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분별력의 본질

조회 수 1099 추천 수 6 2012.06.04 18: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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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분별력의 본질
(조급증도 큰 죄다. 시리즈 9)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强請)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면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5-13)


믿음과 행동이 다른 신자

오래 전에 나온 짐 케리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 Mighty에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신의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권세를 받은 케리는 매일 컴퓨터에 올라오는 기도 제목에 응답을 해준다. 그런데 복권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너무 자주 많이 올라왔다.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아서 전부를 한 번에 클릭해 “yes"라고 답했다. 그 결과 일등이 수십만 명이 나왔고 상금도 일인당 겨우 몇 불밖에 배당되지 않아 사람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가상적 코미디이긴 해도 암시하는 바가 결코 가볍지 않다. 신자가 되어서도 현실적인 대박 행운을 바라며 또 그렇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들 전부가 엄격한 의미의 신자는 아니라 해도 신을 믿고 신께 기도한다는 면에서 완전 불신자 또한 분명 아니다. 결국 사람들은 기도를 자기 원하는 무엇이든 신의 능력을 동원해 이뤄내는 수단으로만 간주한다.

과연 크리스천들은 그 영화와 자기는 아무 상관없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아니 아예 영화처럼 믿고 행하는 자가 꽤 되는 것은 아닐까? 거기다 성경적으로 틀렸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는 신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틀렸다는 사실을 짐짓 부인하거나 잠시 잊고서 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삶에 드러내는 일에 인간 본성이 얼마나 끈질기게 반대편으로만 향하는지 모른다. 엄연히 성경적 진리임을 잘 알고 믿고 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일이 그에 반하면 주저 없이 눈가리개를 차버린다.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거나, 잘못인줄 알면서도 어떡하든 그에 적절한 핑계를 마련한다.

지금 단순히 복권 당첨을 위해 기도해선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지간한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기도할 때에 자기가 소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에게만 해당되는 진리다. 자기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하나님이 꼭 들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영적인 일마저 자기와 남에게 적용하는 잣대가 달라진다.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죄의 출발이 된 자기중심적 본성이 영적인 일에도 작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주님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 가르침대로 행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인간 예수로서 십자가 처형의 극심한 고통을 피하고 싶어 혼신을 다해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했었어도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면 순종하겠다고 했다.

이 두 성경 구절을 모르는 신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자기가 기도한 것은 무엇이든 꼭 이뤄져야 한다고 고집한다. 거기다 어떤 이들은 그런 고집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아주 좋은 믿음이라고 부추긴다.

강청하면 다 응답되는가?  

기도의 핵심 원리마저 오해 내지 오용(誤用)하는 이런 부조화는 왜 생기는 것일까? 신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리는 없다. 예수님이 틀린 말씀을 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모순이 생기는 까닭은 우선 예수님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선 무엇이든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처럼 가르쳤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신자들로선 두 가르침 다 맞지만 이왕이면 자기들 편의에 맞고 마음에 드는 가르침 즉, 무엇이든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쪽을 따르기로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비교적 양심적인(?) 신자들은 무엇이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다 응답하신다는 쪽을 믿자니 아무래도 조금 찜찜하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은 것이 못내 걸리는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궁지에 빠진 신자를 건져주는 구원투수처럼 본문이 등장한다. 원하는 모든 것을 기도로 다 응답 받으려니 뒤통수가 조금 댕겼었기에, 기도한다고 다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끈질기게 기도해야만 응답된다는 식으로 기도에 대한 인식과 적용을 조금 고급스럽게(?) 수정하는 것이다.

그 속내는 실은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는 정성과 열심을 하나님도 잘 봐주시겠지 기대하는 것뿐이다. 정성과 열심에 비례해서 보상하는 것은 이방신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죽으신 의미가 인간들의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당신께서 죽기까지 철저하게 알려준 것이지 않는가? 단지 끈질기게만 기도하는 것이 응답의 기준이 된다면 믿음과 기도는 인내력 내지 의지력 싸움 밖에 되지 않는다. 천성적 기질이 의지가 강한 자만 복을 받는 것이며, 또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부터 그런 자들만 편애한 셈이 된다.  

