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3:18,19) 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확인하는가?

조회 수 1221 추천 수 58 2009.07.09 18: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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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확인하는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眞實)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3:18,19)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2:17)이자 또 “헛것”(2:20)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인 줄 믿고 떤다(2:19)고 합니다. 귀신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일 수는 결코 없지만, 사도가 유비(類比)로 든 뜻은 귀신도 절대자 한 분 하나님은 믿지만 전혀 행함이 없으니 진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도 말로만 믿는다 하고 그에 합당한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당연히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 두 가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들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 사랑은 이미 하고 있다고 말로 시인했으니 그에 합당한 행동은 이웃 사랑을 뜻합니다. 결국 신자가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를 비롯한 대다수 신자가 마음은 원이로되 이웃 사랑을 거의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은 아닌지, 때로는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확실한지 의심이 들 때조차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도 지금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사랑을 해야만 진리에 “속하게 된다”고 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것을 확인하는 기준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구원 받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까?

이 둘의 차이를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나이가 차면 초등학교 학생이 되지 한글 못 깨우쳤다고 입학 금지 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입학하면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실제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설령 아무리 안 해도 학생인 것은 분명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단지 학생인 줄 더 확실히 알게 해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또 공부 못해도 학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본인이 손해입니다. 지성, 감성, 의지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질 수 있는데도 졸업할 동안 젖먹이 같은 수준으로 머문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자라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아름답게 성숙해질 수 있는데도 영적으로 어린아이로 지내다 일생을 마치고 주님 앞에 가선 부끄러운 견책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웃 사랑이 단지 신앙을 성숙시키는 용도로만 그치는 것입니까? 또 어차피 구원은 취소되지 않을 것이니까 시간과 재력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에 가서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구원 받았는지 여부를 점검하는 기준이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웃사랑하지 않는다고 구원 안 받은 것은 아닙니다.

흔히 교인들 중에 주일에 교회 출석하는 것 말고는 믿기 전과 비교해 전혀 변화가 없어 불신자와 좀체 구분이 안 된다고 합니다. 또 불신자 중에도 이웃 사랑에 열심인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인본주의적 사고의 바탕에서만 이웃 사랑을 합니다. 사람은 다 선한 존재이므로 서로 돕고 힘만 합하면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구원과도 자연히 관계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어쨌든 주일날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습니까? 비록 지금 당장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말만 앞서는 종교적 위선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은, 야고보와 요한 두 사도가 이구동성으로 강력히 경계하듯이, 결코 아닙니다. 일단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즉 초등학교에 분명히 입학했다면 분명 구원받은 것이며 취소도 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신자의 이웃사랑은 불신자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해야 합니다. 정성과 열심에서 앞서고 자신을 더욱 희생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은 단순히 “행함”이라고 하지 않고 “진실함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사랑이되 진실한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이는 사실상 모순어법입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당연히 사랑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진실한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는 겉모습만 봐서는 진실한 사랑과 거짓 사랑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진실한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선 보상을 바라지 않아야 하고 또 자기 의가 드러나는 사랑이 아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쓰고 남은 것으로 적선하듯 하기보다는 자기 것을 나눠주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보다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끼리는 모순, 왜곡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은밀히 사랑하고 나면 속으로 자기가 더 자랑스럽고 은밀하게 한 것까지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싶은 심정이 들지 않습니까? 내 잘난 것으로 남을 도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의 열심, 정성, 여유,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귀해 같이 나누는, 정확히 말해선 그분의 사랑 가운데로 남들을 초청하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자기부터 십자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음을 절감해야 합니다. 온갖 죄악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등짐으로써 너무나도 추하게 더러워진 자신의 영적 실체가 예수님의 보혈로만 깨끗케 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자연히 불신자 이웃은 이전의 자기처럼 십자가 구원 밖에서 아주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도 그분의 보호와 인도가 없으면, 나아가 성령님이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은총과 권능을 붙들지 않으면 한 시도 올바로 설 수 없음을 절감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 이웃도 예수님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나와 똑 같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확실해졌습니다. 단순히 이웃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이웃 사랑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혹시 판단 기준이 더 어려워져 구원 여부마저 더 불명해졌습니까?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로만 참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이 가장 절실한 너무나 불쌍한 존재라는 확고한 인식의 바탕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통과하는 파이프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종교적, 도덕적 의무감으로만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에 등한하니까 혹시 구원과 거리가 먼 것인가, 이러다 하나님 벌 받지는 않을지 염려하는 것부터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너무나 풍성하고 귀하여 이웃에게 나눠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이웃 사랑의 본질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고 또 그 진실한 사랑을 맛본 자만이 이웃을 향해 믿음으로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진실한 행함이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해준다고 합니다. 신자의 사랑이 불신자의 그것과 또 다른 특성입니다. 행함이 결코 자신의 의나 세상의 칭송으로 열매 맺거나 목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함은 도리어 신자로 주님 앞에 더욱 겸손히 낮아져서 더욱 가까이 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오직 예수로만 호흡하고 먹고 마시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길 날로 소원하고 그분의 가신 길을 똑 같이 따르며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을 생명을 걸고서라도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진실한 이웃 사랑을 하면 모든 당사자가 충만하고 완전한 사랑을 누릴 뿐 아니라 각자가 주님 앞에 다시 온전하게 서게 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한 없이 갈망하게 되며 그와 동시에 속에서부터 절대 마르지 않는 그분의 사랑이 샘솟게 됩니다. 또 그런 신자들이 모이면 자연히 초대교회 같은 진정한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자 헛것이라고 단정 지은 야고보 사도도 “믿음이 그 행함으로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2)고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는 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한 행함으로 드러나고 또 그런 행함을 할수록 하나님이 그 믿음을 더욱 견고케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본문과 연관해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어떻게 풀었습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3:21-24)

핵심은 이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이웃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마치 불신자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고, 내가 생각해도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도 이미 그분의 십자가가 아니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철저한 확신이 있다면 이미 그분 안에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이웃 사랑을 못한 데에 따른 죄책감조차 들지 않는 법입니다. 내면의 믿음과 겉의 행동이 전혀 다릅니다. 그렇게 된 이유도 십자가 안에서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전의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 중의 괴수였는지 실감하지 못하니까 여전히 자기에게는 선한 부분이나 능력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도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여유분을 버리기 아까워 적선하여서 자기 이름을 높이는 정도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날마다 기도하여 형통하는 축복을 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나와 이웃이 얼마나 연약하며 어리석고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에 빠져 있는 존재인지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와 이웃을 바로 세워달라는 간구가 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좋은 것에서 후히 주시는 주님이 당신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는 기회와 시간과 여건을 신자에게 다 마련해 주십니다. 신자는 단지 그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더욱 큰 사랑을 할 수 있게끔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해 주십니다. 신자의 행함은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진심으로 믿는 신자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분이 행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실상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죽었습니까?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까? 당장에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지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모든 신령한 풍성함으로 당신과 항상 함께 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7/9/2009  

김순희

2009.07.10 13:26:16
*.82.116.16

남은 것 나눠주면서 자랑하던 순간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라고 스스로 외치면서 신앙을 자랑하던 순간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서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혔던 순간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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