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40:1-5) 정금 같은 믿음이란?

조회 수 1876 추천 수 30 2013.05.27 19: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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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 같은 믿음이란?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욥40:1-5)


졸지에 엄청난 환난을 당한 욥은 하나님께 그 이유라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10:2) 세 친구와의 논쟁도 서로 핀트가 어긋나기만 했고 젊은 엘리후까지 가담한 토론은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급기야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나타나서 욥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욥38:2) 그리고선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3절)를 필두로 41장까지 4장에 걸쳐 약 100개에 이르는 질문을 쉴 새 없이 쏟아놓았습니다.

욥으로선 당장 첫 질문부터 도무지 답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치를 알지만 설명을 못하거나, 혹은 그 답을 비슷하게나마 유추해볼 수 있는 부류의 질문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지성과 능력을 다 동원해도 아예 힌트조차 구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께선 질문을 다 마치기도 전에 힐문조로 다그쳤습니다. 이제껏 당신에 대해 그렇게도 불평과 의심을 퍼붓더니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어서 빨리 질문 하나라도 대답해보라는 것입니다. 욥으로선 다시는 하나님께 불평은 물론 의심도 하지 않겠다고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히 욥의 막막한 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도 그러니 하나님이 조금 짓궂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는 욥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기는커녕 한 번도 깊이 생각지 못한 사안들에 대한 질문만 속사포처럼 퍼부으니 말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스스로 “전능자”(全能者)라고 소개하면서 나와 다퉈보겠다고 감히 덤볐는데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그분은 인간과 변론하면서 서로 견줄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 질문들을 하신 그분의 의도 또한 답을 듣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전능함을 자랑하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21세기 첨단과학자들조차 대답 못할 질문을 구태여 사천 년 전 인물인 욥에게 하신 당신의 의도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너무나 당연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덩치가 무지 크고 힘이 엄청 센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겉으로만 봐도 싸움을 아주 잘 할 것 같아 감히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다 실제로 태권도 4단, 합기도 5단, 유도 3단, 검도 4단, 등등 무술의 단만 합쳐도 20단이 넘고, 격투기와 권투사범 자격증은 물론 각 협회의 간부직책까지 갖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예 주눅이 들어 그 사람 앞에만 가도 자동적으로 고개가 숙여지고 말투와 태도가 공손해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질문 받을수록 그분을 대하는 욥의 생각과 태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도무지 답할 수 없는 질문 하나하나가 바로 그분의 전지전능에 대한 구체적 증표였습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서 고개를 들기는커녕 눈도 마주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분께 바칠 것이라고는 오직 순종, 경배, 감사, 찬양, 의탁, 헌신뿐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던진 질문이야 기껏 백 개이지만 그분이 피조세계와 인간을 통치하는 그 세밀한 과정들을 우리로선 도무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숫자로 나타낼 수 없으며 무한대라는 개념도 그분의 오묘하고 위대한 섭리를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학으로 우주의 비밀을 못 깨칠 것 하나 없다고 덤비는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가요? 하늘에서 보시는 그분이 웃으실 것입니다. 아니 너무 측은해서 웃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을 단순히 전능자라고만 인식해선 안 됩니다. 불신자도 그 정도는 인정합니다. 그분이 무슨 일을 왜 어떻게 행하시는지 진지하고도 구체적으로 탐구해봐야 합니다. 그 결과 그분의 너무나 당연한 전능함을 알고 믿는 것보다, 자기는 그분의 이치를 단 한 개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는 너무나 미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과 그분 사이에는 절대로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온전히 겸비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그분은 당신의 뜻대로 못 이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 외에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오직 그분으로 인해 보존, 성장, 유지될 뿐 아니라 쇠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인생만사는 전적으로 그분에 의해 시작되고 끝납니다. 못 이루실 것이 없다는 것을 또 다시 전능하다는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뜻하신 목적, 계획, 일정, 방식, 결과, 등에 영향을 미칠 존재는 당신 외에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은 단 한 치의 부족, 오류, 모순, 상충 없이 완벽하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진술이라고 간주해선 안 됩니다. 욥에게 고통을 허락한 가운데도 당신만의 뜻이 있는데 그 뜻이 다 이뤄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고통을 경감, 변경, 중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욥이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어서 빨리 구출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고 당신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진술한 그대로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3:1) 욥도 하나님의 질문을 직접 받기 전인데도 그 극심한 고난을 통해 이 진리를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정금같이 단련하려고 그런 고난을 허락한 것까지는 알았지만, 정금이 되기 전에는 그 단련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까지는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에 욥이 도달하게 된 정금 같은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욥이 자기 믿음 수준에서 스스로 소원하고 알았던 자리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연단하여 이끌고 가려 했던 목적지 말입니다. 이유 없는 고난일지라도 당신에 대한 불만과 의심은 물론, 고난을 빨리 끝내 달라는 간구와 그 고통의 원인이라도 알겠다는 요구마저 완전히 거둔 바로 본문의 상태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특별히 고난마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셨거나 허락하신 것이므로 그 고난을 멈추시는 시기와 방식도 당연히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임을 완전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그도 전도서 기자처럼 범사에 하나님만의 기한이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0,11)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되 그 시작과 끝을 인간으로 모르게 한 것은 오직 영원을 사모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합니다. 영원의 차원이란 바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바입니다. 쉽게 말해 이 땅에선 하늘에서 하나님이 계획한 일의 시종(始終)을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주님의 품인 영원의 차원에 가야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한편 도무지 이유도 모르겠고 시종조차 까마득한 고난을 이 땅에서도 영원의 차원 즉, 하나님의 뜻과 목적 안에서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고난에 대한 그분의 뜻과 계획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반드시 숙지하고 끝까지 붙들어야 할 진리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수고는 물론 이해 여부와 믿음의 세기와도 상관없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덧붙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3:12-14)

