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5:1) 여리고 승리의 진짜 주역

조회 수 779 추천 수 21 2011.08.02 21: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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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승리의 진짜 주역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수5:1)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리고 성에서의 기적적 승리로 시작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순종하여 7일 동안 성 주위를 침묵하며 돌았을 뿐인데도 고대 중근동에서 견고하기로 아주 유명했던 성이 무너져 내려버렸습니다. 고고학 발견에 따르면 성벽 위를 전차 두 대가 교차하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크고 튼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함락 기사는 주님 뜻대로만 따르면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다는 성경의 가장 대표적 예로 꼽힙니다. 어떤 위험이 닥쳐도 끝까지 인내하며 주께 순종할 때에 철옹성 같았던 장애, 문제, 환난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틀린 진술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이해하면 이 전투에서 이긴 까닭이 오직 백성들이 아무 불평 없이 침묵의 행진을 7일간 벌렸기 때문이 됩니다. 마치 그런 기도행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불가능했거나, 그 순종의 행위를 기쁘게 여기신 하나님이 보상으로 승리를 주신 것처럼 간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어떤 지역을 두고 그 주위를 돌며 침묵하며 기도하는 "땅 밟기"라는 특별한 기도 양식까지 생겼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로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 자체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전제 조건이 아니라는 데까지 믿음의 차원이 진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순종하면 자연히 복을 받는다고 간주하면 모든 관심이 내가 지금 순종을 잘하고는 있는지, 혹시라도 잘못해서 복을 못 받으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믿음에 담대함이 부족하게 되는 법입니다.

믿음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합력하여서 선으로 행하신 모든 것들이 현재 나타난 결과라는 사실과, 또 미지의 장래도 당신의 거룩한 계획에 따라 이미 아름답고 영화롭게 이끄시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신뢰를 갖는 것이 그 하나이자 우선입니다. 둘째는 당연히 그런 확신의 바탕 위에서 신자가 순종, 희생, 인내, 전투, 성장 등을 적극적 능동적 자발적으로 행하는 믿음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이 당신만의 방식으로 신자에게 먼저 심어주시는 믿음입니다. 신자로선 그 확신이 자신의 조건, 자격, 행위는 물론 도덕성 및 영성과도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언젠가 어떤 방식이든 간에 깨닫게 됩니다. 후자는 아직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의 손을 먼저 내밀어서 이끌어 주셨고 또 이미 영혼 속에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코자 하는 심령으로 채워주었기에 지극히 당연하게 따라 나오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자는 믿음의 절대적인 필요 요소라면 후자는 그에 따른 보충적인 충분 요소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가 없으면 후자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조금 복잡하게(?) 해서 그렇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놀랍고도 은혜로운 역사를 체험했기에 앞으로도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또 그에 따라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지 않습니까?  

여리고 사건을 바라보는 영적 시각도 지금껏 강단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일곱 바퀴를 군말 없이 돌았더니 그 큰 성이 무너졌더라고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전에 반드시 첫째 믿음을 더 최소한 동시에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여리고 전투 개시 전에 하나님은 기적적 승리의 마스터플랜을 이미 다 마련해 놓은 상태였고, 또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인 줄 확신했기에 기꺼이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생기게 된 까닭도 하나님이 지난 40년간 광야 생활을 통해  연단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선한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을, 만약 그 정도의 확신이 아니라 해도 최소한 그분께 불순종하면 돌아오는 것은 실패뿐이라는 확신은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여기는 점이 없습니까? 혹시라도 칠일 간의 침묵의 행진으로 전투를 대행한 것이 이상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직은 하나님을 온전히 모르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순종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분에게 어떤 틀에 박힌 즉, 인간 상식으로 충분히 이해되는 수준의 역사나 반응만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어린 신앙입니다. 아니 그분을 내가 조종하려는 교만이자 심하게 말해 죄까지 될 수 있습니다.

