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9:5) 발락의 신탁(神託)만 붙드는 신자

조회 수 1126 추천 수 71 2008.06.18 18: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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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락의 신탁(神託)만 붙드는 신자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세상 사람들은, 간혹 신자들 가운데도,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진리를 완전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오해가 예수 믿지 않는 자는 현실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오직 신자에게만 복을 준다는 또 다른 오해를 낳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자만 편애하는 불공평한 분이라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형통과 구원을 얻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나아가 구원도 기독교만 편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모든 죄를 당신께 자복하고 정말 겸비하게 나오는 자라면 누구라도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자기 옛사람을 죽이며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인종, 문화, 관습, 언어, 아니 종교와도 관계없이 다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신자가 예수를 믿어 받는 복은 우선 지옥의 형벌을 면하는 것이며, 또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 천국 시민에 합당하게 자라는 것이며, 나아가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은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의 먹고 마시는 문제의 형통은 그분의 신자에 대한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불신자가 예수 안 믿었다고 해서 당신의 현실적 축복에서 제외되거나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선 현실은 하나님 대신 돈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돈에 대한 목표지향성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소유한 자가 형통하기 마련입니다. 시쳇말로 돈 독이 오른 자일수록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버니까 자연히 부자가 됩니다. 반면에 돈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목표로 사는 신자는 자연히 세상에선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후 심판을 하기 전까지 불신자들을 사단에게 한시적으로 맡겨 놓았습니다. 따라서 사단이 세상을 다스리는 궁극적 목표는 언제나 그들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그 목표를 이루는 최적의 수단은 돈에 눈이 멀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형통과 안락만 구하는 자들에게 그 바라는 대로 이뤄지도록 사단이 도움을 주어서 구태여 하나님을 찾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불신자가 신자보다는 더 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런 일에 하나님까지 힘을 보태준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우선 불신자나 사단이 제 마음대로 하도록 묵인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둡니다. 육신의 일을 좇아서 육신의 열매만 맺도록 하십니다. 나아가 그들에게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골고루 내립니다. 당신께서 창조한 피조세계를 신실하게 운행하시므로 생활여건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동일합니다. 단지 그들이 이 땅에서의 형통만 좇으므로 일시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뿐입니다. 그들로선 하나님께 불평할 건더기라고는 전혀 없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복을 줄 때도 있습니다. 요셉이 가정총무를 “맡은 때부터”, 즉 “맡자마자” 복을 주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그 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습니다. 가정 내부와 외부의 모든 일이 다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 성실하고 지혜롭게 일을 처리한 면도 분명 있지만, 성실과 정직 대신 요령과 거짓이 더 잘 통하는 세상에서 하는 일마다 형통했다면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자기들 신자에게만 복을 주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신이야말로 편협하고 배타적입니다. 신자가 자기 신에게 빌면 비는 만큼 복이 돌아옵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형통의 복을 자기들에게만 내려달라고 빕니다. 심지어 유일하신 창조주 절대적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마저 그렇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을 보고선 메소보다미아 사람으로 선지자인 발람을 불러 승전을 비는, 즉 상대를 저주해달라는 신탁을 의뢰했습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22:6) 우상을 숭배하는 가나안 족속과 심지어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있던 발람의 신앙 내용도 결국은 인간을 위해서 신의 능력을 최대한 우려먹는 데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자기 민족에게는 복을, 다른 민족에게는 저주를 내려 달라고 빌면 신은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어떠했습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아브라함더러는 다른 민족을 저주하는 간구는커녕 심지어 자기와 자기 족속을 위해 복을 빌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을 사랑해 당신의 복을 다 같이 나눠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복을 나눠주는 역할을 아브라함더러 맡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의 전달자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흥미롭게 아브라함이 특별히 해야 할 역할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들을 저주하겠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더러 하나님의 복을 간구하기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 축복 받는 자가 먼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복을 따로 더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복은 다른 사람만 받았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시지만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복을 전해주는 근원이 됩니다.  그가 받은 복은 사람들에게 축복 받은 것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원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보디발이 그를 가정총무로 세워서 축복했더니 하나님이 요셉 대신 보디발에게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특별히 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 맡은 바 일만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로선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는 것뿐이지 아무리 고관대작이라고 하지만 노예 신분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와 형제들이 있는 고향 땅으로 돌아갈 희망은 전혀 없이 타국에서 나그네로 일생을 마쳐야 할 판입니다. 정말로 그가 받은 복은 사람들에게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믿음이 좋다는 평가를 받은 것뿐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요셉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받은 복이었습니다.

