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2:1,4) 오랜 죄의 벌이 훨씬 더 중하다.

조회 수 1129 추천 수 61 2009.09.09 19: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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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죄의 벌이 훨씬 더 중하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찌니라.”(출22:1,4)


세상 법률은 죄에 대한 배상과 심판을 범행 동기에 따라 차등을 줍니다. 또 죄의 질과 양에 따라 형랑이 가감됩니다. 범인의 정신 상태나 주변정황 등은 참작해주는 반면에 범죄에 고의성, 습관성, 잔혹성 등이 개입되면 벌이 아주 무거워집니다. 구약 율법에도 그런 원칙은 엄격히 적용되었습니다. 분문에서도 소를 훔친 벌이 양보다 더 중합니다. 소가 값이 비싸고 농경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또 몸집도 훨씬 커기에 훔치려면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는 고등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특이하게도 훔친 가축이 살아 있으면 2배로, 팔았거나 죽였으면 4-5배로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선 장물을 처분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도적질을 계획한 것입니다. 반면에 살아있다면 훔쳐 가서 자신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고의로 훔쳐간 것은 동일한데 왜 배상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비유컨대 이전 가난한 시절에 텔레비전이 너무 보고 싶어서 몇 대나 있는 부자 집의 것 하나를 훔쳐서 팔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는 식의 정상을 참작해 준 것입니까?  

물론 그런 이유가 일차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더 깊은 차원을 다룹니다. 우선 가축도 하나님이 부여하신 생명인지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피해자에겐 가족이나 다름없을 뿐 아니라 생업에 아주 중한 몫을 하는 귀한 자산입니다. 단순히 값이 비싸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축이 주업인 유대인에게 가축을 잃었다는 것은 먹고 살 길이 막연해졌다는 즉, 피해자의 생명에 지장을 줄만한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생업을 방해하는 죄는 다른 도적질과는, 예컨대 가재도구 하나 훔친 것과는 그 질이 다릅니다. 살아 있는 가축은 돌려주면 다시 생업을 이어갈 수 있기에 훔친 죄만 추가로 벌을 받으면 됩니다. 반면에 죽였거나 없애버린 가축은 더 이상 번식할 수 없는 폐해까지 만듭니다. 훔친 기간 동안에 출산했을지 모르는 새끼의 몫까지 갚아야 합니다. 생업이든 번식이든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관련 있기에 죄가 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칫 간과해버릴 영적 원리가 더 있습니다. 범죄의 고의성이 단순히 범죄를 계획하고 결행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사고인지 따지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이 궁한지 욕심이 과한지의 동기만 따져선 많이 부족합니다.

도적질한 소나 양을 잡은 것은 고기를 먹어치운 것이고, 판 것은 돈으로 챙긴 것입니다. 그래서 식욕과 물욕이 그 동기의 전부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고기를 먹으며 즐겼고 돈으로 다른 유익을 산 것입니다. 분명히 죄인 줄 알고도 그로 파생하는 쾌락을 즐긴 것입니다. 죄악을 스스로 찾아가 탐닉한 것 자체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동기입니다.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사59:7)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서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시36:4)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3-15)

죄의 동기가 욕심이 과했다는 정도로 그치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서로의 허물을, 아니 죄를 덮어 감싸주려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또 그런 위선적 심리적 핑계를 대는 것이야말로 바로 인간 죄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과 연결해서 그분을 벗어나고 그분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죄란 현실의 유익을 넘어 죄가 주는 표피적 감각적 흥분상태를 신나게 즐기려는 것입니다. 정신은 마비되고 영혼이 타락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은 것 자체가 죄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나 욕심만으로 범죄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범과(犯果)가 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행할 일이 어떤 일인 줄 즉, 하나님을 배역하는 엄청난 일임을 분명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선악과가 갖다 줄 미각의 즐거움과 자신이 지혜롭게 되어 세상을 자기 멋대로 주무를 기쁨에 들떴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롯해 그 일을 방해하는 사물은 적극적으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 한 것입니다. 죄 외에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 쾌락에 이미 탐닉된 것입니다.
        
나아가 훔친 소나 양을 팔아치우거나 죽여 버린 벌일 중한 이유는 죄 된 행동과 그 결과를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후라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죄책감조차 완전히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전에 아예 죄라고 생각지도 않았거나, 알아도 짐짓 무시했거나, 죄가 주는 쾌락에 취해 오히려 잘하는 일인 줄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말입니다.  

반면에 훔친 양과 소가 아직도 살아서 자기 집에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생계가 궁하거나 욕심이 앞섰어도 그 장물을 볼 때마다 괴로울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자꾸 되살아나서 필연적으로 부끄럽고 두려워질 것입니다. 이미 그 죄의 형벌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또 산 채로 돌려주면 피해자의 생업과 그 가축의 번식은 이어집니다.

