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11:24-26) 신자와 무소유(無所有)

조회 수 615 추천 수 24 2011.08.18 16: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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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와 무소유(無所有)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잠11:24-26)


기독교적 물질관(物質觀)은 무소유(無所有)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신자가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인격 도야를 위한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재물로 인해서 자꾸만 탐욕, 시기, 질투, 다툼, 분노, 저주가 생기고 심하면 죄악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책으로 재물을 아예 가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는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재물 자체가 악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결코 악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악한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했지 돈 자체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선한 사람이 선하게 돈을 사용하면 “일만 선의 뿌리”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아예 멀리하려는 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입니다. 자신의 죄를 없애는 데에는 그런대로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신자들도 무소유에 대해 쉽게 미혹됩니다. 이는 조금 심하게 말해 자기 혼자만 고고해지려는 너무나 비겁한 행위입니다. 스스로 죄 안 짓는 데는 효과 있을지 몰라도 손자병법에 비유하자면 36계중에 다른 35계가 다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행할 계책에 불과합니다.

악은 선으로 갚아야지 악에서 탈출하려고만 하면 악은 더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집니다. 악의 배후에 있는 사단이 절대 그리 녹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없어서 생기는 시기 질투 분노 저주는 오히려 많을 때보다 더 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을 무소유만 수도해도 정욕에서 완전한 해방을 얻어 자유를 누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에만 자유와 평강이 따라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  계명의 전부라고 했고 바로 그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된다고 약속하신 까닭입니다.   .  

신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에 가장 먼저 주신 계명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이 땅에서 당신이 마련해놓으신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재화가 될 원료와 수단은 물론, “재물 얻을 능(能)”(신8:18)도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도 열심히 성실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서두에 인용은 세절만 했지만 잠언 11:24-31에는 신자가 재물을 운용하는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나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첫째가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가난한 이를 구제하기 위해 돈을 벌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흩어서 구제하라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아낌없이 많은 이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부해진다고 합니다.

반면에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된다고 합니다. 재투자하는 것도 아까워서 장롱 속에 깊이 묻어 두면 인플레이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사는 것도 아까우니 항상 궁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 말씀대로 좀과 동록과 도적의 먹이로 제공되기도 할 것입니다.  

간혹 구제하면 하나님이 복을 양껏 내려주신다고 오해하는 신자도 있습니다. 구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구제했기에 “구제한 자에게 상(賞)으로” 몇 배의 부를 더 주시지는 않습니다. 상호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을 아끼고 쪼개가며 구제한 자는 구제한 만큼 때로는 더 이상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구제 자체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복을 받는” 조건 내지 수단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오히려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구제하는 것은 여호와에게 빌려주는 것과 같으니까 반드시 그만큼 여호와께서 갚아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더러 번성하라고 명한 까닭도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가난과 질병과 고난을 계속 허용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구제를 하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갚아주는 이유도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한 셈이니까 그 빌린 만큼 반드시 갚아주실 뿐 아니라 계속해서 그 일을 더 하라고 그 이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른 이에게 전해주어야 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입니다. 아브라함더러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 의미입니다.(창12:3) 구제하면 자기부터 복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 통로의 입구는 활짝 열되 출구는 조금만 틔어 놓고 그 잉여분만큼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횡령죄”에 해당됩니다. 진짜로 복의 근원이 되어서 남들을 하나님 대신에 돌본다면 하나님이 그 돌보는 자를 굶기게 만들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꾸로 하나님이 “직무유기죄”를 범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죄와는 전혀 무관하기에 표현이 조금 불경하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곡식을 시장에 내어서 팔라고 합니다. 우선 성경도 시장경제를 지지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공산주의는 배격합니다. 물론 공정하고 건전하면서도 복지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경제여야 합니다. 잘못된 종말관에 빠진 자를 일차 대상으로 한 말씀이지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3:10)고 했습니다.

