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6,17) 과연 악이 창조에 포함되었을까?

조회 수 895 추천 수 45 2009.12.24 16: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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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악이 창조에 포함되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날이 갈수록 세상에는 죄악이 만연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죄악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칭(?) 의인들이 꽤 있습니다. 왜 의로운 자는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불공평할 뿐 아니라 세상의 악을 방치하는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기에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합니다. 아예 신은 없거나 죽었다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죄악의 근원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셈입니다. 죄악을 실제로 범하는 이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선악 간에 공평한 심판을 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죄악이 넘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모든 사람이 그분을 잘 믿었을 것 아니냐고 따집니다. 죄 지은 자가 하나님께 벌 받아 불행을 겪는 모습을 보면 누가 감히 죄를 짓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을 배반할 것을 미리 아시고도 선악과 금령을 제정했다고 불만입니다. 마치 개구쟁이들이 담 넘어 뻗쳐 있는 감을 따먹으리라 빤히 알고도 그러기만 하면 벌주려고 담장 뒤에 숨어 있는 심술쟁이 할아버지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악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방관했으니 그분에게 책임이 대부분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핑계이자, 억지 중에 이런 최고 억지는 없습니다. 어쨌든 남의 감나무에서 주인 몰래 감을 따먹은 것은 아무 변명이 필요 없는 잘못입니다. 설령 할아버지가 담 뒤에 숨어 있었든 말았든 모든 귀책사유는 개구쟁이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억지는 그나마 봐줄 만한 건더기가 있는 편입니다. 개구쟁이들의 입장에선 조금 억울한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또 미처 철이 들지 않은 탓으로 돌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아주 고차원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비방이 존재합니다. 아예 하나님을 악의 형성자 내지는 허용자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논리인즉 선만 있어선 아무 의미가 없으며 또 선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악이 있어야 선이 귀한 줄 알고 또 선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논리입니다. 선을 더 선답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악을 직접 만들었거나 최소한 의도적으로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자연세계의 동식물이 천적(天敵)이 있음으로써 생명력이 더 강해지는 현상을 그  강력한 논거로 들면서 말입니다.    

언뜻 합당해 보이지만 하나님에 대해 또 그분의 창조에 관해 전혀 무지하다는 증거입니다.  인본주의적 사고가 다다를 수 있는 논리의 한계를 노정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고의 중심에 둔다면 당장에 부인될 수밖에 없는 사상입니다. 창조를 인정한다면 이미 그분 중심으로 모든 사고체계를 가동시켜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토기에 불과한 인간이 토기장이이신 그분의 뜻을 헤아리려 드는 큰 잘못을 범한 꼴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선이십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원한 빛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세상에는) 없습니다.”(막10:18) 그분에게서 어둡고 추한 악이라고는 단 한 치라도 도출될 수 없습니다. 악을 만들거나 조장하기는커녕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는”(약1:13)데 어찌 악을 직간접으로 생성하겠습니까?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선악과 금령도 아담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그분은 인간을 천적이 있어야만 더 활기차게 되는 동식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아할 정도였으므로 악이 들어오기 전의 인간은 너무나 선한 존재였습니다. 당신과 얼마든지 온전한 교제를 나누며 악과는 담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목적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당신을 배역하여 악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정녕 죽게” 되어 있었다면, 역으로 그렇게만 하지 않았다면 “정녕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 일부러 고생을 시켜 즉, 반쯤 강요하다시피 당신께 감사, 찬양, 경배케 할 정도로 그분은 통이 작거나 심술궂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분께 진심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당신의 모든 선한 것을 풍성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속한 세상에 선만 있다고 해서 결코 선에 대해 약한 인식을 갖거나 또 무료해지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로선 악과 대비되어야만 선의 정체성이 나타난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착오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그분의 선을 선답지 못하게 훼방, 왜곡, 변질 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일단 작동되면 그분의 모든 좋은 것이 100% 완벽하게 발휘됩니다. 하나님 하시는, 그것도 선을 행하는데 막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한 기독교 학교에서 천국에 관해 설명하는 교수에게 어떤 학생이 좋은 것만 항상 있다면 정적이고 지루할 것 같다고 질문했습니다. 교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열렬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정적이겠는가? 항상 좋아했던 동일한 음악을 이전에 갖지 못했던 더 벅찬 즐거움으로 들을 수 있다면? 앞으로 생길 어떤 일에 대해서도 한 치의 잘못을 느끼지 않는 기분으로 아침에 잠을 깬다면? 자기 내면 깊숙한 곳을 직시할 때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좋고 아름다워 보인다면? 마치 공기인 것처럼 하나님 그분의 존재를 숨 쉬면서 살아간다면? 또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게 호흡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런 축복을 함께 경험하는 모든 이들끼리 그분의 사랑으로만 서로 사랑할 수 있다 해도 과연 지루하겠는가?”

