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4) 모세가 부름 받은 개인적 이유

조회 수 1076 추천 수 55 2009.09.03 17: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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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부름 받은 개인적 이유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3:4)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불러내는 장면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이상한 광경을 보려고 오는 그의 이름을 하나님은  두 번이나 불렀고 모세는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어느 민족도 보지도, 아니 꿈도 꾸지 못했던 역사상 가장 큰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이제 곧 베풀려는 찰나입니다.

출애굽의 의미는 참으로 심오하고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구속하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가장 확실한 증표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 받는 십자가의 원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해서 행한 노력과 수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이 땅의 시공간 안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채워져 들어온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열 번의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조차 한갓 배경장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당신 백성을 향한 그분의 큰 사랑 앞에선 그 권능도 작아 보입니다.
  
타국에서 사백 년간이나 노예로 고생케 한 것이 어찌 사랑이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후예들을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창성케 되도록 보존시킨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겨우 70여명으로 다시 가나안 땅에 되돌아갔다면 일개 떠돌이 집단에 그쳤거나 어쩌면 일찍 멸족 당했을지 모릅니다.

당시의 가나안은 여러 소부족들의 싸움터였기에 이스라엘이 조금만 창성하면 어떤 부족이라도 눈의 가시로 여기고 바로 제거하려 들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국으로 군사 경제 등에 부족할 것 하나 없기에 이스라엘을 400년이 넘도록 노예로 부릴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이백만 가량으로 숫자가 늘자 비로소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육체적 고역이 고달프긴 했어도 먹고 마시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강도, 전쟁의 위협은 물론 생활고에 시달릴 염려도 없는 최고의 보호막 아래 지낸 셈입니다.

하나님이 이제야 모세를 불러낸 것도 이스라엘을 4백년이 넘도록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오랜 동안에도 자기 백성을 단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노예로 고생하는 가운데도 창성하는 것이 두려워진 바로가 남아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이스라엘로선 최초의 환난이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산파에게 지혜를 주셨지 않습니까? 또 이미 예비 해놓은 모세를 곧 바로 태어나게 하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모든 미래를 당신의 뜻 안에서 확실하게 보장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의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절대로 변하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언약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이루십니다. 가나안의 죄악이 관영하여 진멸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애굽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놓으시되, 사(四) 대가 흐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창15:16)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뤄졌지 않습니까?

물론 이스라엘은 고역이 심해지자 여호와께 구원해달라고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의 세기나 믿음의 크기를 보고 비로소 구원을 결심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억울하게 당하거나 애굽보다 착해서 구해주기로 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을 향한 당신의 긍휼 때문에 구원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것이 바로 당신의 영광이었습니다.

또 그 구원 과정에 이스라엘이 힘을 보탠 것이라고는 단 하나 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서 당신의 역사를 바라보게만 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이스라엘로 다시는 애굽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합니다. 출애굽 후로도 그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말입니다. 구원의 취소가 없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바라 볼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만 관심을 쏟다보니 주연 배우로 부름 받은 모세의 개인적 처지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창성케 하여 가나안 정복을 위해 준비시켰듯이 하나님은 모세 또한 바로의 궁정에서, 미디안 광야에서 앞으로의 사역에 가장 합당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너무나 놀랍고도 정밀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본인은 최고로 외롭고도 고달픈 생을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무려 80년이나 외톨이로, 정확하게는 시쳇말로 왕따 신세로 지냈습니다. 그는 동족과는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로 호사스럽게 자랄 때나, 이방족속 미디안과 양치기로 함께 생활할 때나 그에게 온전한 정체성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80년을 한 결 같이 나그네로 지샜습니다. 어디를 가나 물 위에 떠있는 기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다른 말로 어디에서도 온전한 소속감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물론 동고동락하며 기쁨과 슬픔을 가슴과 가슴을 통해 함께 나눌 진정한 이웃조차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품었던 인생의 목적마저 완전히 상실한 채 그러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진 곳에서 어느 누구도 알아봐 주는 사람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소속감은 물론 이제는 자신의 존재감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탈진해 있는 그를 비로소 불러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 4백년 보다 외톨이 인생 80년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를 완전한 밑바닥까지 낮아지게 한 다음에 당신의 권능으로만 출애굽을 이룰 작정이었습니다. 대신에 모세로 봐선 어떻게 됩니까? 드디어 외톨이 신세를 면한 것입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내고 여생을 준비해야 할 단계에 이르러서야 그는 온전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주역을 맡은 것은 틀림없지만 그도 아무 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만히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지팡이 하나 들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따랐습니다. 바로와 맞상대할 때조차 대변인 아론을 통했지 않습니까? 대신에 그는 너무나 신이 났을 것입니다. 삶의 보람과 가치와 의미를 찾았을 것입니다. 정말 자기 모든 것을 바쳐서 섬기고 사랑할 대상이 생긴 것입니다. 가슴 속을 완전히 털어놓고서 자신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동로들을 생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후예이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신 된 것이 오직 여호와와 그의 백성들 안에서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정체성은 상실 내지 혼동되었었고 온전한 소속감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모든 공동체가, 아니 자신부터 사단의 농간 아래 있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표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일들은 허공을 치는 향방 없는 달음질이었을 뿐입니다. 사실상 완전 외톨이였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어 원인 모르게 갈급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며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지난 인생이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였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을 떠나선 어떤 선한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 배역하였고 세상 죄악을 쫓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새로운 영을 우리 속에 심어주었습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야 확립할 수 있기에 이제는 그분을 아는 지식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당신께서 항상 함께 해주심으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외톨이 신세가 아닌 것입니다.