신자들이 흔히 갖는 또 다른 오해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방식 자체를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중요한 가르침, 심지어 그분의 뜻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끈질기게 기도했으니 남은 것은 응답받는 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했다. 기도하는 방식 자체가 그 나라와 의가 아니다. 기도에서 내용이 먼저이지 방식은 이차적 문제일 뿐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순전히 자기 편한 대로만 해석 적용하는 너무나 머리 좋은(?) 신자들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먼저 비유를 들어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 가르쳤다. 그 비유 내용이 밤중에 무턱대고 친구를 찾아가 필요한 것을 요구한 것인데다 주님이 벗 됨을 인하여는 거절해도 강청하면 들어준다는 해석까지 곁들였다. 그러니 끈질기게 기도만 하면 무엇이든 응답해 준다고 오해할 만하다.

예수님은 일상생활 가운데 쉽게 접하는 물건이나 일들로 비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의 청중으로선 자주 겪는 사안으로 아주 익숙한지라 어떤 상황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먼저 당시 서민의 가옥은 방이 여럿 있지 않고 One-room 스타일로 아이들과 함께 기거했다. 밤중에 문을 자꾸 두드리거나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면 아이들이 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친구가 구한 것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친구가 밤 늦게 찾아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 이웃의 친구를 찾아간 것이다. 당시는 여행객을 대접하고 재우는 것은 기본적 예의였다. 밤중에 먹을 것을 찾을 정도면 그 여행객이 끼니를 굶어 아주 시장했었는데 마침 집안에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음을 뜻한다.

거기다 그냥 달라고 하지 않고 세 덩이만 꾸어달라고 했다. 친구 사이에 떡 세 덩이가 남아있다면 주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니 어서 빨리 주어서 보내야 할 것이다. 구태여 강청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벗됨이 아니라 강청함으로 들어준다.”는 일차적 의미는 “구태여 친구가 아니라도 모든 상황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무엇보다 강청하는 내용이 다른 이를 위한 선한 일이었다. 또 밤중에라도 구해야할 만큼 긴급하고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나아가 평소에 먹을 것을 서로 꾸어주고 받을 만큼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친구는 꼭 필요한 세 덩이만 구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은 “소용대로” 주신다고 했다. 비유가 함의하는 이런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신자가 어떻게 기도해야 옳을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신자가 하는 모든 기도를 다 응답하지는 않는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과 평소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신자가 당신이 보시기에 선하거나 꼭 필요한 것을 구하면 응답하신다. 또 그런 기도 제목이라면 응답 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따라서 강청함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기도하는 자의 열성이나 정성보다는 끝까지 기도를 지속할 수 있는 근거나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강청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이데이아는 건방짐과 끈질김의 두 가지 뜻이 있다. 밤중에 친구를 찾아갈 만큼 뻔뻔스럽고도 염치없음을 말한다. 또 떡을 얻을 때까지 문들 두드리는 끈질김이다. 언뜻 끈질기게 기도만 하면 응답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신자의 기도 제목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일말의 부끄럼이나 가책 없이 당당하게 끝까지 간구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저자 누가가 지금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눠 기록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2-4절은 주기도문으로서(마태의 기록에 비해 조금 생략되었지만) 하나님이 바라는 기도의 모범 즉, 신자의 기도에 꼭 포함되어야 할 내용과 기도하는 순서를 가르쳤다. 둘째 5-8절은 살펴본 대로 비유를 통해 기도할 내용과 태도에 관해 말씀하셨다. 마지막 9-13절은 일련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 격으로 하나님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그 열매에 대한 말씀이다.  

