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미련하게 전도하라.

조회 수 2970 추천 수 253 2008.11.11 20:59:12
아주 미련하게 전도하라.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선행으로 전도가 되지 않는다.

어떤 미국 목사가 자기가 치료 받고 있는 한 치과 의사의 부인을 전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부인은 의사의 비서를 겸해 환자를 접수하는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복음을 전했지만 도무지 씨가 먹히지 않았다.

어느 날 대기실에서 피 묻은 틀니 세트를 들고 있는 한 노파를 만났다. 그 병원에서 맞춘 틀니가 맞지 않아 잇몸이 아파 못 견디겠으니 새 것으로 바꿔주든지 고쳐달라고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보증기간이 지났으니 둘 다 들어줄 수 없다는 냉정한 대답을 듣고는 일찍 오려고 했지만 너무 춥고 몸이 아파서 꼼짝 할 수 없었다고 통사정을 하는 중이었다.

보다 못한 목사는 자기가 대신 돈을 물테니 할머니 요구대로 해주라고 의사부인에게 요청했다. “오늘도 제가 도움을 주어 복음을 전할 자를 만날 수 있도록 성령님 인도해 달라”는 매일 하는 기도를 그날 아침에도 간절히 드렸음을 기억했던 것이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노파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동안 아무리 전도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부인이 며칠 후 주일 예배에 참석하려고 교회에 나타났다. 부인은 목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거금을 쾌척하며  친절하게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던 것이다. 말로만 전해졌던 복음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전도(傳道)란 물론 우리가 믿는 진리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또 그 진리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이다. 어떤 죄를 지었든 영적상태가 아무리 피폐해 있어도 겸손하게 그분 앞에 무릎 꿇기만 하면 당신의 긍휼로 의롭다고 칭해주시기에 죄 아래에 묶여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막상 복음을 전해 듣는 대상은 여전히 사단에게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다.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오히려 즐기고 있다. 설령 몇 가지 자신의 범죄와 과실을 인정 한다 쳐도 스스로 얼마든지 의로워질 수 있다고 자부한다. 말하자면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준다는 복음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거부거리밖에 되지 못한다.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라니 말이다.

상기의 예를 든 것이 전도와 동시에 꼭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막상 전도를 해보면 시간과 경비를 들여서 도와주고 섬겨도 단순히 감사하다는 말과 예수 믿는 자답다는 칭찬만 하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선행 자체로는 전도가 잘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럿이다. 무엇보다 사단이 그 영혼을 붙들고 있는 권세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또 본인도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즐기거나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다. 단지 지금 현실적 형편이 나쁠 뿐이다. 조만간 자기 힘으로 회복시킬 자신이 있다. 신세진 것도 여유가 생기면 보답하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나아가 결정적인 이유는 저 사람이 지금 나를 전도하려고 도와준다는 선입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선행을 남들에게 보이게 하라.

그럼 예의 치과 의사 부인의 경우는 어떻게 된 것이며 또 예수님의 권면도 잘못되었다는 뜻인가? 우선 그 부인 본인이 선행을 입은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제 삼의 목격자였다. 만약 자기를 도와주었다면 그녀도 틀림없이 전도시키려는 목적으로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단순히 고맙다고는 여겨도 복음에 대한 마음 문은 오히려 더 닫았을 수 있다.  

대신에 목사는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고 생전 처음 보는 노파를 도왔다. 모른 체 해도 잘못한 것 하나 없다. 목사가 그런 일도 안 도와주느냐고 탓할 수 없다. 살고 죽는 위급한 문제도 아니고 당장에 상당한 돈이 소요되며 무엇보다 완전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서니 보통 사람으로선 엄두도 못 낼 일, 세상에선 절대로 흔하지 않은 일,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과연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저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인가? 믿음이 단순히 본인의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 해결 받고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나라면 과연 이런 일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예수를 믿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와 능력을 갖는 것인가?” 그 부인에게 예수와 그분을 믿는 신앙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생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복음에 대해 귀가 솔깃하고 열린 것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권면하셨는지 다시 자세히 보자.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요컨대 선행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고 한다. 남들이 다 보고 알게 하라는 것이다. 물론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바리새인처럼 일부러 과시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빛을 비취게 하는 것이다.

