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6:26) 환난을 경(輕)히 여기지 말라.

조회 수 875 추천 수 39 2010.02.23 18: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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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경(輕)히 여기지 말라.


“여호수아가 그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6:26)


이스라엘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들이 행한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성 주위를 7일간 침묵하며 행진한 것뿐이었습니다. 성벽 위를 전차 두 대가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했던 진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성을 주셨다”라는 마지막 외침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성안의 모든 것이 진멸되었습니다. 고대 중근동의 자랑이었던 여리고는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지어졌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이 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벧엘 사람 히엘은 아합이 북왕국을 다스릴 때에 여리고를 건축하려 터를 쌓다가 큰 아들을, 문을 세울 때에 막내아들을 잃는 벌을 실제로 받았습니다.(왕상16:34) 하나님이 이미 심판하신 것을 인간이 다시 회복시킬 수는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일부 이단 종파에선 믿지 않고 죽은 자를 위해 대신 침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온전히 참회하지 않고 죽은 자도 연옥에서 응분의 벌을 받거나 산 자가 대신 공적을 쌓으면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도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모든 사람은 죽게 마련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너무나 간단한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한 번뿐이라면 당연히 심판도 한 번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같은 건물을 다시 지어도 엄격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관여로 하나님이 일단 내린 영원한 심판을 취소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 상상이라도 하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입니까? 그것도 연약 무지하며 죄에 찌든 인간의 공적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피 흘림이 없이는 결코 죄 사함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심판을 강조한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감당하시려고 단 번에 드리신 바가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8절)

죄인을 구속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해서 한 사람에게 구원 얻을 기회가 두 번 있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와 관련 있습니다. 지성소에서 다시 나오면 백성들의 죄가 사함 받았고. 그러지 못하고 죽으면 사함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시어 다시 나타남으로 영단번의 속죄가 이뤄진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믿는 이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재림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믿지 않고 죽은 가족과 친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대단합니다. 긍휼에 풍부하신 하나님이 죽은 후라도 구원 받고자 하는 소망과 열의와 함께 다시 참회하면 용납해주시겠거니 기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청지기로, 또 당신의 교제 대상으로 삼아 창조하신 후에 심히 좋아하셨던 인간에게마저 그러합니다. 특별히 영원한 구원과 심판은 오직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행하실 뿐입니다.

독선적으로 당신의 권능만 유지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에 인간이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진짜 원인은 그분은 죄만은 철두철미 저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품어주려는 당신의 사랑의 세기와도 견줄 수 없습니다. 아니 죄를 저주하는 것이 바로 당신 자녀를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의 방식입니다.

그분에게 모든 것이 용서가 가능해도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망각, 무시, 방임, 타협, 심지어 경시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하지 않고 넘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일단 잘못했으니 반드시 벌을 주고야 말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만큼 당신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후의 또 다른 구원 기회는 실질적 이유로도 비논리적입니다. 구원은 죄에서, 특별히 그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죄는 반드시 한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인합니다. 그렇다면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죄 지을 수 없으며 또 제 삼자는 더더욱 참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제 2의 기회가 생길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습니다.

믿지 않고 죽은 자의 운명이 안타까울수록 더욱 살아있을 때에 전도했어야 합니다. 그들 앞에 심판이 너무 환히 보이기에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보여 주여야 합니다. 전도와 동시 혹은 그 이전에 정말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면에서 주님을 향한 감사, 찬양, 경배가, 또 주님에 의한 기쁨, 만족, 평안이 실제로 풍성하게 넘치고 있음을 그들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껏 자기들의 살아온 방식과 생의 목표가 전혀 틀렸음을 인식하고 영원에 대한 사모가 생기도록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죄임 됨을 심령 깊숙이 찔림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는 더더욱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에 한해서 살아 있을 때에 이미 구원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십시오. 기독교에선 죽은 후의 심판은 불신자에 한해서이며 그것도 딱 한 번뿐으로 제 2의 기회는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신자더러 가족 친지를 향해 예수 안에서 풍성한 참 인생을 영위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라는 것 아닙니까? 불신자를 그냥 방임했다가 죽으니까 옳다구나 기다렸던 것이 왔다고 심판하는 무정한 분이 아닌 것입니다.    

불신자가 죽은 후에도 구원의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참 신자답게 살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온전히 알면, 죽은 후는 기회가 없기에, 이미 받은 구원이 얼마나 귀한지 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정말 시급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나아가 예수 안에 사는 삶이 너무나 풍성하기에 주위에 그분을 소개해 주고 싶은 열망이, 최소한 소원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기의 설명이 단지 십자가 구원이 모두에게 절실하고 시급하다는 뜻으로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환난이 닥칠 때에 현실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에 의해 이미 무너진 여리고 성을 다시 쌓는 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성을 다시 쌓은 자도 현실적 요충지가 쓸모없이 버려져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 무너짐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따지지 않고 말입니다.  

신자가 겪는 환난이 반드시 죄에 대한 심판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에 일일이 대응되는 징계는 아닐지언정 그 동안의 회개치 않은 여러 잘못이나, 현재 하나님과 영적 교제에 심각한 장애가 생긴 결과일 수는 충분히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미 내리신 것이라면 영원한 심판뿐 아니라 현실적 징계도 마땅히 감수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안에 담긴 그분의 뜻부터 자신의 영적 실상과 견주어 따져 보아야 합니다.

현실적 어려움만 없애 달라 매달리는 것은 아무리 기도라는 종교행위를 했을지언정 여리고 성을 다시 쌓아 더 큰 징계를 부르는 길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신자를 무조건 사랑하니까 기도만 하면 바로 없애 줄 것이라고 환난을 경(輕)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환난을 중(重)히 여겨 자신을 되돌아볼수록 더 큰 은혜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신자의 복과 화는 하나님을 경히 혹은 중히 여기느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2/23/2010

김순희

2010.02.25 12:29:21
*.161.88.93

오랜 신앙생활의 경력이 있지만 살아 있을 때 구원이라는 가르침은 별로 받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천국보험을 들 듯 주일에 보험료 지불하려 교회에 출석하고 또 이런 저런 헌신과 전도에 열심이면 이 땅에서도 복 받는다라는 가르침만 받고 살아왔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와서 알게된 귀한 말씀들은 마치 판도라의 보석상자 같았습니다. 열으면 열을 수록 귀한 말씀들이 쏟아져 내리는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키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알게된 진리들이 너무 감사하고 진귀하여서 매일 이 샘을 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간 배워온 잘못된 가르침을 하나씩 뽑아내는 작업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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