먼저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 “두드리는 이”가 응답 받을 것이라고 한다. “구하는 것마다”, “찾는 것”, “두드리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기도하는 내용과 대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다. 쉽게 말해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강조하셨듯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되라는 것이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가 신자의 호흡이 되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오는 앞선 비유의 해석이다. 또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해석했다. 아비는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절대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을, 알을 달라하면 알을 준다고 말하지 않았다. 구하는 것을 그대로 주지 않았다. 나쁜 것은 절대 주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악인이라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을 준다고 한다. 당연히 천부께선 더더욱 그러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구하는 아들 즉, 신자의 판단력보다 아버지 즉, 하나님의 그것이 훨씬 더 정확하고 좋다는 것이다. 신자가 잘못 구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잘못된 것은 주시지 않고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신자에게 유익한 것은 하나님이 더 잘 아시고 기도한 대로보다 더 유익한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세 가르침의 최종 결론인 13절 후반부를 주목해야 한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는 자”라고 여전히 사람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마태는 동일한 기록에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는데, 누가는 “성령”이라고 말한다. 기도하는 이마다 각기 그 제목이 다 다를 것인데도 응답은 한 가지 성령이다. 모든 기도자에게 성령을 다 주신다는 뜻이다.

그럼 신자가 기도를 통해 반드시 받아야할, 다른 말로 가장 중요한 응답은 바로 성령이 된다. 기도하는 목적 자체가 성령 받는 것이다. 문제는 신자에게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있기에 따로 받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기도의 시작에서 끝까지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는 것이다. 비유에서 살펴본 대로 아들이 잘못 구하지 않도록 판단할 수 있는 진리의 영을 주신다는 것이다. 또 그 응답도 성령의 열매로 맺혀질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 내주하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하게 될 것이다.

결국 신자가 강청함의 기도로 얻게 되는 것을 예수님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라고 말하는 셈이다. 역으로 말하면 신자는 이런 열매를 얻기 위해서 끈질기고도 당당하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강청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우리의 인식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

서두에서 지적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하라고 하면서도 무엇이든 구하라고  했기에 언뜻 상충되는 가르침 같다. 하나님 말씀이 서로 모순될 리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해석 적용해야 하는가? 둘 다 맞기에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면 되는가? 말하자면 종교적 도덕적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현실적 일은 무엇이든 자기 원하는 대로 기도하면 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으니 일단 종교적인 측면을, 주로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일들이겠지만, 먼저 기도한 후에 자기 소원을 전부 아뢰면 되는가?

성경에 무엇이든 기도하면 응답해준다는 말씀에는 반드시 어떤 전제가 붙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榮光)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이 말씀의 바로 앞뒤에도 “그리스도 안에서”가 나타난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12절)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고 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을 따라 하고 그분을 사랑하여서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고 또 그대로 응답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 뜻대로 구해야 하고, 무엇이든 구하라는 말씀을 별개의 독립된 구절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라는 진술은 “무엇이든 구하는 것”의 범위를 제한한 것이다. 따라서 둘을 합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무엇이든 구하라”가 바른 해석이자 적용이다.

혹시라도 하나님 뜻을 먼저 구하고 나머지는 무엇이든 강청하는 기도를 하여서 응답 받으면 된다고 여겨도 안 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자신의 삶과 인생에 나타는 여러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없기에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꼭 필요한 일용할 양식은 당연히 구해야 한다. 문제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다 응답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다.  

본문의 비유에서 강청함의 기도에 성령의 열매로 응답한다고 해서 현실 문제를 기도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신자는 그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단순히 어려움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길 소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 또한 신자가 기도한 대로가 아닌 당신의 영광이 반드시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후에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문둥병자들을 고쳐준 후에도 반드시 제사상에게 가서 결례를 하라고 명하신 까닭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사실은 그 후에는 자기가 원하는 무엇이든 구해도 된다는 명시적 언급은 없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구하지 않아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므로” 채워주신다고만 했다. 한마디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것 즉,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은 기도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다.    

