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6:1-4)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믿음의 가장 기본 (2)

조회 수 822 추천 수 30 2014.01.31 19: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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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갖추어야 할 믿음의 가장 기본 (2)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시26:1-4)


다윗이 “나의 완전함에 행하고 요동치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도덕적 무결점을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어도 오직 궁극적인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만 끝까지 붙들며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린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성실함보다는 당신께서 계획하신 영광의 자리에까지 자기를 반드시 이끌어주실 그분의 성실함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믿음의 가장 기본입니다.

그리고 그의 엎드림은 현실의 어려움에서 구출해달라고 하나님께 긴급조난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 죄를 멀리하고 악인과 동행치 않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최선을 다해 무죄함을 추구하지만 알게 모르게 잘못이 있으면 주님의 인자로 덮어서 자기를 거룩하게 바꿔달라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구하는 믿음의 본질은 바로 그분의 신실하신 인자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인자란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긍휼과 자비입니다. 당신의 자녀로 삼은  언약관계를 바탕으로 신자들의 허물과 죄를 사해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죄를 일일이 벌주지 않으시고 은혜로 인내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가 없으면 모든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단 한 시도 생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문제는 그 자비를 아무 조건 없이 무제한으로 용서해주는 사랑이라고 너무나 단순하고도 쉽게 이해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온갖 잘못을 저지르고도 하나님께 용서만 구해주면 언제든 용서해주신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신자가 어지러이 더럽힌 곳을 뒤치다꺼리 해주는 한량없이 마음씨 좋은 청소부 할아버지처럼 여깁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가 계측은커녕 아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 풍성하고 광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마냥 더럽히고 하나님은 마냥 청소만 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치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 계획하신 영광의 자리는 대체 언제 가보겠습니까? 아니 그런 자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 아닙니까? 평생토록 신자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 수시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뿐이라면 너무나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 아닙니까?    

은혜의 십자가 복음을 도외시하고 도덕주의(moralism)나 율법주의(legalism)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 없다”(롬6:1)고 설파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가 참 은혜가 되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의 인자가 진정한 인자로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선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그 안에 더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개신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용서, 인자, 은혜, 긍휼, 자비, 사랑 등을 죄와 그 죄책에 대조되는 개념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인자를 죄에서 가장 손쉽게 탈출, 도피, 외면, 세탁할 수 있는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만 믿고 마음 턱 놓고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의도적 악의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이미 들어왔으니 복음의 만병통치적(?)인 효능만 붙들고 죄에 대해 오히려 더 무감각해지는 성향이 다분히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작금 십자가 복음이 너무 싸구려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이미 확보된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모든 관심이 예수 믿은 것에 따르는 보상과 이득을 얻는 것으로 옮겨지며, 그러기 위해 성실히 기도, 봉사, 헌금하며 교회에 충성합니다.

또 그러다 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경건해진 양 착각합니다. 교회 밖에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위선자라는 비난을 듣고 있음에도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그런 비난은 금방 싹 잊어버립니다.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하는 종교적 열성으로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진정한 경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체해버립니다.      

정작 인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진리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진리에 어긋났기에 죄가 되는 것이기에, 인자에는 반드시 진리로 돌아가게 만드는 방향성을 내포합니다. 신자는 단순히 잘못의  용서만 구해선 안 됩니다. 무엇이, 왜, 어째서 잘못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 잘못의 결과는 무엇이며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 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요컨대 진리를 따를 의사가 없으면서,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자만 구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했으면 부모는 벌을 주기에 앞서 어떤 일부터 합니까? 아이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며, 왜 그것이 잘못이 되는지, 또 그 결과로 남들과 주변에 어떤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 특별히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아이 본인의 육신과 마음에도 좋지 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 등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알기 쉽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뜻도 다음에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나아가 그런 가르침을 통해 유사한 경우에는 부모에게 배운 것을 적용하게 하고, 전혀 생소한 사건이 닥쳐도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 스스로 터득하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신자가 인자만 구하고 진리를 외면하면 이런 어린아이 수준의 반성과 깨우침과 고침마저 전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젖먹이로 사리분별이 전혀 안 되고 말도 못할 때는 기저귀에 똥을 하루에 수십 번 싸도 엄마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깨끗이 갈아줍니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겨우 한두 마디 말을 할 때까지도 어떤 실수를 해도 그저 귀엽고 용서가 됩니다. 신자가 잘못의 용서만 구하면 이런 유아 상태로 평생을 마치겠다는 뜻입니다.
  
참된 회개는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에 그 진리에 비추어 이런 저런 점들이 잘못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실토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견주어 무엇이 어긋났으며, 그 어긋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해 놓은 절대적 계명입니다. 구약성경의 십계명과 율법에선 그림자로 계시되었다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정확히 풀어서 완성해주신 바로 그 길입니다. 제사장 나라답게,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율법으로는 죄의 깨달음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율법이 구원을 얻는 수단 통로는 아니지만, 무엇이 죄인 줄 깨닫게 하는 기능과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도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이뤄야 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고 무용화 된 것까지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그런 규정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숙지하여 현재의 삶에 맞도록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기준과 관점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을 것과 똑같은 방식대로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중에 진리대로 완벽히 행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서 또 그 준행을 소망하는 자는 진리에 가까이 갈수 있지만, 진리를 모르고 그런 소망조차 없는 자는 평생을 가도 그러지 못합니다. 구원 이후의 인생에서마저 “갈 지(之) 자(字)” 행보만 합니다. 갈지자 행보는 불신자 시절로 충분합니다.

신자는 살아가는 향방이 분명해졌고 인생의 목표점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 눈앞에 분명한 푯대가 잇습니다.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푯대를 보고 그 방향대로 일직선으로 성실하게 걸어가면 넘어져도 금방 정상 궤도에 오릅니다. 그러나 푯대도 방향도 없이는 아무리 더 빨리 더 열심히 걸어도 진전이 없으며 제 자리를 빙빙 돌거나 심하면 뒤로 후퇴할 뿐입니다.  

진리를 따라가다가 인간적 연약함으로 넘어지더라도 실망 좌절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진리로 돌이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인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정확하게 하나님께 아뢰면 그분의 인자는 곧바로 신자에게 부어집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계속해서 따라갈 수 있는 힘까지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십자가 복음은 죄책에서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핵심이긴 하지만 한쪽 단면만 본 것입니다. 복음이 “구원 따로, 성화 따로”의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에 그분을 알고 믿는 순간 성화도 필연적으로 시작되고 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진리를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구원은 확보되었고 성화는 어차피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니까 이 땅에선 성화에 실패해도, 아니 시작마저 안 해도 된다는 식은 아닙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가 성화를 시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껏 어질렀다가 하나님더러 청소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론 성화가 결코 이뤄지지 않으며 온전한 인자도 부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갓난아기를 졸졸 뒤따라 다니는 엄마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만 주고 성화는 안 해도 다 받아주는, 다른 말로 결코 손해 볼 장사를 하는 분도 아닙니다. 성화에 무관심한 신자는 강권적인 연단이, 불행하게도 주로 현실적 고난의 모습이지만, 기다립니다.

성화에 게으르거나 그저 용서만 구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은혜로 구원 받았는지 잊고 있는, 엄밀히 말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 밖에 있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입니다. 사형수를 조건 없이 사면해주었는데도 은혜를 갚기는커녕 완전히 안면을 바꾸는 몰염치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자입니다. 복음이 작금 너무 값싸게 전해짐으로 교회 안에 인간도 아닌 자들만 양산했다는 뜻입니다.

1/3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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