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9-11) 예수님 앞에서 통곡한 적이 있는가?

조회 수 1209 추천 수 58 2009.06.04 00: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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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앞에서 통곡한 적이 있는가?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요13:9-1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인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식사 전에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이나 노예가 할 일입니다. 랍비가 몸을 굽혀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긴다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너무나 황송해진 베드로가 항상 그랬듯이 그럴 수 없다고 앞장서서 말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는 주님의 답변들 듣자, 이제는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보챕니다.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성마른 베드로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선 순진하고 귀엽기도 합니다.

이 세족사건은 요한복음에만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보다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둔 요한복음이 다른 세 복음서에 없는 사건을 기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사건을 겉으로 드러난 사역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지금껏 제자의 발까지 씻겨주는 예수님의 행위에만 너무 관심을 쏟았다는 뜻입니다. 성도들도 주님을 닮아 서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며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족식은 교회 수련회의 단골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물론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또 본문의 가장 일차적인 해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가 쉽게 간과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배반할 유다의 발까지 씻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발을 다 씻기신 다음에 제자들더러 서로 섬기라고 가르쳤으며(12-20절), 그 후에 유다의 배반을 예고했습니다.(21-29절) 또 그 예고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들은 후에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30절)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발을 씻김으로써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니 씻기신 후에도 한 제자가 배반할 것이며, 또 누가 그러리라는 힌트까지 주면서 재삼재사 뉘우치도록 촉구했습니다.

간혹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도 예수님이 제자로 택했으니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 만약에 그가 뉘우쳐서 배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고도 사역을 계속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구실을 대어서도 기어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을 것입니다.

유다가 회개했어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것이면 엄밀히 따져 그의 배반과 주님의 죽음은 별개의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유다가 배반한 책임은 끝까지 본인에게 귀속되는 것이지 주님과는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결말을 아시고도 그를 끝까지 제자로 받아들였고 또 발을 씻기신 주님입니다. 그분의 정체성을 정말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스승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기 발을 직접 씻어주었을 때 유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또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을까요? 마주쳤다면 주님의 눈빛이 어떠했겠습니까? 분노로 이글이글 탔겠습니까? 이미 사정을 꿰뚫고 있다는 야릇한 표정이었을까요? 그래서 배반을 중지하고 회개하라는 촉구나 경고의 표식이 나타났을까요?

그 어느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인자와 긍휼이 가득 찬 눈으로 정말 안타깝고도 애처롭게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아마 유다도 도무지 그 눈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떨어뜨리거나 외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순진한 랍비는 아직 세상물정에 너무 눈이 어둡다고 비웃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런데 유다를 바라보던 주님의 이 눈빛을 베드로도 똑 같이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62)

유다와 달리 베드로가 스승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설쳤지만 주님은 오히려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또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시쳇말로 “봐라! 내가 뭐라고 했지. 네가 까불어봐야 별 수 있니? 네 꼴이나 제대로 알아라.”는 투로 바라봤겠습니까? 이 경우도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서와 긍휼과 사랑을 담뿍 안고서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윽이 바라봤을 것 아닙니까?

잘못을 저지를 것이라고 동일하게 미리 경고 받은 두 사람이 어째서 반응이 달라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유다에게는 끝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었고 베드로는 야단만 맞았는데도 말입니다. 유다도 예수님이 죽은 후에는 회개했습니다.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3,4) 또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 두 제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다는 스승을 “적극적으로 배반”했고 베드로는 단지 “수동적으로 부인”한 것이 다릅니까? 바늘을 훔치나 소를 훔치나 도둑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유다가 더 큰 잘못을 범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자살로 더 크게 뉘우쳤지 않습니까?

그 차이는 이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 된 행위만 뉘우쳤고 또 그 죄 값을 자살하여 스스로 갚으려 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는 배반만 하지 않았다면 구태여 뉘우칠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겨주실 때도 한 편으로 스승의 낮추어 섬기는 행위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이런 나약한 스승을 따른 자기가 바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스승이) 행한 행위만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앞에서 예수님의 쳐다보는 눈길에 “네 꼴이나 제대로 알아라.”는 뜻이 있었다는 말은 사실 맞습니다. 그를 비난 정죄하는 투가 아니라 진정으로 염려하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는 스승의 예언한 대로 세 번 부인했다는 사실보다는 자기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너무나 치사하고 추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단순히 잘못한 행위를 뉘우친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완전히 발가벗겨서 회개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대성통곡했기 때문입니다. 배반한 행위만 뉘우쳐지면 다시 나가서 “내가 그 사람의 제자가 맞다.”라고 소리치면 그만입니다. 물론 그가 세 번 부인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당연히 그 잘못부터 반성했겠지만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곧바로 자신의 내면의 온전한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빛 하나로 그는 심령의 깊숙한 내면부터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그가 통곡한 눈물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전부를 깨끗이 씻어내는 세정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유다에게 모자랐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큰 은혜와 권능을 받고도 자기 존재 전부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오직 의로운 행동 즉,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 압제에서 해방시키려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혁명가로 알았지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눈치도 채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데스 바네야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 도덕으로만 따지면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뉘우치고 갚는 데는 자살만큼 최강의 의로운(?) 수단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의로운 행위를 중요시 여긴다는 면에선 베드로가 유다보다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기록을 보면 얼마나 의리가 투철하며 매사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책임지려 했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유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한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예수님의 공동체에 회계를 맡았을 만큼 정직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힌트를 듣고도 동료제자들이 그가 배반할 줄을 마지막까지 눈치도 못 챘을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와 유다는 의로운 면에선 용호상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통곡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떠나서 스스로 뉘우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모르고의 차이였습니다. 자기 발을 씻겨준 일에 감동 받았는지 여부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자신의 전부를 걸 수 있는 구주인지 아닌지 판단 여부로 이 두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극과 극으로 나뉘었습니다.

솔직히 따지면 베드로는 제 멋 대로였지 않습니까? 황송해서 발을 씻길 수 없다고 말리다가 금방 또 전부를 씻겨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대제사장의 칼로 하인의 귀를 베었지만 예수님의 꾸중 한 마디에 쑥 기어들어갔습니다. 그 때야말로 정말 자기 목숨을 걸고 항거할 수 있는, 아니 했어야만 하는 때였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의 법정이 베드로로선 자신의 의로움을 세상 앞에 드러낼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였는데 저주하면서 차버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사전 경고가 유다에겐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로, 베드로에겐 끝까지 자기 의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장 의를 뽐내던 둘 다 실패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 치사하고 부끄러운 모습만 세상 앞에 드러냈던 베드로였지만 통곡한 후에는 그 전과 완전히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그분 앞에 자신과 그분의 실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인간의 추함과 더러움을 씻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말씀을 구원의 시금석으로 절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요15:5)을 철저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의의 열매를 맺어볼 것이라고 설쳤다가 반나절도 안 되어 산산조각 나는 처참하고도 완전한 실패를 겪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전부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그분에게 내어드리지 않고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의 진짜 실체가 너무나 더럽고 추함을 깨닫고는 대성통곡한 적이 없는 자는 여전히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보다 더 치사하고 비겁하고 추해도 그분 앞에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분이 깨끗케 해주실 수 있습니다. 당연히 믿은 후에도 시소 타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는 심령을 바로 세울 수 있는 해결책 또한 주님 앞에 나가 통곡하는 것뿐입니다.  

6/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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