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 가지 못한다.
편애하고 불공평한 하나님(?)
유럽과 북미 선진국들의 지성계에선 하나님과 그분의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보는 것이 이미 대세가 되었다. 일반인의 경우도 미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같은 사상을 갖고 있다. 풍요한 물질과 첨단 기술이 주는 안락함에 취해서 더 이상 인생의 근본적 고뇌에 대해 심각하게 갈등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오직 지금 주어진 순간에 어떻게 자기만족을 찾느냐만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그 외의 지역에선 여전히 보편적인 죄에 대한 개념이 있으며 구원 받을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전만큼은 못해도 절대자와 그분의 최후 심판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호기심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개신교를 제외한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 모두가 한 결 같이 착한 자가 천국을 가고 악한 자가 지옥을 가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런 생각을 부인하며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을 간다고 선언하는 개신교를 아주 잘못된 독선적 주장으로 치부한다. 또 아무리 죄가 많은 악인이라도 기독교를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천국에 보내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자기들 신자만 편애하는 너무나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비난한다.
이미 다른 글에서 여러 번 밝혔지만 이런 비난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은 틀린 면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라는 뜻이다. 우선 기독교 구원관이 옳은 데도 비방했다. 또 착한 자가 천국을 가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도 틀렸다. 나아가 오히려 그런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편애하는 분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착한 자를 천국으로 보내려면 반드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을 정해야 한다. 예컨대 거짓말하는 죄를 생각해보자. 거짓말을 평생 백 번 한 사람은 천국 가고 만 번 정도 한 사람은 지옥 보내는 데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고 공평해 보인다. 그러나 그 중간쯤에 반드시 커트라인이 설정되어야 하는데 5천 번이라고 가정해보자.
너무 많다고 생각되는가? 어떤 연구에 따르면 남자는 하루에 5번, 여자는 3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평생을 70년 잡고 계산해 보면 남자는 127,750 여자는 76,650번 거짓말하는 셈이다. 오히려 정확히 하자면 10만 번 정도가 카트 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평생 10만 번 거짓말한 사람은 천국가고 10만 한 번 한 사람은 지옥가야 하는데 과연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야말로 불공평한 처사 아닌가? 나아가 그런 하나님은 구원과 심판의 전권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라 단순히 시험 점수를 채점하는 자에 불과해진다.
인간이 짓는 죄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다. 사람마다 도덕적 기질도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은 안 해도 성적으로 타락하고 그 반대로 어떤 이는 성적으로는 순결한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그 모든 죄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 적용하려면 도무지 착한 이와 악한 이의 구분을 할 수조차 없다.
그래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사람들의 속마음까지 다 뚫어보시고 선인과 악인을 구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도 순진한 생각이다.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범하나 마음속 동기로 구분 한다 쳐도, 그 동기에 대한 특정 합격선을 정해야 하고 또 그 선에서 조금 모자라 떨어지는 억울한 경우는 여전히 생기기 마련이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 가야 한다는 말이 성립 되려면 누가 봐도 착한 자와 악한 자가 쉽고도 명확하게 구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인간은 오직 평생을 두고 거짓말을 거의 안 하는 자와 밥 먹듯이 하는 두 부류의 사람으로만, 숫자로 치면 평생 백번 미만-일 년에 한 번 꼴과 수백만 번 하는 자로 나눠져야 하고 실제로 누구나 그렇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거짓말 뿐 아니라 모든 도덕적 행위에서 다 그래야 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구태여 사후의 심판이 따로 필요 없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확연해진다. 신앙을 가져 구원을 추구할 이유도 없다. 나아가 둘 중 어느 쪽에 현실적 힘이 실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 자체도 선하거나 악해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아니 선한 자가 일상적으로 확연히 보이기에 악인들도 그들을 닮고자 노력함으로써 사회 자체가 자정(自淨)되는 효과까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자신의 내면과 지나온 삶을 점검해 보라. 우리 중에 어느 누구가 나는 당당히 천국에 갈 수 있을 만큼 선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하늘을 우러러 의롭게 살았다는 말은 오로지 감옥에 갈 죄와 남에게 고의적 피해를 주는 짓은 범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인간이란 그나마 쉽게 지킬 수 있고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은 것 같은 거짓말 하나에도 전혀 자유스럽지 못한 존재다. 아니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동식물은 먹이사슬로 서로 묶여 있기는 해도 생존과 번식 외의 이유로는 절대로 사기, 위계, 폭력, 억압, 살생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섭리를 따라,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주 정직하게 살고 있다.
