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의 기적은 한 번뿐이었다.

조회 수 414 추천 수 9 2009.11.10 18: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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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의 기적은 한 번뿐이었다.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스 8:21-23)



이상한 기도 내용

하이티의 12살짜리 한 소녀가 발목이 비틀어져 굽다 못해 발바닥이 아니라 거의 발목으로 걸을 정도였다.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그 불쌍한 소녀의 발목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발목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발목은 수술로 얼마든지 교정이 가능한 상태였기에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렇다고 수술비가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자원해서 수술해주겠다는 의사도 물색해 놓았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가 부두교를 믿어서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는 것을 극력 반대 했던 것이다. 부두교는 서인도제도에 성행하는 미신적 종교로 악령에 산 닭을 모가지를 비튼 채 바치며,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침을 꽂아 저주의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행태로 유명하다.

그 소녀는 전도를 받아 이미 크리스천이 되었고 교회에도 출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예수를 서양 귀신으로 몰아세우고 완강하게 수술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현대 의술보다는 부두교의 주술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소녀가 일차 수술이라도 받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했더니 3일 만에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었다.  

대체로 우리는 어떤 문제나 환난이 닥치면 빨리 문제를 해결해주고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만 한다. 예의 소녀 같은 경우도 하나님이 역사하여 발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주로 한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적으로 간섭해달라는 뜻이다.

반면에 현실적 해결책을 위해 기도하면 마치 신앙이 모자란 것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신자는 그래선 안 되는 아주 큰 잘못인양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반드시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과 역사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비롯해 모든 인간적 수단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인간 스스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부지기수로 많다. 이 소녀의 경우도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불구 같아도 수술만으로 쉽게 나을 수 있는 질병이었지 않는가? 예컨대 급성 맹장염일지 모르는 극심한 통증이 오는데도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당장 병원으로 뛰어가야 한다. 대신에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정확히 진단해서 올바른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혹시 수술해야 한다면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간섭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때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만 바라보아야 할 때가 있다. 도무지 현실적 수단이 바닥난 말기 암 같은 경우다. 또 그러면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치유시켜 주실 때도 있다. 정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올가미에 갇혔을 때에는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더 있는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은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고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어서 가만있으면 어차피 칼에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을 때에 일어났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항상 홍해의 기적 같이 응답해 주기를 바란다. 사방이 막히지 않고 훤히 뚫려 있는데도 그렇다. 어느 한 쪽이라도 뚫려 있다면 그곳으로 나가면서 당신께서 보호 인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여러 곳이 뚫려 있다면 어느 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지 자신의 경륜과 지식을 동원해서 차분하게 비교 분석해야 한다. 이때는 편견, 선입관, 고집, 욕심, 죄가 개입하여 섣부르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또 혹시라도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라도 하나님이 개입하여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면서 인간으로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주도적으로 다스리도록 위임하셨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자유의지와, 짐승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한 지정의를 주셨다. 물론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각기 고유의 기능과 역할을 맡기셨다. 그리고 그 피조물 전체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근본적 법칙도 내재시켰다.

하나님이 세상이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선 완전히 손 놓고 계시다는 뜻이 아니다. 만드신 만물을 통해 만물을 운행하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청지기 소명을 맡긴 인간을 통해 매사를 이루신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몽땅 다 해달라는 식의 우리의 기도대로 이뤄진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고급한 지정의를 줄 필요가 전혀 없지 않는가?

말하자면 이미 세상에 형성된 모든 것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에 그 가운데서 그분의 역사는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분이 적극적으로 직접 개입하시거나 간접적으로 묵인하시거나 간에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만물 그 중에서도 인간이다. 심지어 순전히 인간의 탐욕과 죄악에 따라 이뤄지는 일 가운데도 그분만의 궁극적 영광은 반드시 드러난다.  

