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21-23)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들으려면?

조회 수 687 추천 수 20 2011.08.23 19: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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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들으려면?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21-23)


며칠 전에 우연히 한국 TV의 한 예능프로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미래와 과거 어느 쪽으로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미래를 미리 알고 싶다는 쪽의 답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꿈속이긴 해도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평상 언어로 아주 구체적인 지시를 네 번이나 받았습니다. 또 다른 꿈의 대가 첫째 요셉의 상징적인 묵시와는, 거의 모든 꿈이 그러하지만, 달랐습니다. 정말 부럽지 않습니까? 예의 여론조사 결과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꿈이 되었던, 어떤 방식이 되었던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를 앞당겨서 받고 싶지 않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럴 수 없습니다. 첫 요셉이 받은 것 같은 상징적 꿈을, 그것도 아주 드물게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종결되었기에 그런 꿈을 더 이상 꾸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에 대한 절대적 계시는 완성되었지만 성도 개인의 보호와 인도 차원에서 당신만의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지금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본문에서 밝혔듯이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이루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선지자로 미리 예언하신 정도에는 도무지 못 미치지 않습니까? 소년 예수를 보호하고 메시아의 정체성을 보증하려는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요셉의 경우와 비교는커녕 본도 받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길 바라는 계시의 내용이 솔직히 어떤 것입니까?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가 거의 전부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해야 더 형통하고 풍요로워질 지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기껏 현재의 고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면 하나님은 몇 배로 갚아주시리라는 것만 믿음의 금과옥조로 붙듭니다.  

물론 우리 간구가 세상에서 형통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미리 가르쳐 달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의 고난과 문제가 언제쯤 끝날 지만 알고 싶은 소박하고 절박한 소원일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도 우리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야단은커녕 오히려 더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는 불변의 원칙과 신자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일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를 영적으로 성숙시켜 그더러 이 땅을 아름답게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그 목적으로 당신만의 고유한 일정과 방식으로 각 신자를 이끄십니다. 신자가 현실에서 풍요나 궁핍 중 어떤 모습이 되던 그 목적지로 가는 가장 합당하고도 필연적인 코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 사람들은 외면하는 반면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만 들어가는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만약 그 좁고 협착한 길의 현실적 실상(實狀)을 미리 보여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갔는데 마침 분홍빛 낙원에서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깊고 컴컴한 낭떠러지에 떨어져 욥 같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컨대 첫째 요셉만 해도 형제들의 살인모의와 그로 인한 애굽의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알게 되면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될지라도 순순히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까? 자기 대신 다른 자로 그 길을 가게 하라고 극력 사양할 것입니다. 아비 야곱이 지어준 채색 옷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형들에게 꿈 자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겠지만 믿음이 좋은 신자의 반응도 그 정도 밖에 안 되니까 당신의 구체적 계획을 미리 보여주지 않는 법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위가 풍성해지면 스스로 알아서 거룩해질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걸어가는 넓고 편안한 길에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찾아서 따라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길에는 안 계시고 다른 쪽의 좁은 길로 가고 계시는데도 그러합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따르되 세상에서의 형통과 칭찬을 동시에 즐기려는 태도입니다. 자꾸만 내가 어떤 길로 가야 형통할지 미리 가르쳐주길 바라는 소원도 그들과 같은 생각의 선상에 있을 뿐입니다.

첫 요셉의 경우 현실적으로는 요셉 개인에 관한 꿈이었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이 인류를 구속하는 계획과 관련 있었습니다. 죄에 묶여 있는 인간을 구원해줄 구주는 인간의 형체를 입고 와야만 했는데 당신의 택한 백성 가운데서 선지자로 예언하신 모습대로 와야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예수의 선조들을 따로 보호해야 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첫째 요셉을 통해 둘째 요셉이 나와야만 했습니다. 원죄 아래 신음하는 인류의 대표였던 범죄한 첫째 아담 대신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가 될 무죄한 둘째 아담을 보내신 것입니다. 첫째 요셉은 친형제들의 살인모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애굽으로 피신했지만 그 후손들은 그곳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족속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둘째 요셉의 아들 예수는 헤롯의 살인모의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했지만 바로 그 사단의 노예가 되어있는 동족을 구원시켰습니다.