평생 거짓말 10만 번의 커트라인도 사실은 아주 적게 잡은 것이다. 뻔히 진실임을 알고도 침묵하고 있는 것은 더 치사하고 무서운 거짓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 도무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부동산 중개업자가 지붕에 물이 새는 하자가 있는 줄 알면서도 아무 말 안하면 양치기 소년이 사자가 오는 데도 가만히 있는 것과 같지 않는가? 솔직히 거의 모두가 세상의 부정부패를 외면하거나 사회적 관행이라는 핑계로 은근 슬쩍 발을 담그고 있다.
인간을 윤리적 기준으로는 선인과 악인을 결코 구별 지을 수 없다. 정 억지로 구분하자면 “덜 악인”과 “더 악인”으로는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 가야 한다는 주장도 전자 현미경으로 봐도 확인이 잘 안 되기에 하나님마저 분류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덜 악인”은 천국 보내고 그보다 먼지 하나 만큼의 “더 악인”은 지옥 보낸다는 말이다. 다 똑 같은 악인들이 너무나 억울한 기준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은 악인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세 번 놀라는 천국과 지옥
기독교 조크에 천국 가면 세 번 놀란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 꼭 와 있어야 할 너무나 선하고 의로워 보이던 장로님과 목사님이 와 있지 않아서다. 대신에 교회 다닌 지 수십 년이 넘도록 집사도 하지 않고 말썽만 부리던 교인이 와 있어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도 그 교인과 크게 다를 바 없었는데 천국에 와 있음을 보고 아주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역으로 따져 지옥에서도 세 번 놀라게 됨은 당연한 이치다. 우선 도무지 와선 안 될 것 같은 거룩한 장로님과 목사님이 와 있어서다. 또 반드시 있어야 할 그 말썽꾼 교인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어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지 직분만 다르지 장로와 목사보다 의롭다고 생각한 자기가 지옥에 와 있음을 보고 크게 놀라는 것이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럴 듯 해보이지만 그 깊은 내면을 파고들면 극도의 교만이자 교묘한 죄다. 나는 네 같은 종자하고는 아예 질이 다르다는 뜻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하나 없이 살고 있다고 큰 소리 치는 자일수록 지옥문에 가장 가까이 서있는 자도 없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나 같이 더 착한 자를 더 악한 사람과 구분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끝까지 고집한다.
물론 그분은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인간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시시콜콜한 부분과 심지어 그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신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인 줄 아는가? 인간은 점수로 따지면 몽땅 0점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 0.000001 점이라도 받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니 그분이 판단 내리기 전에 정말 양식 있는 자라면 인정할 수밖에 있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자꾸만 후한 점수를 주려는 본성을 버리고 정말 솔직히 자신의 윤리적 실상을 따져 보면 자신 있게 천국 갈 정도의 의인이라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스스로 이런 판단을 내릴 정도면 그나마 나은 경우다. 그럼 나머지 모두는 이보다 못하다. 결국 모든 자가 자신의 윤리적 선악으로는 아무도 천국 갈 수 없다는 결론에 당연히 이른다.
혹시 “나는 평균 이상은 될 테니까 50점쯤은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큰 착각이다. 이렇게 가정해보라. 사람의 일생을 그것도 행동과 말뿐만 아니라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찍은 비디오를 최후의 심판 대에서 하나님과 함께 본다고 말이다. 과연 한 시간, 아니 단 오 분이라도 함께 볼 자신이 있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겠는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평가는 노아 심판 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창6:5,8:21) 항상 악하다면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그렇다는 뜻이다. 정말로 그분이 하신 공정한 평가대로 공평하게 행하자면 지금 지구상에는 벌써 다 죽고 단 한 명의 인간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아니 당장에 인간을 완전히 멸해도 입이 열 개라도 말을 못한다. 오히려 인간이 정말 공정하게 그분을 대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면 구원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담임선생이 잠시 급한 일이 있어서 교실을 비운 사이에 자율학습을 하라고 내어준 숙제는 하지 않고 모든 학생이 난리를 치며 놀았다. 선생이 돌아와 보니 집기 비품은 다 부서지고 교복에는 흙탕이 묻어 있고 도무지 꼴이 아니다. 반장부터 꼴등까지 다 그렇다.