막상 오늘날의 우리보다 믿음이 훨씬 적다고 여겨지는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지시를 아무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지 않습니까? 무려 40년에 걸친 연단의 결과라 쳐도, 우리 또한 지금껏 신앙 연단을 받은 것으로 치면 그들 못지않을 텐데 아직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상하다고 여기면 마땅히 우리의 잘못이지 않습니까?

여리고 성 전투의 기사에선 무엇보다 성 안의 주민이 오히려 아주 이상하다고 여겨져야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기껏해야 가나안 우상들을 숭배하는 족속입니다. 인간이 자기들 욕심과 기분을 채우려고 스스로 만든 허상들만 섬겼기에, 이성과 상식을 넘어서는 생각을 할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불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기에 자기들 알량한 머리를 그것에만 맞추어 판단, 결정,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무 전투 행위를 하지 않고, 심지어 전투복장을 갖추고 수비할 생각도 전혀 없이 단순히 대오를 맞추어 성 주위를 돌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따지면 그냥 말 타고 돌진하여 공격하면 금방 박살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습니다. 진짜 침묵은 그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본문이 명백하고 말하고 있는바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의 요단강의 기적적 도하(渡河) 사건을 전해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요단강에 한참 급류가 흐를 철이라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접근해 온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도 도무지 건널 재간이 없으리라 판단하고 느긋하게 마음 놓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리나 방축을 지어서 건넌 것이 아니라 자기들 신을 모신 언약궤만 매고서 급류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급류가 먼저 알아차리고 물러가 쌓였더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거기다 이제 또 그 문제의 언약궤를 매고서 아무 말 없이 성 주위만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놀란 가슴이 쉽사리 짐작 되지 않습니까? 성경이 전투 개시 전의, 사실은 이스라엘의 행진 전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6:1) 정찰병은커녕 고대 전투에서 흔히 등장하는 적장과 먼저 면담하는 전권대사도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중 백성의 마음이 녹고 정신이 혼미해진 것입니다. 요단강의 기적적 도하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놀랐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요단강 사건만 알았다면 어쩌다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났을 수 있다고 여기고 오히려 맹렬히 정식전투에 임했을지 모릅니다. 성중에는 사십 년 전 출애굽 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이 이미 전설처럼 파다하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2:9-11)

틀림없이 요단 강 물이 불기 전에 그 땅의 사정을 정탐하러 간 이스라엘 첩자에게 기생 라합이 실토한 말입니다. 라합은 한국 이조시대로 치면 주막집 작부였기에 성안의 동태나 민심의 흐름을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여리고 주민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실은 그들의 신 여호와가 자기들 신과는 비교가 안 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고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간 멀쩡히 생존해선 파죽지세로 두 왕을 전멸하고 급류가 흐르는 요단도 홍해처럼 가르고 점점 다가온다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여리고 승리의 진짜 주역은 여호와 한분이었습니다. 여호수아나,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투는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또 그렇게 결말지어지도록 이미 하나님이 다 마련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일꾼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백년 전부터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때가 차매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이 순종하여 땅 밟기를 했기 때문에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당신의 마스터플랜대로 진행시켜 왔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여리고 성 주민이 뛰쳐나와 공격하고 오히려 전투에 패배했을 것입니다. 분명 순종했기에 그 결과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신자 쪽의 확신만 가지고서 땅 밟기 기도만 하면 어떤 장애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승리에는 수백 년 전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약속이 전제 되었고, 거기다 가나안의 죄악이 관영하도록 하나님 쪽에서 기다려 주었고, 나아가 그 기다리는 기간 동안 당신의 백성을 우상 족속 아래 노예 살이를 시켰습니다. 그 위에 가데스바네야에서의 믿음의 실패에 대해서 40년간의 연단을 거치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단강에서 담대한 믿음의 시험도 통과시켰습니다. 그 후 비로소 하나님은 땅을 밟으며 기도하라는 명령을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전적신뢰의 바탕 위에 신자의 거룩과 순종이 보태졌던 것입니다. 신자 스스로 계획한 땅 밟기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여리고 전투 기사에서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내용은 이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일생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런 계획을 무한히 신뢰하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담대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한 신뢰해야할 그분의 계획 가운데는 지금 당장 우리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환난과 장애도 마땅히 포함되어야 합니다. 아니 바로 그런 때에 신뢰해야 무한신뢰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럼으로써 신자를 보는 불신자가 우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먼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고 떨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작금 그렇게 담대하고 권세 있는 신자를 찾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기독교와 신자들이 힘을 잃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사회를 거룩하게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욕을 먹기 바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무한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죄악이 관영하는 이 땅을 엎어서 당신을 알고 따르는 백성들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그분의 마스터플랜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아니 아예 그런 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심지어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교회에 모여서 간구하는 것이 자기 일신상의 안일과 형통뿐이니 불신자들이 세상살이에 실패한 비겁하고 연약한 자들이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않고 절대자에게 의존만 하려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비방합니다.    

