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후2:9,10)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에 맞서는 길

조회 수 636 추천 수 19 2011.08.15 02: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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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에 맞서는 길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2:9,10)


예수님의 초림은 사단의 멍에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때는 그 반대로 끝까지 완악하게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초림과 재림 사이는 심판이 유보된 은혜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라고 풍성한 자비와 긍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시기를 불법의 비밀은 이미 활동하고 있으나 막고 있는 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계속 온갖 추한 죄를 범해도 인내하고 계시기에 실은 당신의 진노를 스스로 막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불법한 자가 나타나 대환난을 일으키겠지만 주님이 영광중에 강림하시어 그를 죽이고 신자의 구원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솔직한 바람은 적그리스도나 대환난이 없는 재림이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구태여 신자들로 대환난을 겪게 할 필요가 있을지, 왜 신자들마저 미혹에 넘어가도록 그냥 두시는지, 그러지 않아도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언뜻 주님이 잔뜩 생색내면서 당신의 영광만 크게 높이려는 의도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가 잘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도 함께 올라가고 신자가 궁핍해지면 그 반대가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런 하나님을 믿는 신자니까 당연히 매사에 형통하고 세상에서도 높아져야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당장 지구를 멸망시켜도 단 한 치의 손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평생 노력해도 스스로는 결코 그분의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을 거역하고 원수의 자리에 섰던 죄의 형벌을 벗어날 가능성은 아예 제로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어떤 것, 심지어 당신의 자녀의 믿음과 경건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유일한 예외는 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말하자면 그 극심한 적그리스도의 대환난 중에도 오히려 감사하고, 서원한 일을 다 준행하며, 그 시험과 핍박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주님의 구원만 간구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不義)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11,12절) 예수님이 생전에 약속하신 말씀그대로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어떤 신자도 적그리스도의 유혹은 물론 마지막 때의 대환난을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어쩌면 자신의 믿음이 대환난은 물론 유혹마저 이겨내지 못할 만큼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라도 예수님이 당신의 영광을 높이려고 적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고 또 죽이는 것은 아닌지 여기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부터 걱정한 것입니다.      

물론 적그리스도의 유혹이 얼마나 교활하고 또 대환난이 어떤 정도까지 참혹할지는 아무도 짐작조차 못합니다. 종말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비추어 자연스런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림하시어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8절)라는 약속에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동화에나 나오는 용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면서 불을 뿜어 적그리스도를 죽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12절)를 심판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신자는 시험과 죄악은 항상 말씀으로 이겨야 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의 유혹과 대환난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 이겨내야 합니다. 혹시 너무나 지당하면서 평범한 대책인 것 같습니까? 핍박과 환난이 없는 지금도 사소한 죄나 시험을 말씀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인데 그 때는 더더욱 자신이 없을 것 같습니까?  

말씀으로 이긴다는 바로 이 점에서도 신자들이 오해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방법론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고 문자적으로 실천하면 저절로 큰 능력이 나타난다고 여깁니다. 물론 진심으로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큰 능력이 따릅니다. 그러나 말씀 자체가 방법이라고 믿으면 자칫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됩니다. 엄밀히 말해 성경 말씀을 믿기보다는 그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자 영원한 진리를 믿고 그대로 준행해야 하는 법입니다. 쉬운 예로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대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할 수는 없고 그 내포된 영적 의미와 원리를 믿고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때에 끝까지 붙들어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바로 본문입니다. 아무리 적그리스도의 시험이 교묘하고 끈질기고 마지막 핍박이 극심해도 주님의 승리는 목전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은 인류 역사의 일정표에 따라  재림하시겠지만, 그 때가 결코 일방적 독단적 작정은 아닙니다. 또 단순히 적그리스도를 죽이러 즉, 당신의 영광만 드러내려 강림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주님이 반드시 오셔야만, 또 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오십니다. “그로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도 이 땅의 상황이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의 독생자가 동정녀에게 탄생하신 그대로, 또 때가 차매 그분은 영광중에 심판하러 강림하실 것입니다.  

본문의 설명대로 주님은 당연히 불법의 비밀이 극에 달해 인간 죄악이 땅에 관영하고 있을 때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말세야! 종말이 임박했어.”라고 인정하듯이 인간 세상은 항상 죄에 찌들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럼 아무리 세태가 추하고 어지럽더라도 종말을 지레 염려하지 말고 대신에 반드시 재림해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상태를 따로 추적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초림과 재림 직전의 이 땅의 차이를 세밀히 구별하고 있는데 그 둘을 잘 대비해 올바른 종말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18 & 21) 예수님이 초림하시기 전의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로마서가 설명한 내용입니다. 재림 직전의 상태를 데살로니가후서에선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다.”(12절)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림 때나 장차 재림 때나 사람들이 불의(不義, unrighteous)한 것은 동일합니다. 말하자면 어느 세대에나 죄악이 성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초림 전에는 "진리를 막았고", 재림 전에는 "진리를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초림 때는 하나님의 존재까지는 인정했지만 고의로 그분 뜻대로는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를 경건치 않았다(ungodly)고 즉, 하나님이 바라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도덕법이나, 인간 양심의 윤리는 살아 있었지만 그대로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게(injustice) 산 것입니다.