이는 발락의 신탁과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발락의 경우는 복의 종류와 크기를 인간이 정했습니다. 복의 내용도 현실의 형통과 안락뿐이었습니다. 신은 인간의 요구대로 들어줄 의무가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신자가 복의 종류와 크기를 정할 수 없습니다. 받을 복의 내용도 성실, 정직, 거룩, 의, 믿음 등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신자는 단지 하나님의 언약에 초대 받은 자로서 오직 그분께 순종 헌신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최종 목표는 땅의 모든 족속이 신자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그 언약을 실현하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아야 합니다. 또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기 위해 그분의 십자가를 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요셉처럼 가장 먼저 사람들 사이에서 축복 받는 모습으로 전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으로서 썩는 밀알부터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후에 복음을 말로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만 올바르게 전해집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는커녕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고 있고, 심지어 발락의 신탁과 똑 같은 형식으로 간구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셈입니까? 스스로 믿음의 후손이기를 거부하는 꼴 아닙니까? 그럼 믿음이 없는 기도인 셈인데 과연 응답이 되겠습니까?

6/19/2008

김광찬

2008.06.19 04:57:29
*.248.124.155

운영자

2008.06.30 14:01:59
*.160.179.212

“그러나 현실의 형통과 구원을 얻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나아가 구원도 기독교만 편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모든 죄를 당신께 자복하고 정말 겸비하게 나오는 자라면 누구라도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자기 옛사람을 죽이며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인종, 문화, 관습, 언어, 아니 종교와도 관계없이 다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어떤 분이 상기 글 가운데 윗부분을 보시고 제 신앙 노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시 보니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식으로 오해의 소지를 충분히 줄만한 것 같습니다. 늦게나마 그런 오해를 갖게 된 분들에게 사과를 드리며
나름대로 해명을 드리오니 너그럽게 양해 바랍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당부 드립니다. 이처럼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있는 글, 표현, 단어, 등은 하시라도 댓글, 혹은 개인적 이멜로 예리하게 지적하시고 따끔하게 질책해 주시기 바랍니다. 매일 글을 쓰고 또 어떤 때는 시간에 쫒기다 보면 본의 아닌 표현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제 사이트에 방문하셨던 분들은 제가 어떤 성향의 신학을 갖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만, 최근에 가끔 방문해주시는 분들 가운데는 미처 모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특별히 이글처럼 어떤 주제를 강조하려다 보니까 표현상에 오해를 줄만한 부분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 공적으로 글을 올리려면 정말 단어 하나, 관용구 하나, 말투까지 일일이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우선 저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진리만큼은
세상 어떤 분보다도 더 강력하게 붙들고 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강남 박사의 책을 반박하는 책을 지었고
또 이 시대에 진정한 복음으로 돌아가고자 이 사이트를 개설했습니다.
어제 “하루를 열며”의 글(꽉 찬 때 안에 들어와 았는가?)에도 제 그런 뜻을 새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기의 글에선
기독교는 신자더러 자기부터 복을 받기보다는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제사장적 삶을 살기를 요구하는 반면에,
다른 모든 종교는 발락의 신탁처럼 신에게 자기만 받는 복을 기원하는데
요즘은 기독교 신자마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 형통이나 환난의 문제에선 하나님이 신자와 불신자와 특별히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제였습니다.
또 그 주제를 강조하려다보니 현실의 삶에 베푸는 일반 은총 뿐 아니라
구원에서도 하나님은 혈통, 문화, 인종, 심지어 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좀 과격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옛사람을 죽이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 바로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즉 예수님의 의가 아무 자격 공로 없는 죄인에게 전가되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다는 뜻이며,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진정한 중생을 했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은 이전 믿음과 가치관을 완전히 버리고 참 하나님과 그 구원의 길인 예수께로 회심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들은 종교에 상관없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은
타종교인이 진심으로 그렇게 회심하여 예수를 영접하면, 실질적인 의미로는 개종임,
이전에는 비록 다른 종교를 가졌지만 구원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계속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데 구원을 주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순히 의로운 행위로 인정하고 자신도 그렇게 의롭게 살려고만 하는 자는 아무리 기독교인라고 해도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제 모든 글에서 재삼재사 강조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제 신앙노선은 오직 예수, 죽어도 오직 예수, 나아가 오직 성경임을
강조하오니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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