이 말씀의 문맥상의 의미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 결론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34절)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도보다 염려하지 말라는 데에 초점이 모인다. 처음 시작하는 말씀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없다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31절) 그 모두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기에 아무 염려하지 말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주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 같은 현실적 필요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 나름대로 자기들 신에게 간구하기도 하지만, 실은 그들이 항상 열망하며 추구하는(seek after) 대상이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신자들은 그 반대로 인생의 목적이 그들과 달리 하나님 나라와 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오직 현실의 안락과 형통만 목표로 살기에 그것들이 부족하거나 없으면 필연적으로 염려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인생으로 바뀐 신자는 자신의 삶에 하나님 나라와 의가 부족한 것을 염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현실적 필요에 관해선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시고 더하여 주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물론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구할 수는 있으되 하나님 나라와 의 안에서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간단히 말해 자신의 삶과 모든 환경에 그분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완전한 통치가 임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그분의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의다. 따라서 신자의 인생은 물론,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자기를 통해 드러나게 해달라고 구하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도 만약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과 주위에 실현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구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흔히들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는가? 이미 말한 대로 종교적 행사나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위해 먼저 아주 간단히, 어쩌면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기도한다. 그런 요식절차를 마친 후에도 없으면 기본적인 생활이 안 되는 꼭 필요한(need)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맘껏 하고 싶고 갖고 싶은(desire) 것들을 기록한 기다란 리스트를 열심히 낭독한다.

심지어 비전이라는 거창하고 고상한 용어로 포장만 했다 뿐이지 그 욕심의 크기가 클수록  믿음이 더 크다고 말한다. 욕망이 크니까 자연히 강청하는 기도는 더더욱 강조된다. 기도에서 강청함은 신자의 끈질김의 강도나 열성이 아니다.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붙드는 온전하고도 순전한 인내다.    

비록 그 순수성이 의심되더라도 종교적, 도덕적인 일을 먼저 기도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아예 자기가 하고 싶은 여러 대체 방안 중에 어떤 것이 좋을 지 묻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인 양 착각한다. 어느 쪽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은지 잘 판단이 안 되니까 하나님더러 판단해 주고, 이왕이면 당신의 전능한 능력으로 그 선택된 일을 이뤄달라는 것이다. 기도라는 형식만 종교적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마침 말만 기독교적이지, 그 안에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은 전무하다.

그분의 신자에 대한 뜻은 오직 하나다. 당신의 나라와 의가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풍성하고도 아름답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분의 신자가 이해하는 그분의 뜻은 자기가 제시한 여러 옵션 중에서 그 크신 능력으로 자신의 형통과 안일을 최고로 높여줄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을 말한다. 또 그것이 그분의 나라와 의라고까지 착각한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신자가 구하는 것도 당연히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충만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또 자신이 그런 통치를 통해 누리는 은혜와 권능을  주변 사람들이 생생이 눈으로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자신이 속한 모든 공동체를 주님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예수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5:17)는 뜻이 무엇인가? 그 앞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자신의 안위와 형통만 목표로 살았던 불신자 시절(이방인)과는 정반대로 살라는 뜻이지 않는가?      

온전한 기도를 못하는 까닭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뜻을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과 무엇이든 기도하라는 말씀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의가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데 필요 혹은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강청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서 강청함이란 그분의 나라와 의가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기에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반드시 보고야마는 것이다.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다는 확신이 있기에 뻔뻔함과 끈질김은 자연히 수반된다.  

만약 자기만을 위하는 정욕과 교만이 포함되어 있다면 어딘지 모르게 기도에 힘이 빠지고 당당해지지 않는다. 또 신자 스스로 잘못된 기도임을 알아채기 이전에 내주하신 성령이 그를 알고 탄식하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뜨겁게 해도 아무런 확신과 평강이 생기지 않고 괜스레 눌리기만 한다.  