꿈의 두 대가 요셉들을 간단히 비교해 봐도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지 않습니까? 두 케이스가 짝이 짝짝 맞아들어 가지 않습니까? 단순히 예수님이 오실 것을 하나님이 이 모양 저 모양을 예시, 상징, 묵시, 예언하고 그대로 맞혔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는 하나님께 너무나 쉬운 일에 불과합니다. 그런 모든 섭리 가운데 인간더러 진정으로 깨닫게 하려는 당신만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요셉의 꿈을 아비 야곱은 분명 마음에 두었습니다. 가뜩이나 총애하던 자식인지라 그 꿈대로 믿고 또 그 실현을 위해 채색 옷을 만들어주었는지 모릅니다.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고 이미 외삼촌 라반의 엄청난 질투를 경험했던 야곱인지라 채색 옷이 형제들의 질투를 유발할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꿈이 마음에 내내 걸려서 여호와께 순종하는 심정으로 채색 옷을 입혔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비 야곱이 첫째 요셉을 죽음 내지 그 혹독한 고생으로 밀어 넣은 셈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이 놀랍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허물, 잘못, 죄악까지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이나 세력도 그분의 뜻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선민을 보호하고 구세주의 선조가 되게 한 것은 형제들의 살인모의 죄가, 둘째 요셉으로 애굽과 나사렛으로 피신케 만든 것도 마찬가지로 헤롯의 살인시도 죄가 근본 계기가 되었지 않습니까?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진정으로 그분의 일이 나를 통해서 이뤄지길 간절히 소원해야만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험한 꼴을 당하고 심지어 목숨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주님이 가라는 곳과 하라는 일을 순종하겠다는 각오와 준비가 실제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어떤 허물과 연약함도 그분이 당신의 뜻에 부합하게 쓰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바탕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계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 내 허물을 통해서도 이루지고야 말텐데 세상의 어떤 장벽도 신자 앞을 막지 못합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매일 아침마다 나아가 “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드리는 고백도 단순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만 구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정말로 자기야 어떻게 되든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시옵소서라는 열망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날마다 하나님의 신비하고도 놀라운 섭리를 조금씩 깨닫게 되고 나아가 그분의 영원한 계획의 비밀도 일부나마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체적 지시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지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도착지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주도하는 청사진을 감히 인간이 훔쳐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요셉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여호와 신앙을 끝까지 붙들고 그분의 자녀답게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국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뜻도 깨달았지 않습니까? 천신만고 끝에 형제들과 다시 화해하고 나니까 어렸을 때의 그 꿈이 하나님의 놀라운 장래 계획을 그림으로 살짝 보여준 것임을 알게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7,8)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자기를 애굽으로 먼저 보내 온갖 고생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들의 살인모의 죄를 빌미로 말입니다. 당신께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당신의 계획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둘째 요셉의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번이나 꿈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단순히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호하는 차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언을 하고 그대로 이루는 일이나, 아기 예수를 보호하는 일 정도는 당신께는 너무나 쉽습니다. 헤롯을 당장 죽이든지 아니면 아예 예수님을 로마를 정복하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아주 귀찮고 성가시게 만들었습니다. 만삭으로 베들레헴까지 호적하러 가야했고, 여관이 아닌 마굿간에서 출산케 했고, 곧바로 애굽으로 피신케 했으며, 예루살렘에서 자녀 교육을 잘 시켜보려 했더니 나사렛이라는 시골 중의 시골로 숨어들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 또한 신실하게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만약 요셉에게 순전하고 겸비한 마음이 없었다면 골고다 언덕은 부재(不在)했거나 전혀 엉뚱한 곳으로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하늘의 놀라운 비밀을 엿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역사에 자신을 적극 내어 던져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자신만을 위한 꿈을 꾸어선 여간해선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랜 신앙생활을 했지만 지금껏 경험한 그대로입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심어 주시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라고 해서 거창한 비전을 작의적(作意的)으로 만들어 내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품질과 크기를 높인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바로 나에게 세밀하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고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역사를 주관하는 그분의 원리를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신자를 거룩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그 주변을 거룩하게 만드는 모습으로 이 땅을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이는 또 바로 성경 전체가 말하는바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진정으로 이웃도 사랑하게 된다는 원리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작은 소자에게 잘한 것이 바로 자신에게 한 것과 같다고 했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지금 우리가 열심히 살고 있는 바로 그 삶의 현장과 소속해 있는 모든 공동체를 아름답고 거룩하게 바꾸는 일입니다. 두 발을 딛고 있는 그 곳이 바로 사역의 장소요, 만나는 사람 모두가 사역의 대상이요,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재능과 은사가 바로 사역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지금 이 시간 이곳에서 이 일들과 이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게 만드실 수 있는 그분만의 미래의 청사진까지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한 번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며 상상해 보십시오. 크리스천들이 속한 모든 가정, 학교, 직장, 모임 등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과연 따로 있겠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문명이 발달해서 아무리 수명이 늘어나고 생활이 편리해지고 즐거운 유흥이 늘어나도 사랑이 없이는, 정확히 말해 서로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인간관계가 실종되고는, 모두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해집니다.    

하나님은 신자 개인의 현실적 형통과 안일에 대한 구체적 인도를 결코 쉽게 주지 않습니다. 꿈, 환상, 환청 같은 비상한 방법으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믿음의 수준이 겨우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정도의 신자에게 초자연적으로 간섭해선 도무지 그 뒷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성경에 온전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모든 신자에게도 이미 비전으로 주어 놓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자신과 그 주변부터 거룩하게 변모시키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지시는 그 비전을 실제로 신실하게 실천할 때에만 따라오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신자가 이웃사랑하려는 진정한 마음 없이는 하나님 음성을 듣기 힘듭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이 미래의 역사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바꾸는 계획의 주인공이 되려는 꿈과, 자신이 화려하게 그려놓은 자기 인생에 그분을 어떡하든 끌어넣으려는 꿈, 둘 중에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이 가는 길을 뒤따르려고 소원합니까? 자기 가는 길로 주님을 초대하려 합니까? 혹시 예수님은 나와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지요?

8/23/2011


More than Enough

2011.09.06 14:09:20
*.206.195.151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하늘의 놀라운 비밀을 엿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진짜로 하나님이 심어 주시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
최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 마음에 와서 박히는 문장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든 나의 영달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

정충열

2011.09.09 23:14:23
*.229.29.170

살롬. 오늘도 귀한 말씀 마음판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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