죄의 결과까지 없어진 상태에선 죄책을 느낄 하등 이유가 없어집니다. 아니 죄가 주는 쾌락에 탐닉해서 아무 죄의식 없이 죄를 즐겼기에 망각할 죄도 사실상 없습니다. 또 죄를 자꾸만 망각하면 결과적으로도 망각이 습관으로 굳어질 뿐 아니라 죄에 무감각해지며 어떤 죄도 죄로 심각하게 여지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따져도 도적질한 소나 양을 잡거나 처분한 경우 그 형벌이 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은 죄가 추가로 생긴 데다 망각해버린 더 중한 죄까지 보태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를 망각하는 까닭은 미처 죄인 줄 몰랐거나 처음부터 죄를 알고도 오히려 즐겼기 때문입니다. 죄인 줄 몰랐던 죄를 바로잡기 위해서 율법이 먼저 와야 했습니다. 무엇이 죄인 줄 정확히 알면 범하지 않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잡거나 팔아치우면서까지 죄를 즐겼습니다. 심지어 의인들 보는 앞에서 가축을 약탈해가거나 그 주인까지 죽이는 것이 인간의 실태였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악은 율법으로 고쳐질 수 없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인간의 죄를 지적할 뿐입니다. “율법이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4:14)

율법으로 고쳐질 죄는 본문으로 따지면 훔친 가축이 살아 있는 정도의 죄입니다. 두 배로 돌려줄 수 있는 양심이 그나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죄를 망각하는 죄와, 죄를 즐기는 죄까지 사하려면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은혜가 따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0,21)

본문처럼 망각한 죄의 벌이 더 크다는 하나님의 뜻에 복음의 비밀과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반나절이 넘도록 온갖 죄를 회개하여 이제는 사함을 얻었나보다 하고 마음의 평강을 얻어 일어나려는 순간에 더 큰 죄악이 불현듯 떠올랐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또한 루터처럼 망각한 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게 모르게 허다한 죄를 지었고 심지어 죄인 줄 알고도 짐짓 모른 체 쾌락에 빠진 적도 얼마나 많으며, 아예 죄가 아니라 좋은 일이라 생각한 적도 얼마나 많습니까? 망각한 죄의 벌이 더 중하다면 우리가 망각했던 모든 죄를 다 합치면 대체 그 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도무지 갚을 길이 없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거기다 현실의 유익을 풍성하게 누리고 세속의 쾌락을 신나게 즐기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습니까? 그들과 똑 같이, 아니 더 빨리 화려하고 풍성하게 손쉬운 방법으로 차지하려고 얼마나 많은 수고를 바쳤습니까? 우리 모두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롬1:32) 했던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본 인간의 죄악의 실상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인간이 만든 윤리보다 질과 양에서 훨씬 앞섰기 때문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고서 평생을 경건의 훈련에만 매진해도 그분의 의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즐긴 것입니다. 거기다 죄라고 알아도 회개치 않고 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의롭다고 그분 앞에 고개를 빳빳이 쳐든 것입니다. 본문으로 치면 자기 죄의 4-5배를 갚아도 시원찮을 죄인들이 2배 정도 갚고는 할 바 다한 의인인양 자랑한 것입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는 자를 정죄 견책하지 않은 것만도 그만한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오히려 옳다고 했고 스스로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사형을 곱절, 아니 수십 곱절로 받아도 그 죄를 사할 방도는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도무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는”(시32:1) 길 말고는 말입니다.      

복음 안에 들어온 것은 단순히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수십 수백 번 참수 당했어야 함에도 그 때마다 하나님이 못 본 체 해준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것은 잃었던 수천 개의 생명을 되돌려 받은 셈입니다. 평생을 두고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교수대 아래에서 우리 목에 다시 밧줄을 매었다 풀었다 하는 곡예를 매일 매순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때문에 우리의 그런 곡예를 보고도 여전히 모른체 해주십니다. 아니 그런 우리를 당신의 열심과 의지로 기어이 천국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종국에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모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죄를 절대로 짓지 않는 것입니까? 물론 그럴 수만 있으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신에 죄 지을 때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도 훔친 소나 양이 살아 있을 때에 두 배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최소한 망각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잡거나 팔아 치웠어도 네 배로 돌려드려야만 합니다. 본문 3절에서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 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말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께 이미 받은 축복을 회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지난 죄의 추하고 더러웠던 흔적을 비록 하나님은 잊어주셨지만 우리는 완전히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회개에 게으르며 망각에 빠른지 절대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예수 죽인 것도 우리 몸에 지녀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인간들이 죄와 쾌락을 갖고 하나님의 인내심을, 이미 복음 안에 있는 신자로선 그 다함없는 십자가 은혜를 대상으로 계속 희롱하고 있는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죄를 지어도 회개는 해야 하고, 회개를 못하면 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구체적인 개별 죄의 망각은 해도 십자가 은혜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부정적 죄책감에 시달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 죄인이었던 때에 비해 은혜 안에 들어온 지금의 신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확실히 알라는 것입니다.

9/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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