모세를 출애굽의 기적을 이룬 위대한 믿음의 용사로만 이해하면 여전히 연약하고 매일 쓰러지는 우리와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 됩니다. 그로선 하나님께 불려 나왔을 때에 지난 80년간의 고아 같았던 신세에서 정말 모든 힘을 다하여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에 다시 속하게 된 기쁨이 가장 컸을 것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애굽은 무찌르기만 하고 미디안 족속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노예 생활을 하던 동족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천국행 티켓을 확보한 것에 제한시키면 안 됩니다. 모세처럼 주의 일을 하도록 불려나온 것입니다. 영적 외톨이 신세를 면하고 사랑으로 섬길 동료들을 만나 하나님의 통치를 함께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무조건 전도 선교에 힘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로만 살고 죽는 삶의 본을 세상 사람들 앞에 보여서 똑같이 그렇게 살고 싶은 자들을 자꾸 생기게 해야 합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십시오. 자기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기 전까지는 아마도 구원에 대한 확신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선 그를 예정 선택하여 당신의 종으로 삼을 준비와 훈련을 어김없이 진행시켰지만 정작 본인은 끝없는 영적 혼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인생을 포기할 마음조차 여러 번 생겼을 것 아닙니까?

다른 말로 본문의 순간이 모세로선 최초로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는 즉,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시점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 믿음을 갖게 된 것과 주의 일에 부름 받게 된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신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려고 세상에서 따로 불림을 받아 예수를 알게 한 다음에 다시 세상으로 다시 보내어진 자입니다.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 전에는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어도 사실은 완전한 외톨이였다는 것입니다. 고아로 왕따로 사는 것이 너무나 불쌍해서 하나님이 불러내어선 이제는 참 사랑으로 세상을 섬겨 정말 아름답고 거룩한 교제를 해보라고 다시 돌려보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할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위업을 달성하라고 불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대로 이루실 영역입니다. 신자는 단지 자기에게 붙여준 섬길 대상을 온전히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불려 나왔을 때에 앞으로 맡을 임무에 대해 온갖 염려와 두려움이 컸지만 동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았을 것 아닙니까?

그럼 “예수를 믿습니까?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오직 예수로 인해 살고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가 없었다면 자신은 세상 신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바로 고아이자 왕따였을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는 절대 혼자가 아님을 즉, 세상 모두가 자기를 외면해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항상 함께 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또 그런 확신이 있기에 자기에게 붙여준 모든 사람들을 참 사랑으로 섬기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받고 있는 주님의 그 사랑을 나눠주고픈 열정과 소망으로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고 섬길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음성은 분명히 들었는데 아직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대답은 미루고 있는 셈입니다. 구원조차 받지 않았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영적 고아 신세를 면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럼 주위에 섬길, 사실은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까?

9/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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