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1:25) 너무나 기구한 이스라엘의 운명(?)

조회 수 674 추천 수 22 2012.01.31 21: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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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기구한 이스라엘의 운명(?)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11:25)


로마 교회는 알다시피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가 세운 다른 교회들에는 직접 복음을 가르쳤지만 로마교회에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방문하기 전에 편지로나마 기독교 기본교리를 구체적으로 증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수신 대상이 디아스포라(이방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칭하는 용어)인지, 순수 이방인인지에 대한 논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로마교회 안에 당연히 두 그룹이 다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 사이에 복음에 대한 여러 이슈를 갖고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바울도 익히 전해 들었기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배경에서 궁극적인 구원 역사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 10, 11장 두 장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 논의의 핵심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더러 완악하게 되었지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복음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이방인들이 갖는 큰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이 동일한 내용으로 자주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거나 더디 믿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어 다른 민족은 도무지 알 수도 없는 너무나 큰 권능으로 보호와 인도를 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았으며, 무엇보다 메시아가 와서 구원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소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유대인 가운데 구주가 왔음에도 믿지 않는 것은 이상하며, 자기 민족도 잘 믿지 않는 구주를 자꾸 이방인더러 믿으라면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그분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이방인을 먼저 믿게 하는 것이 당신의 인류 구속사에서의 순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그 순서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도 일본이나 일부 회교 국가들에는 이스라엘보다 크리스천 숫자가 훨씬 적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얼마나 많이 구원하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계획에 달린 것입니다.

성경이 정작 말하는 바는 그분의 구원에서 이방인이라고 순서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유대인들보다 적거나 약하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한 죄인과 하나님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한 민족 전체를 다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에 유대인들이 늦게 믿게 될 것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논의를 시작하면서 그런 뜻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니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1-13)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성경은 신구약이 서로 짝을 이루는 너무나 정미한 책입니다. 나아가 구약과 신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전혀 변함이 없이 신실하고 일관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당신의 구속사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 택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자손은 사 대(四代)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16)

여호와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다시 확인하면서 하늘의 뭇별 같이 많을 후손에 관한 예언을 주셨습니다. 사백년 간 이방의 객이 되어 그 나라를 섬기다가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 예언대로 가나안에 큰 기근이 닥쳤고 우여곡절 끝에 야곱 가문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며 그 후손은 노예 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 살이를 사대 동안 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말했습니까?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방족속들은 죄악에 취해서 먹고 마시고 놀고 있을 동안에 당신의 택한 사랑하는 한 민족 전체는 다른 나라의 노예가 되어서 생고생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4 백 년간이나 말입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로 물든 온 땅의 죄악을 진멸하는 성전(聖戰)을 치르게 만듭니다.  

신약 시대로 바뀌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역할을 맡깁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예수를 믿을 때까지 불신의 늪에 빠트려 놓겠다고 합니다. 가나안 성전과 정반대입니다. 이방족속이 먼저 믿고, 유대인은 죄악 속에 방치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그 벌을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명령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합작으로 그분을 죽였습니다.

본문과 구약 창15:16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두 경우 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심판하거나 구원하는 일을 도우는 도구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난을 겪어야만 하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민족이지 않습니까? 이방인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심판을 미루고 자기 백성의 고통을 참으셨던 하나님이, 이방인 신자가 “충만”해질 때까지 자기 백성을 죄악 중에 두는 것도 참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이스라엘을 볼 때에 택함 받은 제사장 백성이 맡은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것은 바로 이방 족속을 당신께로 인도케 하는 길잡이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적용하면 하나님은 신자나 불신자를 사랑하시되, 먼저 믿은 신자는 단지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으로 이끌기 위한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갖 고난을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신자만 너무 억울한 것 같습니까? 예수 믿은 보람이 없어서 손해만 보는 것 같습니까? 정말 복음을 아는 신자라면 그 생각이 정반대여야 합니다. 세상의 죄악을 진멸하고 또 사단에 미혹된 영혼을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일에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자가 쓰임 받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그야말로 큰 영광이지 않습니까?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바울은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장차 얻을 큰 영광에 대한 뜨거운 소망을 품었지 않습니까?

신자는 예수를 믿는 순간 이스라엘처럼 기구한 운명이 기다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나게 놀 때에 그들의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때로 단 한 명을 구원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죽을 고생을 시키고 필요하다면 순교까지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바울처럼 기쁨과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구분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그 고난 가운데 신자에게도 충만하게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당신의 운명이 이미 완전히 바뀌었음을 실감합니까? 아니면 팔자를 고쳐 편하게 살려고 십자가 밑에 엎드립니까?

1/31/2012    

쌀로별

2012.02.02 04:20:37
*.220.228.246

세상이 말하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이 순간에 충실하게'가 아니라 신자가 가져야 할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충실하게'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 다짐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힘들었습니다. 다르다면 어떻게, 그리고 왜 달라야 하는지는 배웠는데, 배운것 같은데도 말씀으로 대답해보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잘 되어지지 않았거든요. 요새 드는 의문들중 제 마음 한 구석을 가장 크게 자리잡았던 것은 신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을 정하게 하는데 한시적인 역할로 밖에 쓰이지 않는 것일까였습니다. 영원한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는 저희들인데 신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더라도 세상은 예수님을 항상 미워하고 변하는 것은 한 개도 없어보이니까요... 오늘 본문 말씀과 목사님의 강해를 통해서 흐릿하게라도... 그 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뭐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요.;; 세상의 법이 좋아보이고 또 익숙해서 예수님이 늦게 오셨으면 하는 못된 마음이 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전히 세상속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온전히 나 됨을 즐거워하지도 못하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이도저도 아닌 저의 신앙색깔이 싫었습니다. 다가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도 분명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었을텐데 신약에서 예수님을 핍박만 해오던 종교적인 얼굴의 유대인만을 떠올리다 보니 선뜻 마음에 품어지지 않았네요. 의지적으로 마른 걸레를 짜듯이 믿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님을, 영속적인 가치를 이 땅에서부터 추구하는 나그네의 삶이기에 이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믿음이 '이중적으로' 보인다고 할 지라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늘 우울함이 넘나들 때마다 이 글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나 한 명이 돌아올 때까지 참으시고 참아주셨던 예수님이 다른 이들도 그렇게 기다리고 계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운영자

2012.02.02 18:54:08
*.104.233.248

쌀로별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마음이 참 깨끗한데다
믿는 자답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영원하시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스러우며 엉청난 경륜에 대해선
교회들이 너무 안 가르치고 또 신자들도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장에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사람들 마음에 영원에 대한 소망이 점점 실종 내지 퇴색되어 가는 것이
지금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이기, 종말에 갈수록 나타나는,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 같은 자라도 그분의 구속역사에서 아주 작은 부품이지만
절대로 없어서는 안되는 그런 신자 된 직분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지 모릅니다.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찬송과 경배는 오직 그분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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