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0:20-23) 흑암 중에 숨은(?) 하나님

조회 수 876 추천 수 36 2012.06.14 19: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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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중에 숨은(?) 하나님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출20:20-23)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는 장엄한 장면입니다. 산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19절)라고 간청했을 정도로 크고도 신비하고 놀라운 광경이 그들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실체를 직접 대면하면 누구나 죽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모든 이가 죄인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대언자 내지 대행자임을 자기들 눈으로 확인했기에, 하나님께 대신 나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더러 하나님께 직접 듣고 자기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참으로 정미합니다. 우뢰, 번개, 연기(통칭 안개나 구름을 뜻함)는 흔히 있는 자연현상입니다. 만약 그것들만 들리고 보았다면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곳에 강림했다고까지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아무도 올라가지 않은 산꼭대기에서 들리고, 우뢰의 그 큰 소리마저 뚫고서 산 밑에까지 울려 퍼지는 너무나 큰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두려워 떨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그들더러 안심하라고 위로합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여 죽이러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범죄하지 않는지 시험만 할 따름이라고 합니다. 범죄만 안 하면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범죄 대신에 당신을 경외하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범죄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당신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경외하는 자라면 함부로 범죄할 리도 또 하나님이 그를 무조건 심판할 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키기 힘든 말씀입니다. 범죄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수시로 하나님이 두려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꼭 범죄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한 위로는 모든 세대에 해당되지만 여전히 온전히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모두가 죄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기, 정확히 말해 우리 안에 옛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다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여호와의 말씀에 부조리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합니다. 말하는 것을 “들었나니”라고 하지 않고 “보았다”고 합니다. 앞의 구절에서 당신의 강림하신 모습 가운데 보이는 것은 번개와 연기뿐인데다 두려워서 아예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단지 우레와 나팔 소리만 들었습니다. 모세조차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다가갔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하나님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본 것이라고는 사실상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또 보여주면 반드시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안 보여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세계와, 심지어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든 인간과도 엄격하고도 완전히 구별되는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흑암 가운데 하늘에서 들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대면했을 뿐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그분과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가까이서 대면한 경우인데도 그랬습니다. 바로 “당신을 비겨서 금이나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전혀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특정 형상으로 비슷하게나마 만들 수 있습니까?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구체적 형상과 비유하는 것은 물론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을 모욕하는 불경한 죄를 떠나서 전혀 소용없는 짓이며 신앙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뿐더러 도리어 백해무익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선 우주 안에 존재하는 것들과 비견되는 어떤 형상도, 혹은 별도의 추상적 형상을 만들어서 신앙의 대상을 삼거나 도움을 받는 보조기구로 사용해선 안 됩니다. 금은 같은 귀금속으로 정교한 기념물을 조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 형상과 조각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하고 고귀한 모습이거나, 혹은 신자로 그런 분위기나 감상에 젖게 만들어도 그럴 수는 절대 없습니다. 최고의 인간들이 모여 최고의 기술, 정성, 열의, 지략, 영성, 믿음 등으로 최고 걸작을 만들어내어도 여전히 그분의 거룩하심에 비하면 한낱 먼지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흑암 속에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그분을 뵐 수 없었으니 죽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금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직접 강림하신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님을 상징하니까 그분 앞에 나가도 죽지 않게 됩니다. 아무래도 죄의식이 약해지 것입니다.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는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안심하고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마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런 두려운 마음을 스스로 인위적으로 없애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죄를 범해 두렵다면 그 때마다 순전한 마음으로 번제를 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종교적 예식과 절차를 아주 경건하게 치장하여 조금이라도 그 죽음에서 면해보려는 목적으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가나안 이방종교들 흉내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 물질과 쾌락에 풍요한 모습에 동요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상천하에 오직 한 분 여호와만이 인간의 생명은 물론 모든 삶을 인도하신다는 진리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당신께선 흑암 중에 보이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 앞에 죄의식을 지닌 진정한 두려움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좋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할 일은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토단을 쌓고” 그 위에 자신의 번제와 화목제만 드리면 됩니다. 인위적 기교나 장식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이 토단입니다. 또 흙으로는 높고도 거창하게 쌓을 수조차 없습니다. 이젠 거대한 조형물을 비롯해, 건물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모여서 주일 예배를 드려야할 건물마저 짓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검소하면서도 효율적이고 실용적이면 되지 화려한 장식이나 고급한 재료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어떤 죄악, 정욕, 탐심, 이해타산이 일절 들어가지 않은 하나님과의 순수한 관계를 이어가라는 뜻입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 그렇게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의 믿음과 그분과의 관계에 불순물이 들어갔다면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우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표시로 자기 소유물을 바쳐야 합니다. 또 짐승을 죽여 자기를 대속할 희생으로 바침으로써 알게 모르게 지은 죄부터 그분께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화합하는 잔치를 벌려야 합니다.