그럼 선생이 취할 방도는 세 가지뿐이다. 우선 모두에게 심한 벌을 주는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진짜 따끔하게 혼을 내는 것이다. 그럼 독재하는 호랑이 선생이 될 것이다. 둘째는 다 잘못했고 아직 철이 없는 어린아이인지라 아무 일도 없는 양 한두 마디 말로만 야단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 마음씨 좋은 선생은 될지언정 도무지 기강이 서지 않는다. 셋째는 잘못했다고 자백하며 회개하는 자는 용서해주고 끝까지 자기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버티는 자만 벌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셋 모두가 그럴 듯 해보일 수 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장난 한 것 정도라서 후하게 봐주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는 경우에 대입해보라. 첫째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몽땅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인간이 어떤 짓을 했어도 전부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셋째는 그 가운데서 자기는 죄인이니 용서해 달라고 자백하는 자만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이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안이 가장 좋은지 너무나 확실하지 않는가?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는 뜻은?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교리를 일부 신자들을 비롯해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측면이 있다. 예수가 창시한 종교의 교리를 배우고 따르면 구원을 얻는 양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수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예수를 그 종교를 창시한 위인으로, 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한마디로 내가 택하고 믿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여러 방안 중의 하나일 뿐이다.
아니다. 구원을 얻는 결과는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런 이해와는 도리어 정반대다. 인간이 스스로 어떤 방도를 동원해도, 심지어 스스로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만 믿어야 한다는 권면이 정작 뜻하는 내용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철두철미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자백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제 예수를 믿고 따르니 구원을 주시겠지 기대하는 것과 정작 구원과는 별개라는 뜻이다.
실감나게 표현을 해보자.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나는 평생을 통해 십만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쉽게 할 것 같은가? 단순히 그런 사실(fact)을 시인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영적 실체를 정말로 속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십만 번의 거짓말 외에도 하얀 거짓말과 악을 보고도 외면하고 침묵했던 거짓말은 그 수십 배나 더 범한 정말로 치사하고 비겁한 자임을 가슴을 치며 자백해야 한다. 예쁜 여자만 보면 아내나 애인 몰래 속으로 온갖 음란한 상상을 했으며, 형제 아니 부모를 두고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존재였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선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만은 진심으로 고백해야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기에게 선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썩어빠진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선 교양, 지성, 명예, 신분, 재물, 가문, 외모, 심지어 종교 등으로 감춰왔지만 나만이 아는 나의 내면은 어느 누구 앞에도 꺼내 놓을 수 없이 시꺼멓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칭찬을 받고 있을 때도 스스로는 자신마저 부인 외면하고 싶은 적이 많았음을 실토해야 한다. 나 같은 자는 결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고 천국은 도무지 꿈도 꾸지 못하는 대신에 지옥가야 아주 마땅하다고 자처할 수 있어야 한다.
혹시라도 영적인 겸손을 일부러 가장해선 안 된다.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가난함을 절감하면서 철저하게 애통해 해야 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고도 조건 없는 긍휼만을 소원한다는, 아니 절실하고 갈급하다는 고백이 저절로 새어나와야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앞발 뒷발 다 들고 굻어 엎드려서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 말고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고 권하는가? 많은 뜻이 담겨 있어서 지금 다 다룰 수는 없다. 이미 살펴 본 그대로 인간이 윤리적으로 선해져서 천국갈 수는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과 공적으로는 하나님의 합격선에 절대로 들 수 없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착해야 천국 간다고 가르쳤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예수님만은 그 생각이 오히려 하나님을 불공평한 자로 전락시키기에 오직 그분 앞에 항복하라고 요구하셨다는 뜻이다. 그것도 당신께서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 대신 다 감당하시고서 말이다.
