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빨리 응답된 기도

조회 수 569 추천 수 15 2010.11.12 0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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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빨리 응답된 기도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눅7:9,10)


로마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유대인 장로들이 대신 와서(*) 예수님께 고쳐주기를 간구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은 이미 강건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백부장을 칭찬하신 바로 그 순간에, 최소한 장로들이 돌아가는 중에 이미 병이 나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도하자마자 곧바로 응답을 받은 셈입니다. 이삭의 신부 감을 구하러간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와(창24:15) 함께 성경에서 최고로 빨리 응답된 기도였습니다.      

참으로 부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정말 새벽마다 눈물로 울부짖으며 끈질기게 기도했는데도 감감 무소식일 때가 많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분석하려고 기도에 관한 책들을 구해 열심히 연구합니다. 성경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선하고 거룩한 기도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본문 같은 모범사례를 세밀히 분석합니다. 그래도 여전합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만 최대한 빨리는 몰라도 최소한 꼭 필요할 때에라도 응답받을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정답은 한마디로 “없다”입니다. 그 이유가 꼭 우리 믿음이 약하거나 기도하는 열의와 갈급함이 약해서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당신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간절히 기도한 것과는 별개로, 일치하든 안 하든 간에,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만 인생만사를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융통성이라곤 전혀 없는 독재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환난 중에 신음하는 우리를 보시고 그분이 더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그분만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신자에겐 너무나 유익하며 당신의 영광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로 신자의 기도를 대하긴 하지만 당신께서 더 기뻐하는 기도도 분명 있습니다. 성경 기록을 통해 그 특성들을 세밀히 살펴 배우고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 예수님이 칭찬하신 그대로 백부장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흔히 “좋은, 견고한, 강한, 담대한” 등으로 묘사하는 믿음의 실체가 사실상 없거나, 흐릿하거나, 아니면 다 같은 상태의 믿음을 두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직 그분을 믿는 혹은 믿으려는 의지력을 세게 만드는데 초점을 둡니다. 종교 행위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일종의 결단력 내지 그렇게 하면 응답이 빨리 된다는 신념 말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좋고 강하다고 말하지 않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잘못된 믿음이거나, 그 내용은 정상이되 유별난 모습을 띈 믿음이 아닙니다. 단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이 잘못되었거나 약한데 반해 그의 믿음만 정상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흔히 찾아보기 힘든 믿음인데 아마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재중(不在中)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너무 잦으니 아직도 기이한 믿음에 들지 못한 꼴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께 이 세대에 보기 드물 정도의 기이한 믿음이라고 인정받으면 자동으로 기도 응답이 잘 될 텐데도 우리는 응답 잘되는 방법만 찾으려 듭니다.

그럼 백부장의 믿음은 대체 어떤 면에서 우리와 달리 기이한 것입니까?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라는 고백에 그 실체가 완연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선 그가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병을 낫게 하는 권능을 가졌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런 믿음은 갖고 있습니다. 아직은 기이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또 유대민족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제를 금하는 율법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고 하면서 유대인인 예수님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했습니다.  

그럼에도 집에 오지 말라는 것은 병을 고치려고 구태여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자기 고백을 실제 행동으로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주 먼 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낫는다고 온전히 믿은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간구하지 않고 다른 이가 대신 해주어도 그럴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만약 그런 온전한 믿음 없이 단지 이방인 교제에 대한 유대 랍비의 입장만 고려했다면 그 말이 달랐을 것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큰 결례가 됨을 알지만 꼭 오셔서 안수하여 고쳐달라고 말입니다. 또 그러려면 당연히 다른 이를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찾아 왔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눈물로 외치면서 오랫동안 뜨겁게 직접 기도해놓고도 일어서는 바로 그 순간 응답되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이 서서히 밀려들지 않습니까? 예컨대 야외 예배 하는 날 잔뜩 흐려있으면 비오지 말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도 우산부터 챙겨서 나가지 않습니까? 광풍을 만난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배를 가볍게 하려고 모든 식량을 생환에 방해된다고 바다에 던진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백부장의 믿음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그치면 말 그대로 “강한 믿음”만 됩니다. 자칫 맹목적, 광신적 믿음으로 흐를 소지가 생깁니다. 믿고 기도했으니 미리부터 무조건 받은 줄로 믿는 믿음 만능주의가 됩니다. 그의 믿음은 그런 단순한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手下)에 있어 봤으며 자기 아래에도 사람이 있는데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온다.”고 했습니다. “주님 말씀만 하십시오. 그 뜻대로 따르겠습니다.”라는 우리의 잦은 고백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우리 대부분의 종교관행적 수사(修辭)와는 달리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전적 헌신이 따랐습니다.

