 유익이 되며 그 주위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다. 사람과 환경과 사건을 통해서도 응답, 간섭, 인도, 계시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지 깨닫기 위해선 단순히 성령의 인도만 기다려선 안 된다.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주위의 형편까지 함께 상세히 살펴야 한다.

나아가 그분의 응답은 궁극적으로 반드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식이 된다. 바꿔 말해 신자의 현실적 형편의 궁핍 혹은 풍요 여부와는 상관없이 응답된다는 것이다. 그럼 신자의 유익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아니다. 신자로선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 주위에 드러나는 것만큼 더 유익한 것이 없지 않는가? 또 그 일을 위해 신자로 부름 받았지 않는가? 만약 이 진술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오직 자신의 현실적 유익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만 기대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밖에 안 된다.      

한 마디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하는 순간 바로 하나님은 임재하여 듣고 계시고, 반드시 응답하시되 더 현명한 방식으로 하며, 자신의 유익과 당신의 영광을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하신다는 점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더 쉽게 말하면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응답이 된다고 믿거나 착각하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되기에 그분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들은 어지간한 신자라면 다 알고 있는 신앙 원리다. 정작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창조의 완성은?

본 시편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에 대해 찬양한 것이다. 유에서 무로 창조한 것뿐 아니라 계속 만물을 다스리고 인생사를 주관하는 그분의 모든 행사를 찬양하고 있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2,3절)라고 먼저 창조사역을 찬양했다. 이어서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10,11절)라고 이 땅을 운행하는 사역을 찬양했다.

그러다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하시는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다 지어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23,24절)라고 하나님이 인간사도 지혜롭게 주장하시되 당신의 영광을 땅에 가득하게 만드신다고 했다. 바로 본문 앞에는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29절)라고 했다. 하나님이 생명의 절대적 주인으로서 죽음도 주관한다는 것이다.

일견 살펴보아도 찬양의 곡조가 하나님의 사역이 창조로 시작하여 인간 역사 가운데 진행됨에 따라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인 본문에 이르기 직전엔 당신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되며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신다고 했다. 세상을 다스리는,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을 아는 백성들로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받게 하는 일을 너무 즐거워하시며 또 그 일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세상 끝 날까지 완벽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결국 그분의 창조의 최종 대상은 인간이었고 그 목적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분은 창조 가운데 인간을 지으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심히 좋아하신다. 따라서 당신의 최종 작품인 인간이 당신을 향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찬양, 경배를 너무나 기쁘게 받으신다.

본문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의 최종적인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이 시편의 마지막 결론이 어떻게 끝나는가?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찌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반드시 이 땅에 죄악이 소멸되고 당신의 공의가 확립된다고 했다. 그분의 통치가 궁극적으로 완성시킬 모습은 당신의 진리와 선하심과 아름다움만이 이 땅에 남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안 이루어질 리는 없다. 그 이전에 하나님의 통치가 죄악을 무한정 두고 보실 리도 전혀 없다. 그분의 다스림에 공의와 사랑이 조금이라도 부족할 리가 있겠는가? 특별히 당신이 택하시고 당신의 독생자의 목숨과 맞바꾼 신자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심에 어떤 하자라도 있겠는가? 나아가 단순히 신자들의 일신상의 안전과 평강만 주기 위해 성자를 죽이기까지 하며 구원을 베푸셨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바꿔 말해 하나님은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되 반드시 신자를 통해 이루신다는 것이다. 정치가와 사업가와 지성인과 종교인들이 그 일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먹고 마시는 일을 다스릴 뿐이다. 물론 그런 일 조차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 아래 있다. 죄악을 멸하여 거룩하게 바꾸는 것은 오직 신자에게만 맡겨졌고 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요컨대 이 세상 전체가 앞으로 나아갈 궁극적 운명을 신자에게만 위임시키셨다.