토단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쌓기에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산제사를 말합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네가 서있고 일하는 바로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금은 신상 혹은 기념물이나, 거대한 조형물이나 성전에 강림 내지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진심을 바치는 곳이면 어디든 강림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흑암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그분을 보고 만날 수 있는 길도 흑암 속에서 들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인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성경이 참으로 정미하고 심지어 재미마저 있지 않습니까? 흑암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삶과 일터의 현장에서 실제로 만나 뵈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되니까 말입니다. 흑암 속에 계신다는 것의 실질적 의미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에나 함께 계신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분의 이름을 기념하라는 것도 그분의 성품은 물론 자기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와 권능을 실제 체험으로 알게 된 지식에 바탕을 두고 경배하라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경이로운 현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무한한 내적 신뢰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런 온전한 신앙을 지닌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리라 약속했습니다. 이도 엄격히 말하면 그분의 복을 이미 체험한 자라야 그런 참 감사와 경배를 그분께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흑암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분을 보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분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죄 때문에 여호와께 나아가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라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신자는 아무도 그런 초보적인(?) 신앙 지식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상과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수시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직 성경으로만 대충(?) 추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도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고 봉사해도 하나님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인 것 같으니 자꾸만 두려워지지 않습니까?  

시내산 자락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오리무중 가운데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에는 연기(안개 혹은 구름)로 가득 찼고 번개와 우레가 칠 정도로 하늘은 구름으로 뒤덮였습니다. 성경도 그래서 흑암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모세도 그분을 뵙지 못했고 단지 그런 가운데 그분의 음성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기록해놓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말하자면 시내 산의 율법수여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모든 후대의 신자들은 오리무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성경을 통해서 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성품과 세상과 죄인을 다스리는 원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복음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신 뜻이, 다른 말로 그분의 말씀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본문에도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시험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외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아무리 흑암 속에서 그분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아도 전혀 두려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십자가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것이라고는 이 우주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줄 음성은 성경에 이미 완전하고도 충분하고도 명료하게 다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시내 산의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날의 신자는 그 처지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진짜 흑암 중에 그분의 강림하신 모습을 보고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저녁으로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듣고 싶은 말씀만 그분께 들으려 드니까, 사실은 나의 욕심과 고집을 담은 나의 음성인데도 그분은 계속 흑암 중에 있는 것 같고 두려운 것입니다. 또 세상의 풍요와 쾌락이 자꾸만 더 좋아져서 그분의 음성이 성경을 통해 잘 들리고 있는데도 굳이 귀를 막은 것입니다. 아니면 이미 들었는데도 일부러 잊었거나 짐짓 잊은 체하기 때문입니다.

6/13/2012


사라의 웃음

2012.06.14 22:34:36
*.109.85.156

흑암 가운데 말씀하시는 분이시기에 오히려 인간들로 하여금 우상만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뜻이 숨겨져 있군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또 우상을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자신이 참 중요하고, 자신이 너무 괜찮아 보여서, 자꾸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어쩌면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소경인가 봅니다. 그래서 자주 뒤뚱이는 것으로
또 변명하고.. 끝이 없는 그 일들을 버릴 수 있는 길은..
말씀하신대로 그저 삶에서 일터에서 늘 뵐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각별
하신 사랑앞에 덤덤하니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맘의 옷깃을 여미며
토단을, 토단을 쌓는 그 일을 행함이.. 묵묵히 행함이 너무도 소중한 은혜임을
다시금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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