에스라의 배짱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 때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귀환이 이뤄졌다.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 바칠 은금, 밀, 포도주, 기름, 소금 등을 많이 하사하였고 유대인들도 각도에서 모은 것들을 갖고 가도록 허락했다. 말하자면 수많은 재물을 바사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거리를 운반해야 했다. 당연히 도적과 강도의 위험이 따를 판이었다. 인솔 책임자 학사 에스라는 아화로 강가에서 일행과 함께 삼일 간 금식을 선포하며 앞으로의 여행길을 위해 기도했다. 강도와 도적의 위험에서 지켜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기도 가운데 특이한 내용이 나온다.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아닥사스다 왕의 호위 군대를 붙여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했거나 얼마든지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모든 것 내려놓고 맨손으로 하나님의 전적 도움만 바라본 것이 아닌가? 위에서 설명한 내용과는 달리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을 기다린 것 아닌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홍해 같은 기적은 인간이 취할 수단이 완전 소진되었을 때에 일어난다. 사방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상태인지라 하늘로 떠올리거나 한 쪽 벽을 하나님이 무너뜨릴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다. 말하자면 홍해 같은 기적은 이스라엘 역사에도 딱 한 번뿐이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물이 갈라졌고, 여리고 성을 7일 간 침묵하며 돌았더니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무너진 사건들이 있지 않는가라고 의아해 할 것은 없다. 홍해와 그 사건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결과적으로 일어난 모습은 모두 초자연적 기적이 맞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요단강 도하나 여리고 함락은 홍해처럼 사면초가에 갇혔던 것과는 다르다. 선택의 여지가 많았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먼 거리로 우회하거나 물이 완전히 마를 건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다. 또 여리고 대신에 다른 성부터 공격하든지 아니면 전통적 전투 방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어쩔 수 없어서 가만히 손을 놓고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확신한 후에 자기들이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서도 전쟁은 여호와께 달렸다고 했지만 직접 전투를 치른 자는 다윗이었지 않는가?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기도하거나 가만히 서있는데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와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몰매 돌을 골리앗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전쟁이 여호와께 달렸다는 것은 궁극적 승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리라 확신했기에 자기가 지금부터 전투에 당당히 임하겠다는 뜻이다.

에스라의 경우도 만찬가지다. 호위병을 붙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사방이 막힌 것과는 다르다.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다.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호위병을 붙여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이방족속 앞에서 여호와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보호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큰소리 쳐놓고는 현실적 보호책을 강구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에스라의 평소의 확신에 찬 신앙이나, 최소한 배짱이 두둑한 담대한 기질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달라고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한 연후에 그분께 받은 응답이었다. 에스라도 예상 되는 위험이 너무 두려워 기도하는 중에 “너희가 그 동안 바사 왕과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만 의지한다고 큰소리 쳤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라는 어쩌면 바사 왕에게 부탁해 호위병을 붙여 달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여부를 두고 기도했다는 뜻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너희들 스스로 나의 권능을 그만큼 자랑해놓고 이제는 나의 영광에 누를 끼치려 드느냐?”고 질책 섞인 깨우침을 주신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고 분명히 그런 뜻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체면이나 위신이 구겨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체면, 위신, 자존심 같은 것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런 개념은 반드시 비교될만한 다른 대상, 특별히 경쟁자가 있을 때 적용된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유일한 절대자다. 그분에게 비교될 대상은 전혀 없기에 오직 거룩과 영광만이 그분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본질이다.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페르시아 호위병을 붙이든 안 붙이든 혹은 강도가 모든 것을 강탈해 가고 일행이 다 죽더라도 그분의 그분다우심만은 아무 손상됨 없이 그 사건 안에 있다. 심지어 아무도 그 영광을 보지 못하고 이해는커녕 추측조차 못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기도의 응답은 첫째는 그분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되는 것이어야 하며, 둘째는 그와 동시에 궁극적 승리는 그분만 주관하신다는 확신을 다시 붙드는 것이어야 한다. 특별히 환난 때에도 예외는 없다. 그 환난에서 구원을 받든 못 받든 그래야 한다.

에스라도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호위병 대동 여부와는 상관없이 당신의 영광을 소망하라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특별히 이방족속에게 큰소리 친 것이 절대 거짓이 아님을 그분께서 보여주시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행동으로 나섰던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공짜로 받아먹으려 들었거나 똥배짱으로 무조건 밀고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응답을 듣고도 가장 값나가는 금 그릇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제사장 두목들에게 맡겼다.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대안 가운데 최선을 선택해 행동으로 옮겼다는 뜻이다.

환난은 환난이다.
  
우리의 기도도 에스라와 같아야 한다. 정확히 말해서 신앙으로 행하는 모습이 그래야 한다. 문제나 환난이 닥치면 그 당장에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당연히 매달려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혹은 기도했으니까 완전히 해결해 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과 해결책을 가르쳐 주거나 그 길로 인도해 달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전자는 그야말로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만 하는 기도여야 한다. 말기 암에 걸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말기 암이란 평생에 한 번 걸릴까 말까하는 경우다. 아니 대다수가 사실은 걸리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환난, 즉 불신자나 신자나 구분 없이 누구나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환난에도 이런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하나님더러 내 배를 째라는 똥배짱이다.