빛이란 이미 발광체 내지 반사체가 되어 있는 물체에서 자연적으로 새어나오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멈추거나 더 세게 발할 수는 없다. 선행이 일상적 습관으로 굳어져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자연히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게 되니까 그 주위에 있는 자들의 눈에도 자연히 띄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 빛을 본 자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 선행을 한 당사자에게 감사하지 말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틀림없이 막상 도움을 받은 자는 신자에게 감사하고 주위에서 본 자들도 칭찬할 것이다. 그 부인에게 생판 모르는 남에게 보통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선행을 베풀었다는 인식이 들었듯이, 사람들에게 오직 하늘의 보상만 바라는 자라야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인정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그분을 믿는 자는 저렇게 우리와 다를 수 있는가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해서 불신자들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결국 전도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이 신자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단순한 선행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거기에다 전도하려고 선행 한다는 것이 먼저 드러나면 역효과마저 날 수 있다. 그렇다고 전도용 선행을 하지 말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럴수록 더 많이 해야 한다. 대신에 정말로 전도를 위해서 하려면 어떤 경우가 생겨도 끝까지 일관되게 해야 한다. 중간에 그만 두거나 섬김의 도가 약해지면, 그 안에 함께 내포된 애초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그야말로 전도용 선행으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성령 충만의 참 의미

역설적으로 말해 신자가 정작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말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보다 선행이 일상 습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면식 없는 자를 자기 시간과 경비를 동원해 가며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 인은 실제로는 흔치 않다. 그러니까 가끔 나타나기만 하면 매스컴에서 더 법석을 떤다. 그럼 신자들은 예수님의 권면을, 아니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는 뜻인가? 예의 그 목사는 어떠했을까? 과연 선행이 몸에 밴 습관이었을까? 아니다.  

예의 목사도 처음에는 그 노파를 예사로 여겼다가 아침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 생각나 도와준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도와주는 모습을 지금껏 전도 대상으로 삼아 구워삶고(?) 있는 저 의사 부인이 보고 감동 받아 교회 나오겠지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자연히 가식 내지 과장이 들어가 오히려 부자연스런 선행이 되었을 것이고 아마 전도도 물 건너갔을 것이다. 그 목사는 오직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이다.

본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전도란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지 않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한다고 해서 어떤 대상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그냥 순순히 믿게 만들어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 어느 누구가 전도하지 못하겠는가? 전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성령 충만한 신자만 전도에 들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구원 받는 것 자체가 성령으로 거듭남인데 성령의 능력의 개입 없이는 전도가 일어날 리는 만무하다. 단순히 종교적 의무 차원에서 전도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데리고 나가려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아 도와주었는데도 성의를 너무 못 알아준다고 섣불리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성령 충만한 신자라고 해서 특별히 신령하고 거룩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히 예수를 모르는 자를 만나면 그 영혼이 너무 불쌍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을 뿐이다. 그저 우리 교회로 데려가야지 보다는 어떻게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해주어야겠다는 애타는 마음이 절로 드는 자다. 그래서 그 영혼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사랑으로 섬긴다.

그런데 세상은 사실 예수를 제대로 모르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날마다 만나는 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아침마다 전도할 대상뿐만 아니라 예의 목사님처럼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또 그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한 마디로 바울처럼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해달라는 간구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다 성령 충만한 자가 아니다. 얼마든지 종교적으로만 기도에 능한 신자도 많다. 단순히 기도한 대로 선행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성령에 민감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을 태세가 언제 어디서든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진짜 충만한 신자라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잘 인식하며 또 어떤 장애가 있어도 담대하게 순종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알기 쉽게 말해 예상치도 않은 일이 눈앞에 벌어졌을 때에는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면 마땅히 그 일에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여 잠시 기도하여 영적으로 분별하려 든다.

예컨대 강도를 만나 다쳐 있는 자를 길거리에서 만나기란 절대 흔한 일이 아니다. 거기다 마땅히 도와주리라 기대했던 서기관이나 제사장들마저 그냥 지나치고 방치해버리는 일도 사실은 드물다. 예의 목사님의 경우도 틀니를 교환 내지 교정해달라고 우기는 노파를, 그것도 그럴 돈이 없어서 힘들어 하는, 치과 대기실에서 만나기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 목사는 아침에 분명 그런 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처음에는 좀 망설였지만 기도의 응답이라고 분별한 후에는 나서서 도와주었지 않는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이나 예의 목사가 바로 성령 충만한 자의 대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이 혼자 버려두지 아니하고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역으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응당 그분의 일을 기꺼이 최우선적으로 하게 된다. 또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그분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장 미련한 하나님

전도에 드러나는 성령의 역사란 초자연적 기적적 간섭이 아니다. 복음에 드러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상대의 영혼을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단순히 교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진 복음으로 인해 상대의 심령에 찔림이 일어나야 한다.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내면에 발생해야 한다. 제대로 전해진 복음 앞에는 철저한 순종이거나 철저한 배척 둘 만의 반응으로 귀결되어져 한다. 바로 그것이 전도에 동반되어야 할 참 성령의 역사다. 복음을 아무리 논리정연하고도 알기 쉽게 설명, 변증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다른 말로 전도자는, 아니 모든 신자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내는 것이 성령의 역사다. 예수님처럼 오직 그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새 생명을 얻게 되기를 정작 그 당사자보다 더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또 그래야만 복음을 진짜 복음답게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정말 세상에는 없는 선한 행실 즉, 전하는 자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는 모습을 보아야만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겠는가?    