그렇다고 신자가 고난에서 구해달라거나, 또 고통의 원인을 알아야 하겠다거나, 나아가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가르쳐달라고 간구해선 안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의 자녀이기에 무엇이든 아뢰고 간구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릇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절대로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려 한 것은 반드시 이뤄지며, 행하지 않으려 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분께 가장 앞서, 아니 유일하게 바칠 것은 그분을 향한 경외심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마음에 절대로 악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 같은 계교, 가식, 거짓, 왜곡, 타산 등도 하나 없으며 나를 조종하거나 강요할 의사도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그러하기에 신자 또한 정말로 온전한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갖고 잠잠히 그분의 완벽한 행하심을 바라보며 기다리면 됩니다. 고난이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어 심정적으로 도무지 감사와 찬양이 수반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자신의 평강과 그분에 대한 기대는 갖고 경배해야 합니다.

욥기는 어찌 보면 너무 싱겁게 끝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원인을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던진 질문의 해답도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문부호만 넘쳐납니다. 거기다 욥도 본문과 마지막 42장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무력시위 앞에 제대로 된 응전 한 번 못합니다. 그전까지 친구들과 엘리후 앞에선 기세등등하게 자기 의로움을 자랑했던 자가 말입니다.  

“주께서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2-6)    

욥의 마지막 이 고백은 결코 싱거운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무조건 항복 선언도 아닙니다. 가장 먼저 그동안 자기가 깨달을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말을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알아야겠다고 덤빈 것이나, 고통이 너무 심하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던 것이나, 나는 의로우니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항변한 것 등 모두가 너무나 어리석은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 가지 질문들을 받고 보니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주가 못하시는 일이 하나도 없지만 행하시는 일 전부가 당신께서 경영한 그대로이므로 선하지 않는 것이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회개한 내용도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나님께 맞섰던 것에 대한 철저한 뉘우침입니다. 또 기어이 고난의 원인을 알고야말겠다고 하나님께 덤빈 것을 완전히 접은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지난 믿음의 체험에서 나온 고백들이라도, 자기 자랑이나 의로움이 조금이라도 묻어져 나왔다면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가 되지 못함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욥기의 결론이 너무 허무하게 끝나는 것 같으니 본문보다는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사”(12절)를 결론으로 삼으려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 회개를 철저히 하니까 하나님이 복을 더 많이 주시더라는 너무나 단순한 해석과 함께 말입니다.

아닙니다. 모년에 복을 주신 것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일정대로 이뤄진 것일 뿐입니다. 만약 욥기의 마지막이 그간의 중병으로 인해 하나님 품 안에서 눈 감았다고 적혔다 해도, 욥은 이제는 그마저 감사하는 신앙의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 숨겨진 진짜 결론입니다. 아브라함이 말년에 이르러서야 갖게 되었고,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바로 그 수준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선하지 않은 것, 완벽하지 않은 것 단 하나도 없기에 예수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 고백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믿음이 정금같이 변화된 확실한 증표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도 무엇이든 못 이룰 것이 없기에 내 소원을 열심히 간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선하시기에 신자로선 마땅히 경배밖에 드릴 것이 없음을 알고 어떤 고난 가운데도 오히려 기뻐하며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5/27/2013


김유상

2013.05.30 05:29:17
*.93.50.84

그렇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문은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정의는 다 하찮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 엄위에 압도되어 내 온 존재가 경외심으로만 가득 차 다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 오직 경외심으로 그 분 앞에 서는 것이 참 믿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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