믿기지 않는가? 아니 믿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 삼았고 또 인간과 교제하기를 가장 기뻐하시지 않는가? 그러면 그분을  끝까지 완악하게 배역하는 자는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맛볼 수는 전혀 없지 않는가? 불신자들은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일만 보장 받았을 뿐 그 외 그분의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보호, 인도, 간섭을 받지 못하기에 평생을 두고도 그분의 영광을 맛볼 수는 전혀 없다. 그분의 영광은 오직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이제 기도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제 4의 믿음의 자세가 확실해졌다. 하나님이 이 땅을 아름답고도 거룩하게 다스리는 일에 적극적 자발적으로 동참하고자 하는 소망과 헌신이 따라야 한다. 자신을 통해 드러날 그분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이 땅을 선하게 바꿀 책임이 있음을 절감해야 한다. 그 일에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바치겠다는 고백과 헌신과 실천이 기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물론 불신자들이 갖는 단순한 정의감과는 전혀 달라야 한다. 그들은 오직 인간적 의지와 감성과 능력에만 의지하지만 신자는 이미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 속에 붙들려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아니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이 땅에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반대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는 열쇠를 이미 맡았는데 바로 그 열쇠를 작동시키는 것이 기도다. 이 땅을 누르고 조종 농간하고 있는 음부의 권세는 신자의 기도를 통해  무참히 무너지게 되어 있다.    

어쩔 수 없어 나설 하나님

다시 처음 예를 든 소설로 돌아가 보자. 기도 중에 “Yes, here I am.”이라는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도 너무 놀라 죽어버렸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믿지 못했다. 이에 비해 기도를 통해 자신의 평안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이 땅에 죄악을 없애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게 만들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과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지 않는가?

기도하면 바로 하나님이 귀를 기울인다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응답이 된다든지, 궁극적으로 신자의 유익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까지 믿는 신자는 많다. 그러나 솔직히 따지면 여전히 그런 믿음을 자신의 일과 주변에만 적용시키고 치운다. 기도 내용도 마찬가지다. 이 땅을 변화시켜서 창조를 완성시키는 일과는 잘 연관시키지 못한다.  

이 시편의 기자를 보라. 창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을 확신하고 찬양을 드렸다. 기도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을 소망하는 작업이라면, 찬양은 사실상 이미 이뤄진 일을 두고 칭찬하는 작업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당연히 그분의 권능으로 이뤄지고야 말 것이라는 뜻이다. 그분의 그분다움을 온전히 확신하기에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이전에 이미 찬양을 드렸지 않는가?

물론 눈에 보이는 현실에는 여전히 죄인이 형통하고 흑암의 세력이 크게 위세를 부릴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시적으로 그럴 수 있을 뿐이다. 또 신자의 생전에 반드시 악이 보응을 받는 모습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이 땅을 하나님이 절대로 그냥 그렇게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재림해서라도 반드시 새롭게 하시지 않는가?

그럼에도 신자가 악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은커녕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덜 하는 만큼 세상도 덜 아름다워질 것은 틀림없지 않는가? 신자가 세상과 죄악과 사탄과 죽음 앞에서 기가 죽는 만큼 그것들이 더 기세등등하게 설칠 것 아닌가 말이다. 또 그만큼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더 위축되고 영광이 덜 드러날 것 아닌가?

그럼 하나님 당신이 상황에 따라 수축되는 분인가? 절대 아니지 않는가? 신자를 통해 당신이 드러나지 않으면 당신은 역사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분은 죄인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감춰져 있지만 신자에게는 기도만 하면 당신을 내보이신다. 불신자에게 감춰진 그분을 보이게 할 책임이 신자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신자마저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면 세상에 비췰 그분의 빛도 줄 수밖에 없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신자를 통해서만 움직이신다. 작금 신자들이 오히려 세상에 지고 불신자에게 주눅이 들어 있으니 그 결과는 빤하다. 세상 죄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신자가 힘이 빠진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분이 어쩔 수 없어서, 사실 이 말은 큰 어폐가 있지만 순전히 이해하기 쉽게 사용했을 뿐임, 직접적으로 간섭하시는 모습은 셋뿐이다. 엄청난 재앙의 모습이거나, 큰 부흥의 역사가 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예수님의 재림이다. 물론 그 중 어느 것이 될지 또는 복합적으로 나타날지는 어떤 신령한 신자라도 도무지 알 수 없다. 그저 신자들이 이 땅을 안고 더더욱 기도하는 수밖에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애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5/31/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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