강청함이 끈질김이라면 역으로 따져 조급해선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온전한 기도를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자신을 통해 드러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거역이자 불순종이다. 열심히 뜨겁게 기도는 하고 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일과는 반대로 가고 있는 꼴이다. 조급증이 큰 죄가 되는 또 다른 이유다.

기도가 응답되려면 논리적으로 하나님과 신자 간에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일치해야 한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기도자에 대한 1)계획과 그 계획을 실현하려는 그분의 2)시기와 3)방식이 그것이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기도의 응답 과정은 너무나 오묘하다. 하나님만의 크고도 아름다운 능력과 은혜가 풍성하고도 신비하게 작동하기에 인간 이성으로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끈질기지 못한 기도가 신앙생활의 치명적인 병인데도 많은 신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알기 쉽게 따져보려는 뜻이다.  

신자가 기도하는 내용이 그분의 뜻과 시기와 방식 셋 모두와 일치한다면 기도한 대로 순전히 응답된다. 성경에선 이삭의 신부를 구하러 간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기도가 그 대표적 예다.(창24징) 그러나 평생에 몇 번 없을 정도로 아주 드물고 거의 대부분은 어떤 요소에서든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서로 뜻이 일치하지 않으면 아예 응답이 안 된다. 무엇이든 구하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던 이유다. 서로 뜻이 일치하지 않으면 무응답이 실상은 응답인 셈이다. 당연히 강청함도 결코 통할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신자로 기도 중에 혹은 그 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깨닫게 해주시기에 신자는 영적으로 항상 예민해져 있어야 한다.  

또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신자가 바라는 응답의 시기와 방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하나님은 다른 일을 계획하고 시행하고 있는데 신자는 전혀 엉뚱한 곳에 가서 언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원하는 대로 도달할지 목이 빠지라고 기다리고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한 이치인데도 신자는 하나님이 왜 아직도 응답해주지 않는지 불만, 원망, 불신만 키우고 있다.

흔히들 기도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마저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도록 뜨겁게 강청하라고 한다. 이는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연약한 형편에 있는 신자의 기도라도, 또는 기도하는 모습이 아무리 연약해 보여도, 그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면 천국보좌는 물론 천하가 뒤흔들리는 엄청난 역사가 정말로 일어난다. 요체는 기도 응답의 근거가 그분의 뜻이지 신자가 기도하는 열성과 정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가 자유의지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범위를 우리가 예상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게 허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그 범위는 절대로 그분의 뜻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시는 이는 오직 당신 한 분뿐이다.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뜻이 아니고는 당신은 역사하시지 않는다. 기도 응답 여부도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달렸다.  

만약 신자가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거나, 궁극적으로 허용된 범위 안에 속한 것이라면, 남은 것은 응답 시기와 방식을 비교하는 것이다. 만약 응답되는 방식은 신자가 바라는 것과 일치하지만 그 시기가 다르다면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만으로 충분하다. 반면에 시기는 일치하는데 응답하는 방식이 신자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면 분별력이 필요하다. 시기와 방식이 둘 다 다르다면 인내력과 분별력 둘 다 필요하다.

물론 기도하는 전후 혹은 도중에 하나님이 뜻, 시기, 방식을 신자가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따져 본 것이다. 실제로는 우리 기도에 이 셋이 일치하는 경우는, 어쩌면 그 중 하나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조차 거의 없다. 그런데도 왜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정확히 응답되지 않으면 응답이 아니라고 여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기 기도한 대로 반드시 응답된다고 믿는 것은 자기 소원을 기도라는 경건하도고 정중한 형식에 담았다는 것뿐이지, 사실인즉 하나님더러 이런 저런 일을 자기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대로 해내라고 명령한 것과 같다. 또 기도 응답이 빨리 안 된다고 불평, 불신하는 것도 조금 겸손한 표현일 뿐 내용인즉 하나님을 게으르다고 야단치는 것이다.