고대 사회의 종이나 군대의 부하는 주인과 상관의 말에 절대 복종합니다. 그 명령의 진위나 정당성 여부를 결코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은 오직 상관의 뜻에 달렸을 뿐입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뜻과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있으면 아예 안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낫게 해주시지 않더라도 아무런 불평, 의심, 불신이 저에겐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살든지 죽든지 저는 그 말씀대로 행할 뿐입니다.”

앞에서 비오지 말라고 간절히 기도해놓고 우산을 챙기는 것이 우리 믿음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실망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어지간히 믿음이 좋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자연현상을 기도하여 다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자체가 오히려 잘못된 믿음입니다. 자연현상이 아니라도 자기 기도한 대로 다 이뤄진다고 믿는 것도 성숙한 믿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산을 들고 나가는 우리의 마음 상태입니다. 혹시 비오면 큰일이다 싶어 염려하는 것과 그렇게 기도했어도 비가 온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며 그래도 야외 예배가 더 은혜롭게 진행되거나 최소한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비가 오면 절대 안 된다, 또 기도한 대로 응답해 주지 않는 하나님이 달갑지 않다는 것이 그 속마음입니다. 또 응답 안 되는 것을 전제로 스스로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했습니다. 기도하는 목적이 오직 자신의 형통과 안일만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와 (거의) 동일한 모습입니다. 주님도 성부 하나님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었습니다. 기도한 대로 안 되어도 하나님의 뜻과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며 또 드러나야만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기도로 이루어야 할 궁극적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였습니다.      

본문의 사건에서도 이 두 부류의 믿음이 극명히 대조됩니다. 성경 기록이 얼마나 정미한지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 대신 온 유대장로들은 예수님께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기에 그의 간구를 들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에 대해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들으면서 함께 걸어갔을 뿐입니다. 그러다 저도 남의 수하에 있는지라 말씀만 하시옵소서라는 백부장의 말을 전해 듣자 비로소 기이한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유대 장로는 예수님의 기도응답과 주고받는 식의 거래 조건으로 백부장의 선행을 들이댄 꼴입니다. 또 어쩌면 백부장이 회당을 지어주었으니까 장로들이 직접 신세를 진 셈인데 예수님더러 대신 갚아달라는 속내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위해 이런 좋은 일을 했으니 마땅히 보상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백부장이 평소에도 믿는 그대로 실천하는 자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말씀만으로 나을 것이라는 그의 고백도 결코 허위, 가식, 미성숙, 맹신이 아니라 진정, 순수, 성숙이라고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에 보기 드문 믿음을, 그것도 이방인 중에서 발견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나 되는 사람이 종의 병 고침을 위해 유대인들을 동원할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로는 정말 기행(奇行)이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고 또 평소 신앙인격이 여실히 드러난 일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최고로 빨리 응답된 아브라함의 종과 백부장 기도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또 우연치고는 너무나 신기하게 구약성경에선 종이 주인을 위해서 기도했고, 신약성경에선 주인이 종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런 신기한 우연이 생기고 또 성경기록으로 남긴 것은 하나님의 계획임이 거의 확실합니다.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섬기러 오신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특별히 신자가 타인을 중보하는 기도에, 그것도 높은 이가 낮은 이를 위해 드리는 기도에 더 크게 역사하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만약 유대장로들이 그에 평소 행적에 대한 언급 없이 단지 대신 간구만 했다면 그의 믿음도 자칫 입술로만 주여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제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나 막상 “제 뜻” 대신 “주님 뜻”대로만 되면 얼마나 실망하고 심지어 원망 불신까지 합니까?  

반면에 백부장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당신의 권능을 철두철미하게 믿었습니다. 정말로 말씀만으로 고칠 수 있는 구세주 하나님임을 믿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고치시든 안 고치시든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또 그보다도 더 좋은 믿음은 평소에도 자기 믿은 그대로 삶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의 요체는 주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의 유일한 길이자 진리라는 절대적 신앙입니다. 또 당연히 그 믿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다른 이의 기도를 통해 주님이 말씀만 해도 나을 수 있다고 믿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순순히 따를 것이며 주님의 영광도 변함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실은 믿음의 본질 아닙니까? 거기다 오늘날 성경을 잘 알고 본문 사건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도 이런 믿음을 보기 힘드니 이야말로 더 기이한 일 아닙니까?

10/16/2010

(*): 마태복음 8장에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나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백부장이 장로와 벗들을 보내어 말을 전하도록 한 것이 본인이 나온 것과 같다고 간주한 것 같습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한다고 두 저자가 공히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또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라고 부연했습니다. 만나지 않고서도 말씀만 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기에 본인이 온 것이 아니라는 누가의 기록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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