반면에 재림 전에는 진리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존조차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에 대해선 불법(不法)이란 용어를 추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법을 어기는 것도 불법이지만, 본문의 헬라원어는 법 자체가 없다는(lawlessness 無法)의미로 정확히 구별해 사용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초림 전에는 그래도 자신들이 어느 정도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중에는 회개하려는 자들도 있었으니까 구원해 주려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다 재림 때는 하나님이나 절대적 선악의 기준이 아예 없다고 여깁니다. 무슨 짓을 해도 불법이 아니니까 즉, 무법이니까 제 멋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아예 회개할 마음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 어떤 일을 해도 정당하고 옳으니까 회개할 근거나 필요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봐서도 더 이상 회개를 기다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로 심판을 유보하는 것을 거두고 심판을 시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전에는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는 것을 어느 정도 용인하다가, 마지막 때에는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를 기대하며 은혜를 베푸시던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에 찬 것입니다.      

정작 더 흥미롭게도 성경은 사람들에게는 초림 때나 재림 때나 불의하다고만 표현합니다. 대신에 불법은 사단에게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살후2:7,8)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든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나 흉악한 범죄자라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대적인 사단과 그 졸개는 아예 그 자체가 죄악 덩어리이자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아서 그분을 아예 없애려 드는  존재입니다. 사단은 오직 어둠 안에서 어둠만으로 먹고 지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진리, 선함, 아름다움이라면 사단은 정반대로 절대적 거짓, 악함, 더러움인 것입니다.

그런 사단으로선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실존은 인정하되 짐짓 무시하게만 해도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 노예로 삼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사람들로 더 죄를 많이 짓고 더 악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훤히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심판과 재앙을 불러오기 보다는 구원과 복락을 주시는 분임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깨닫게 했습니다. 그 영원한 진리는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 진리를 막는 정도로는 안 되고 아예 믿지 않게, 즉 소멸되게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단의 전략이 바뀐 것입니다. 초림 전에는 사람을 불의한 정도로 그냥 두어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구속의 비밀이 상징, 징조, 예언, 묵시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참 은혜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수건을 가린 것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죄인을 사랑하실 줄은 사단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구속이 완성된 골고다 이후로는 사단이 갖고 있던 진짜 비장의 무기를 서서히 꺼내들어야만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령이 충만할 때는 감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또 종교인들이 스스로 타락하여 암흑시대가 된 중세에도 그 무기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종교 개혁 이후에는 본색을 드러내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단의 흉계도 다 꿰뚫어 아시고 그 비밀이 조금씩 활동하는 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자연히 독생자가 육신으로 오신 것과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또 그런 풍조에 세상 사람들은 완전히 넘어가고, 신자들마저 많이 속자 사단은 기고만장하여 불법의 비밀을 성육신한 실체로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다시 오실 예수님이 말씀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 예비되어 있기에 마지막의 그 교활한 유혹과 극심한 핍박도 신자들에게마저 허용하는 것입니다.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비밀은 사단의 불법의 비밀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 분의 능력과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무게는 우리 인간의 추정과 상상은 물론, 사단의 계산마저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고 위대하십니다.

이제 신자가 마지막 시험과 환난을 전혀 겁내지 않을 이유가 명백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단보다 광대하시다는 너무나 간단한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성경 말씀으로, 특별히 본문과 로마서를 비교하여 불법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특별한 구절의 말씀 자체보다 성경에 일관되게 계시 된 영적 진리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모든 세대의 신자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불의가 아닌 불법이 성행함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말살시키려는 풍조가 자꾸만 거세지는데, 그것도 교회 안에서부터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적그리스도의 어떤 유혹에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결국 성전의 높은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큰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가 제 이의 구세주인 양 행세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어떤 짓을 해도 불의가 아니니까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즐기라고 부추길 것입니다. 또 그러니까 사람들의 열광적 호응을 얻고, 심지어 신자 가운데 넘어가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구원의 초림과 심판의 재림의 분명한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왜 그렇게 되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일정표대로만 역사를 진행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 특별히 신자의 상태 때문에 하나님으로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되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선 지금도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고 계시는지, 오직 그 사실만이 가장 큰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비밀은 항상 그 비밀을 꿰뚫고 있는 자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불법의 비밀이 아무리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지금 당장 나타나 신자를 못살게 군다한들 두려울 것 하나 없습니다. 교묘하게 우리 영혼의 불의한 찌꺼기를  건드리면서 불법 즉, 무법이 옳고 좋다고 꾈 것입니다. 그럼 비록 우리는 불의하기 짝이 없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이 땅을 불법과 무법의 상태로 버려두지 않으리라고 담대히 선포하며 맞서기만 하면 됩니다.

바꿔 말해 마지막 때에도 신자는 십자가 진리 안에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시고 연약한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절대로 소멸되지 않는 예수님의 거룩한 십자가 광채뿐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만 바라보는 신자에게는, 종말이 아무리 급박하게 또 최고로 참혹하게 다가와도 오히려 영광스런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8/13/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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