거기다 부끄럽게도 땅 밟기 기도의 온전한 의미도 모르고 그 형식만 따르고 있습니다. 불신자들 눈에는 이미 기독교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보이는데 땅을 밟고 주위를 돌아본들 오히려 기독교의 특유의 광신적 행위로밖에 여기지 못합니다. 여리고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땅을 밟기도 전에 이미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 않습니까?

땅 밟기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은혜로만 덧입고서 정말로 빛과 소금이자 한 알의 밀알로서 사회를 거룩하게 바꾸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 눈으로 생생히 확인 할 수 있어야만 먹히는 기도입니다. 실은 그들의 반응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리고 성 같은 기적적 간섭을 지금 시급하게 소망하고 있습니까? 아무 하는 일 없이 무조건 하나님의 공짜 은혜만 바라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그 정도 믿음 수준은 이미 다들 졸업하셨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큰 잘못도 없고 진정으로 겸비하게 기도하는 데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고난 가운데 있는지, 그래서 오로지 바랄 것은 하나님의 긍휼뿐인지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부터 곰곰이 점검해보십시오. 진짜 하나님께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신의 평생을 두고 그분이 나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선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해 놓고 계심을 확신하는지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미심쩍다면 이전의 자신에게 베푸신 홍해의 기적이나 철저히 승리토록 해주어 감사로 충만했던 기억을 떠올리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것과는 다릅니다. 그분에게는 한 치의 부족함이나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두를 실제로는 여리고 성 잎에 갖다 놓으신 분입니다. 아니 신자가 겪는 매사가 사실은 여리고 성일뿐입니다. 문제되는 것은 우리의 그분과 그분의 계획에 대한 무한신뢰일 뿐입니다.  

7/30/2011

이선우

2011.08.06 07:33:27
*.222.242.101

앗, 오타!
"여리고 성 주님이 뛰쳐나와 공격하고": 주님 -> 주민
웬간하면 그냥 넘어갈텐데, 제가 젤 좋아하는 주님이 뛰쳐나와 공격하신다니...ㅎㅎ
목사님, 오타 발견한 사람에게 포인트 주기 하면 어떻습니까?
포인트 모아 연말 포상도 해 주시면..ㅋㅋ

늘 귀한 말씀 주심에 감사!!!

운영자

2011.08.08 00:38:54
*.104.237.156

화들짝 놀라서 바로 고쳐 놓았습니다.
제 글을 모니터 해서 잘못을 지적해 주는 회수에 따라
년말 포상제도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참석자가 많아야 재미도 있고 상품도 올라갈 텐데 .....

글을 다 쓰고 여러번 읽고 고치고 자동 맞춤법 교정까지 거치는데도
이런 경우는 맞춤법 상으로는 틀린 것이 없으니 당연히 필터링이 되지 않습니다.
문맥상의 논리나 인간 사고 흐름의 오류까지 체크하는 것은 최고성능 컴도 불가능합니다.
아직도 기계가 하지 못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래야 인간끼리 서로 힘을 보태어 도울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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