각자가 성실히 일한 만큼 보상이 돌아가는 사회 체계가 되어야 하고 불로소득이나 부정축재는 단연코 없애야 합니다. 신자는 마땅히 그런 시스템에 적극 참여하고 조성 발전시켜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세상 안에서 기존의 법률과 제도에 충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누구나 알고 또 수긍하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에게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 부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대의 농업은 날씨에만 의존하는 방식인지라 심심찮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부자 농부가 기근이 닥쳐도 움켜쥐고 여분의 곡식을 팔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의 예에서 보듯이 흉년일수록 싼 값으로 유통을 시켜 고통의 짐을 서로 나눠지며 함께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마찬가지로 요셉의 예에서 보듯이 백성의 칭송뿐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주시는 복도 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리라”(27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물을 벌고 쓰는 방식만 선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목적도 선해야,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고 쓰는 방식은 선한 데 그 동기가 선하지 못하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앞에서 구제하면 자기가 큰 복을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 드렸듯이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의해 넷째 원칙으로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는” (28절) 말씀이 당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을 움켜쥐는 것은 재물이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구태여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앞선 글 “잠18:10,11-성경적 청부(淸富) 사상”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다섯째 원칙도 흥미롭습니다.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29절)고 합니다. 가족의 것을 이용해서 자기 배만 채우려는 자의 소득은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친척 친지 형제에게는 더더욱 악행을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는 종교적 일에 헌신하느라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경우도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가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신자의 최우선적인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최초, 최소, 기본 도구로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세웠습니다. 아니 그 가정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다시 한 번 신자의 재정원칙을 간단히 정리해 봅시다. 무소유는 당연히 배제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이웃을 구제하려는 선한 동기에 따라 선한 방법으로 벌고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과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제하고는 연약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또 그런 일을 자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자발적 적극적으로 기꺼이 참여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재정원리를 자기 가정 안에서부터 실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반드시 더 구제하라고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요컨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이 땅에 풍성하고도 편만하게 번져 나가게 만드는 중간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부터도 이렇게 따져보면 신앙 양심에 많이 찔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크게 찔리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인용한 말씀만 해도 주면 더 후히 주겠다고 약속하시되 동시에 만약 너희가 헤아려서 주면 하나님도 헤아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아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판단하여 상급을 정하는, 아니 심판하는 기준이 바로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이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했느냐 여부이지 않습니까?(마10:31-46)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양과 염소를 나누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기준으로 구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자에게 한 구제가 바로 예수님께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리고 목이 말랐다는 것보다는 신자의 구제는 재차 강조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 대신에 그분의 일을 한 것이며 예수님께 꾸어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얻을 능을 주신 까닭도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8)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까닭은 당신께서 그들의 선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에 그 백성들로 동참시키기 위해서인데 그 수단으로 재물 얻을 능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선조는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지나가는 통로로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는 바로 그 약속입니다.

그 언약의 또 다른 내용은 당신의 자녀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를 구원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겠다는 언약을 당신께서 성실히 지키기 위해서, 다른 말로 신자 쪽에선 연약한 이웃을 돌보고 섬기도록 재물 얻을 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언약은 당연히 인류의 선조 아담에까지 소급 적용됩니다.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는 통치는 바로 신자의 구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각자에게 특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모세오경, 잠언, 복음서 등에 걸쳐서, 아니 성경 전체에 너무나 정미하고도 시종 여일하지 않습니까?

작금 전 세계는 극심한 불경기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돈이 세상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펴본 대로 하나님도 그 돈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돈을 제외, 무시, 거부하고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세상 자체를 없애야 하거나, 신자를 구원하자마자 일찌감치 천국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이 땅을 다스리되 신자가 세상 사람들과 달리 구제하는 인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돈을 목표로 살지 않고 오직 하늘의 보물만 간절히 소망하며 사는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이 땅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신자가 구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완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무소유를 통해 가능한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자신만 거룩해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자기 혼자만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려고 신자를 구원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이 땅에 번성 충만케 하여서 대신 다스리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거창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주리고 목마를 때에 그 최소의 필요만 대신 채워주라고 한 것입니다. 이마저 못한다면 우리는 재물이 풍요하든 궁핍하든 나아가 무소유로 아주 경건해지는 것과도 전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빛조차 소유하지 않는 진짜로 성경적인 무소유의 자리로 떨어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너무나 힘든 시절에도 신자는 구제에 힘쓰며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왕에 힘든 김에 무소유를 실천해야지 식으로 결단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려울수록 더욱 열심히 정직하고 성실히 일하고 또 그래서 번 돈을 아껴서 서로 나눠 쓰라고 합니다. 곡식을 내다팔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못 받을 뿐 아니라 백성의 저주마저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돈을 자기 곡간에 쌓기 바쁜 세상 사람과는 달리 신자라면 얼마든지 흩어서 구제할 수 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6:9,10 &8:9)

8/1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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