물론 실제로 우리가 일상 체험하는 환난도 위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주 힘들고 고달프다. 그 원인이나 앞으로 진행될 과정이나 어떻게 결말날지 완전 오리무중이다. 문제 위에 더 큰 문제가 첩첩산중으로 쌓이기만 한다. 원인만 알아도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더더욱 힘들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교회 중직을 맡고 있어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담대하게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 그분만 바라보는 소망을 키워보려 들지만 갈수록 일이 꼬이니 오히려 힘만 빠진다.

원인은 딱 하나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 그분만 바라보고 완전히 손 놓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분이 나서서 다 해결해 주기를 바라니까 그렇다. 믿음은 반드시 믿음에 찬 행동을 요구한다. 그것도 신자가 목숨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바치며 순종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신자가 정작 기억해야 할 믿음의 진리는 이것이다. 진짜로 우리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는 홍해 때처럼 반드시 그분이 직접 나선다. 그러나 일상사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지 않는가? 일반적 환난에선 구태여 목숨까지 던질 필요가 전혀 없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신자는 다른 모든 일에는 마땅히, 기꺼이, 담대하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환난을 하나님이 해결해주기보다는,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지혜 내지는 이겨낼 믿음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 대책을 언제든 수행할, 신앙적 용어로 순종할 각오와 준비가 미리 갖춰져 있어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범사의 배후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절대적이고도 거룩하신 주권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그분께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고 당신의 궁극적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 하나만은 절대로 붙들어야 한다.    

따라서 환난 가운데 신자가 오히려 먼저 구할 것은 환난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깨닫게 해달라는 것이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이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든, 심지어 더 큰 고난이 겹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꺼운 소망이 따라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일에 자기가 온전히 쓰임 받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해결책에 대한 지혜가 생기거나 어떻게 행하라는 분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본문의 에스라나,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의 여호수아처럼 말이다.

실제 삶에서 환난과 맞서서 싸워 이길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결국은 신자다. 물론 그분이 궁극적 승리를 보장해 주신다. 그러나 환난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신자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홍해 같은 역사상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는 인간을 통해서, 특별히 신자의 믿음에 찬 반응을 통해 이루신다.

그래서 믿음이란 일종의 배짱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으니 기다리고 본다는 배짱이 아니다. 그렇게 기도했고 또 기도 중에 그분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했으니까, 해결책에 대한 지혜마저 얻는다면 금상첨화지만, 일단은 환난과 맞서서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보는 배짱이다.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는 배짱이 아니라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여 행하는 배짱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종과 횡으로 행하라 그러면 보이는 땅을 모두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종이든 횡이든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리 멀리 넓게 봐도 땅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자가 실제로 차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도나 예배도 현실과 맞부딪히려는 임전 태세를 갖추는 준비 과정이다. 절대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나 예배로 하나님이 바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지 신자를 통해 하나님이 움직이려는 준비는 갖추게 할 수 있을지언정 말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가 행동으로 나설 때 함께 움직이신다는 것이다.  

현실을 도외시한 신앙은 아무 능력이 없다. 그 영성이 자라지도 않는다. 환난이나 문제에 현실적으로 최선의 수단을 찾아서 과감히 맞서야 한다. 불신자는 자기 혼자 해결하려 덤비지만 신자는 그 자리에까지 이르게 했으며 또 먼저 앞서 가서 행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해결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누군가 말한 대로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한 후에는 모든 일이 자기에게 달린 것처럼 나서서 열심히 행해야 한다.  

환난 때에 기적적 구원을 바라며 기도한다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기도 자체가 기적을 부르는 능력을 지닌 셈이 된다. 대신에 죽든지 살든지 오직 그분 뜻대로 따르겠다고 한 발자국이라도 옮겨 놓아야 한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해결할 지혜가 생기거나, 일이 술술 잘 풀리게 된다. 홍해는 안 갈라지더라도 여리고의 무너짐이나 요단강의 갈라짐은 언제라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정반대로 현실적으로 모든 것이 망할 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도 그분의 영광은 드러나며 자신의 영혼이 오히려 더 풍성해지는 것은 분명 체험한다. 요컨대 신자가 망해도 하나님은 흥하는 것 이상의 기적은 따로 없다는 확신이 없이는 아무리 기도해도 환난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이다.  

9/2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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