한번 가만히 따져 보라. 거짓말만도 평생 십만 번 넘게 한 죄를 도대체 어떻게 선행과 공적으로 상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진짜, 진짜로 자신을 솔직하게 되돌아보라. 악행과 선행 중에 대체 어느 쪽을 더 많이 행했는가? 정말로 이 땅에선 하늘을 우러러 선하게 살았다고 자신하고 또 죽어서는 나 같은 착한 자는 얼마든지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또 그렇다면 지옥에 가서 세 번이나 놀랄지 말지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에도 하나님이 당장 죽이지 않고 죄는 벌하되 죄인은 용서해주겠다는 제안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율학습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나쁜 짓만 했는데도 담임선생님이 잘못을 고백하는 자는 용서해 주겠다는 제의를 아무 사심과 오해 없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여서 선생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길 외에는 하나님이 죽은 후에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다 만족시키며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선생이 학생을 다루는 방식은 여럿 있을지 몰라도, 길은 없다. 이 땅에서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을 준다는 온갖 방안 즉, 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 창안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입장에선 모두가 죄인이기에 위에서 말한 세 방안 중에 최선의, 아니 유일한 방안을 택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가장 근본 되는 내용이다.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
이런 근본을 모르니까, 일부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이 성경을 보는 시각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성경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적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말하자면 여러 구원을 얻는 방안 중에 또 다른 하나를 가르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성경을 잃어보고 싶은 소망이나 꼭 읽어야만 할 당위를 구태여 느끼지 못한다.
아니다. 정 반대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도는 도무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책이다.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은 썩어빠진 더럽고 추한 존재라고 선포하고 있다. 단 한 명도 하나님의 합격선에 들 수 없기에 지옥으로 보내야 마땅하다는 부인하려야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파헤쳐 놓은 책이다. 실제로 경건하고 심오해야 할 종교 경전에 도리어 갈 데까지 간 음란 포르노와, 최고로 잔인한 폭력과, 온갖 위계와 사기와 시기와 음모가 넘실대는 드라마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것만으로 그치면 인간에게 절망 밖에 주지 못한다. 신약과 구약으로 나뉘는 분기점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있다. 인간으로선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절망 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소망이 풍성하고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누구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새롭고도 영원한 생명을 그분이, 인간이 스스로 터득해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실제 체험으로 직접 주신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자신의 영적 실상이 가난하다고 자인하는 자는 성경을 열린 마음으로 읽어보려 한다. 그러지 못한 자는 성경도 단순히 다른 종교 경전과 동일할 것이므로 따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최소한 나중에 천천히 여가가 나면 읽어 보리라 작정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교인들 중에도 그러한 자들이 많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스스로 선택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또 역으로 말하면 열린 마음 즉, 자신의 영적 실상이 가난하다고 인정하고 믿으면 성경 안에서 십자가 진리를 발견하고 골고다 십자가 앞으로 벌거벗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사후 심판에 대한 인식에 따라 인간은 두 종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착한 자가 천국으로 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와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해야 한다는 자다.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기에 나는 얼마든지 스스로 선해져서 천국 갈 자신이 있다고 하는 자와 도무지 그럴 수 없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다. 성경을 단지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여기는 자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계시해 놓은 책이라고 여기는 자다. 지옥 가서 세 번 놀라는 자와 천국 가서 세 번 놀라는 자다.
만약 이런 분류가 싫다면 유럽과 북미 선진국들의 지성인들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믿고 살면 그만이다. 풍요한 물질과 첨단 기술이 주는 안락함만 구하면서 더 이상 인생의 근본적 고뇌에 대해 심각하게 갈등할 필요가 없다. 오직 지금 주어진 순간에 어떻게 자기만족을 찾느냐만 유일한 관심사로 삼으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생각과 방식으로 살던 간에 하나님은 있으면 절대적으로 있고 없으면 절대적으로 없다. 또 절대적으로 있다면 심판도 절대적으로 있고 그 절대적 구원과 심판의 길도 하나뿐이다.
3/14/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