기도란 내 뜻대로 하나님을 부려 먹는 일이 아니다. 내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춰 나가는 정말로 힘들고도 내키지 않는 작업이다. 예수님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랬지 않는가? 그것도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될 정도로 말이다. 하나님께 강청하며 기도하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따지면 예수님 같이 내 뜻을 고쳐나가는 작업을 끝까지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뜻과 계획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이다.  

영적 분별력의 실체

물론 신자의 모든 기도는 강청함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에 가장 요구되는 것도 열성과 정성이 아니라 인내력과 분별력이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의 자질이 아니다. 인내를 잘 하려면 뭔가 확실한 결과를 사전에 붙들거나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된다. 무턱대고 인내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

흔히들 무엇이든 응답된다고 믿고 간절히 기도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실은 그 기도의 목표가 응답 자체이므로 오히려 온전한 인내로 이끌지 못한다. 반드시 응답이 되어야만 하는데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데도 응답은커녕 아무 징조조차 보이지 않으니 도리어 의심, 불평, 불신의 싹만 트게 된다.

그것은 무응답이라는 응답을 이미 받았는데도 자기 기도한대로만 고집하는 너무나 큰 어리석음일 뿐이다. 이런 분별력이 없기에 신앙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 단지 힘든 일을 기도하여 어쩌다가 해결 받는 일만이 신앙의 전부다. 하나님이 죄에서 구원해주고도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남겨둔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따라서 영적 분별력이란 자기가 기도한 내용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시기와 방식을 잘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영적 분별력을 신령한 초자연적 은사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매번 하나님의 뜻을 명료하게 깨닫거나 구체적인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이는 단언컨대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건에서, 당신의 특별한 뜻에 따라, 내주하신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통해 명료한 계시를 줄 수 있음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라고 말할 때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분별하는 것이기에 그런 능력을 지닌 자는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조차 마지막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셨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과 시기와 방식 셋 중에 하나라도 우리 기도와 일치하기 힘들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나 간단하다. 자기가 기도하는 뜻과 시기와 방식을 언제든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어차피 그 셋이 일치하지 않으니 기도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도는 그야말로 하나님 뜻을 모르니 자기 소원대로 간절히 해야 한다. 그러나 꼭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고집만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서 정작 필요한 믿음은 응답이 꼭 된다는 것보다,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 더 유익한 것, 더 합당한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란 특정한 은사도 아니며, 금식과 함께 신령하게 기도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담담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기다리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기도한 내용과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비교해 가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세심히 관찰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 관찰한 결과를 성경에 일관되게 나타난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분석 판단해야 한다. 평소 성경을 꾸준히 읽어서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를 잘 알고 있으면 그 분별은 쉽다. 다른 말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영적 분별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다.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과 사건을 하나님의 성품과 섭리와 연결해서 잘 따져봐야 한다. 또 그러는 것이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다.      

영적 분별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급증을 버리는 것이다. 성급해지면 만사를 그르친다. 이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방식과 시기대로 분명히 응답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자기가 기도한 내용과 분명하게 연관되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풍성하게 실현되는 것을 볼 줄 아는 것이 영적 분별력의 실체라는 것이다. 미리 그분의 뜻을 알아서 그에 맞게 기도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신령함이란 오히려 기도를 해나가면서 혹은 기도한 후에 모든 결과를 그분의 뜻에 맞게 이해, 적용, 결실할 수 있는 능력이다.  

범사가 신자의 기회  

서두에 하나님에 관한 미국 코미디 영화를 예로 들었는데, 마지막에도 비슷한 영화 Evan Almighty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스티브 카렐이 주연하고 신의 단골역인 모간 프리드만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나온다. 어느 날 양심적이고 때가 묻지 않은 하원의원 이반에게 신이 나타나 21세기의 미국 수도 워싱턴에 큰 홍수가 닥칠 테니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이반은 처음에는 신께 거역해보지만 여러 표적을 보고 차츰 확신을 갖게 되었고  방주를 짓기 시작한다. 당연히 성경의 노아처럼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는다.