천국에선 아름다움과 진실과 선함이 갈수록 더 충만해 가는 나날을 경험합니다. 절대로 지루하거나 정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재치 않고 또 그분과 교제하지 않는 상태에선 아무리 선만 있다 해도 지루할 것입니다. 단순 작업에만 매달리는 공장 같은 세상에서 악을 아예 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기계 인간들끼리만 살아갈 것이니까 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온전한 선을 택하여 누리고 나누는 즐거움이라곤 전혀 없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선에 지루함과 정체함과 허무함 등이 내포될 가능성은 완전 제로입니다.  그분의 선이 실현되면 반드시 선이 더 확대재생산 될 뿐입니다. 반면에 그분을 멀리하는 악은 반대 방향으로 확대재생산 됩니다. 세상의 죄나 환난이 의로운 삶과 기쁜 인생에 도움이 되는 필요악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아주 틀린 생각입니다. 세상이 왜곡, 모순되어 보이고 죄악이 만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니 묵인할 의도에도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던 것으로 인간이 타락하여 얻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이 땅을 향해 아담이 타락한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배역하여 죄악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나 동행하며 그분과 너무나 아름다운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서 정말로 천국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두 사람 상호간에도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죄가 개입되기 전이라 두려움과 수치가 없었다는 뜻만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 숨길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온전한 사랑만이 그 관계를 잇는 유일한 근거이자 힘이었습니다. 당연히 모순, 왜곡, 변질, 거짓, 위계, 분노, 저주 등은 한 치도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선이 그들 사이에도 선으로서 온전하게 작용하여 선이 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오직 선만이 충만했습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할 줄을 미리 아셨고 또 그에 대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비 되어 있었다 해도 당신의 창조는 분명히 인간의 선함만을 의도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은 제발 먹지 말라는 너무나 강하고도 유일한 바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매일 매일 선이 더 충만해지는 삶을 살라는 그분의 열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그 열망은 무참히 부서졌습니다. 최초 인간들은 동산의 모든 실과를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영생하는 생명나무 실과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단 하나 먹을 수 없는 과일은 선악과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생명나무까지 먹어서 온전한 선의 상태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아예 작정하고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쫓아내기 이전에 그들의 마음이 에덴에서 먼저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인간이 그런 온전한 선을 누리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계21:4)

처음 것이란 첫 사람 아담의 배역으로 불러온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대로 정녕 죽게 된 것입니다. 인간끼리 참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게 감추거나 속이면서 서로에게 잘못을 전가하기에 더더욱 부끄럽고 두려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선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너무나 신나는 소식이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온 천하에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마지막에 이뤄질 그 천국이 이미 이 땅에 들어왔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거듭남이 한 죄인에게 임하면 이 땅에서부터 이미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7-19)

처음 것이란 처음에 창조된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온전한 선이 실종된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도 서로 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예비 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것의 형벌인 죽음으로 그 배역의 모든 죄를 씻었기에 이제 그분의 후손이 되는 자는 정녕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자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와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처음 것의 잔재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세상 속에 살아야만 하며 또 자신의 내면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잔재들은 주님이 다시 오셔야만 완전히,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이라도 신자는 적극적으로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 활동에 적극적 열성적으로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면야 당연히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긴 하지만...) 예의 신학교수가 천국을 묘사한 대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분을 호흡하며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십자가 진리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그분만 의지하며 기도하며 순종하면 주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지고 발휘됩니다. 우리가 겪는 슬픔, 눌림, 갈증, 애통, 고난 등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셨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한숨을 막아주셨지 않습니까?    

신자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미 들어왔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은, 현실의 형통이 절대 아님, 것입니다. 영생의 본질이 어떤 것입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따라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나가며 묵상하는 일이 바로 천국을 침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분의 뜻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반면에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정녕 죽게 된 인간이 악의 노예가 되어서 그 뜻과는 달리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지 철두철미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즉, 악이 형통하는 세상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둘째 아담으로 보내어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신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더 깊이 알아나가며 그 지혜에 올바르게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이 우리를 통해 놀랍고도 충만하게 확대재생산 됩니다. 선만 있어도 절대 지루하거나 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새 생명이 더욱 활력 있게 넘치게 됩니다.  

세상에 악이 만연하고 자기보다 나쁜 악인들이 형통하는데 반해 자기 같은 의인은 고생만 하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불만하거나 부인 외면 저주하는 자들 앞에 기다리는 운명이 무엇입니까? 정녕 죽는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반대쪽 악의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택하여 짊어진 악으로 인해 악이 확대 재생산되는 상황에 그저 눌려 지내다 죽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과의 연결 고리라고는 아예 없습니다. 다른 말로 그런 불평을 할 자격조차, 아니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으로 바뀔 것이라곤 전혀 없기에 헛되고 헛된 넋두리이지 않습니까?

신자는 선에서 더 나은 선으로 그래서 최고의 선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조차 악에 눌리고 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악은 모양이라도 멀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 속에 타락한 영혼의 찌꺼기가 남아서 날마다 괴롭힐지라도 날마다 우리는 천국을 침노하여 차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얼마든지 이겨내고 씻어내고 깨끗케 하며 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속을 채울 수 있습니다.

단지 구원 받아 지옥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예수 믿은 보상이라고 여기면 참으로 가난한 신앙입니다. (최근에는 이마저 확실치 않은 교인들이 너무나 많지만...) 얼마든지 하늘의 보배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옮겨와 심고 물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당신께서 정말로 놀랍고도 아름답고 거룩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분명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요15:16,17)

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고 확언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이 심히 좋아했던 타락 전의 상태로 회복되었기에 그분의 선으로 더 큰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과연 그러합니까? 최소한 그럴 수 있다고는 확신하기에 올해와 다른 내년을 살 준비와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요컨대 남의 형통에 비교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을 믿음이라도 갖춰졌는지 묻는 것입니다.

12/24/2009

김광찬

2009.12.25 00:50:59
*.169.140.15

"그예다"(그런 예수는 없다) 가족들 모두모두 내년(2010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이 날마다 순간마다 더욱 충만히 채워져
가길 소망합니다. 포도나무되신 예수님에게만 꼭 붙어있는 가지들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신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땅에 보여주며 포도나무의 가지가된 우리에게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지는 내년을 기대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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