한 마디로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 누구를 만나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전도의 기회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다단계 판매원들은 사람들을 볼 때 오직 머리수 곱하기 돈이라는 공식만 적용한다고 한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신자도 불신자를 볼 때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 판매원들이 사람의 외모는 전혀 보지 않고 숫자만 생각하듯이, 신자도 불신자를 절대 그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반드시 전도되어야 할 하나의 영혼으로만 간주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였지만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너무나 비참한 또 다른 한 명의 죄인일 뿐이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살 가치와 의미조차 없는 죽어 있는 시체다.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교회로 인도하는 실적 높이기 싸움은 아니다. 전도할 직접적 대상에게만 손해를 감수하며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전도 목적이 빤히 보이면 결코 진정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모든 불신자를 부모형제 전도하듯 대해야 한다. 불신자들의 영적 상태는 항상 갈급하고 허망한 상태에 있다. 본인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사실은 신자의 행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정말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모습이 보이면 자기도 그분을 의지하거나 최소한 알아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작동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신자의 행동과 말뿐만 아니라 매너 표정까지 다 본다. 아니 인간은 모두가 영적 존재인지라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본받고 싶은 진정한 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예의 목사가 노파를 도와주었을 때에 옆에 있는 의사 부인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작 그 부인이 영적 감동을 받았지 않는가? 목사가 전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미 전해진 복음이 비로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누구를, 특별히 불신자를 만나면 주께 대하듯 해야 한다. 꼭 모든 것을 희생하며 도와주라는 뜻이 아니다. 속으로 그 영혼을 진정으로 붙들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대화 교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 놀라운 권능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신자가 행하는 모든 수고와 행동과 말과 표정과 심지어 영적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은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그를 지켜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더 먼저 복음이 전해지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건에 넘치도록 미친다. 의사 부인의 경우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제삼자가 구원 받게 되는 것도 그분에게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반면에 신자에게는 놀랍고도 신비한 성령의 능력일 수밖에 없다.
      
불신자의 심령에 찔림이 일어나게 하는 일은 오직 성령님의 몫이다. 다시 말하지만 전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하시며 신자는 쓰임 받는 도구일 뿐이다. 단 성령 충만한 자라야 쓰임 받을 수 있다. 영혼이 불쌍하여 무시로 기도하는 자다. 성령의 인도대로 모든 사람을 주께 대하듯 하는 자다. 요컨대 미련한 복음을 미련하게 전도하는 자다. 때를 얻든 못 얻든 그 사람의 영혼만 불쌍히 여기는 자다. 사람을 절대 외모로 보지 않고 추수해야할 곡식이요, 다시 찾아와야 할 잃어버린 양 떼로 여기는 자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세운 계획은 큰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학자, 의사, 정치가, 사업가 등이 되어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자신의 모든 삶을 천국 복음이 확장되어지는 방향으로만 영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어쩌면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미련한 분이다. 모든 인간이 창조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 성령 안에서 아름답고도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영원토록 미련하게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도로만 가능하며 전도도 말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되, 우리 같이 외모로는 너무나 부족하고 미련한 자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미련함에 동참하는 미련한 전도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능력이 나타나는 전도이다. 전도를 지혜롭고 멋지게 하려는 시도나 마음을 절대로 쉽사리 먹지 말라. 오직 십자가만 전하기 위해 자신부터 미련스럽게 십자가에 묶어서 죽이지 않고는 전도가 되지 않는다. 말로는 전할 수 있을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 자체가 인간 상식으로는 가장 미련한 것이지 않는가?  

11/11/2008


운영자

2008.11.11 21:06:26
*.108.162.74

2003/11/21 나무십자가교회의 금요찬양예배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원래는 "영혼을 깨워라"(찬양예배 설교를 주로 올리는 사이트)에 게재하려 했으나
다시 정리하고보니 주제가 전도라서 이곳에 올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결국, 이 사이트에는 불신자를 상대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내용만 올리려 했던
애초의 의도가 조금 달라질 수 밖에 없어졌습니다.
즉 불신자에게 변증하는 내용과 신자가 전도할 때에 알아야 할 사항 둘 다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참조하시고 또 양해 바랍니다. ^^

정순태

2008.11.12 01:17:03
*.95.73.2

아멘!!!

날이 갈수록 우리 믿음의 정수는 "미련함"임을 느끼게 됩니다. ^^

모루두개

2024.02.13 23:32:14
*.230.44.2

탕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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