특별히 그의 아내는 자꾸만 이상한 행태를 보이는 남편이 정신이상에 걸린 것으로 여기고  가출해버린다. 남편과 아들들 걱정하며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웨이터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이 이야기를 걸었다. 믿음으로 고난을 잘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떤 응답을 주겠는지 물었다. 신은 흔히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라고 믿지만 틀린 생각이라고 말한다. 대신에 “인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깨우쳐주었다.

환난을 잘 이겨내려면 환난 중에 있어야 한다. 환난이 없으면 환난을 이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을 닮은 무조건적인 긍휼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도 신자들은 전혀 엉뚱하게 생각한다. 기도만 하면 환난이 사라지거나, 갑자기 예수님 같은 성자 내지 능력자로 바뀌는 줄 착각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간구하라고 가르쳤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분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는 것도 사실은 신자의 책임이다. 현실적 환난을 이겨내고, 잘못한 자를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등 모두는 신자가 감당할 일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신다. 뜨겁게 기도했다고 인내력과 긍휼심이 저절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자신의 의지를 동원해 그분이 자기 앞에 마련해 준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의 인내력을 키울 수 있도록 이런 저런 환난을 허락하고 또 이웃 사랑을 잘 할 수 있도록 자꾸 까다로운 사람을 붙여 주신다면, 바로 그것이 신자를 이끌어 가시는 그분의 방식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신자를 무사하고 안일하게만 이끄신다면 자식에게 사탕만 주는 부모처럼 오히려 신자를 망치는 지름길일 뿐이다. 우리는 그래도 좋다고 여길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럼 영적 분별력의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인가? 환난이 단순히 극복해낼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인내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는 능력이다.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자가 달성해야할 의무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자라나갈 기회로 전환시키는 힘이다. 말하자면 자기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성장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드러나게끔 하나님 그분이 마련해주신 둘도 없는 기회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신자가 겪는 범사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권능이 신비한 모습으로 숨겨져 있다. 그런데도 그 실상을 발견해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믿음이 약한 것인가?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해 신령하지 않기 때문인가? 기도와 말씀에 등한해서인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아서인가? 재물과 권세와 명예만 먼저 추구해서인가? 자신의 정욕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해서인가? 물론 이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는 정답이 될 수 있다. 또 지금껏 그렇게 배워왔다.

그러나 더 중요한 원인은 바로 조급증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못 기다리는 것이다. 소리 높여 중언부언으로 오래 동안 기도하기만 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으니까 불만과 불신이 생겨도 당연하게 여긴다. 오히려 하나님 쪽 잘못으로 간주한다. 진정한 강청함의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밀하고도 너무나 풍성한 은혜는 전혀 찾아보려 시도하지 않는 조급증이다.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모든 기회는 차버리고 대신에 자기가 정한 기회에 하나님을 해결자로만 동참시키려고 믿음을 잘못 적용한다. 열성적이고도 진지한 종교 의식은 하고 있어도 하나님은 도리어 항상 거부되고 자신만 살아남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 못해 비참해져 가고 있는지는 모르고, 세상 앞에 자기가 비참해졌기에 빨리 고상하게 바꾸라고 그분을 닦달한다. 사람에게 당하는 창피를 어서 빨리 지우고 싶은 일념뿐이기 때문이다.

조급증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인내력을 키우라고, 다른 말로 조급증을 없애라고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주시기에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그 기회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당당하게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정작 끈질긴 기도가 더 필요한 때다.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히12:3)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절대로 낙심치 않기 위해서 강청함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죽기 살기로 자기 소원만 실행해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5/22/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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