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6:8) 누구나 가라!

조회 수 678 추천 수 34 2011.01.18 20: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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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이사야가 여호와께 소명 받는 장면을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그를 지명(指名)하여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막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 성경은 분명히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고 설명한 것과는 달리, 그냥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럼 사무엘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삼상3:7)였기 때문이고, 이사야는 이미 여호와를 알고 그 말씀도 받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내심으로는 이사야를 지목했으면서도 탄식의 수사법을 통해 그로 간접적으로 눈치 채게끔 한 것입니까? 그 자리에는 자기밖에 없으니 결국 나더러 가라는 소리 아닌가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하도록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는 모습은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예컨대 모세는 떨기나무의 타지 않는 불꽃으로, 야곱은 여호와의 사자와의 씨름으로, 요셉은 꿈으로,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평생의 소명을 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의 어느 누구, 어떤 것으로도 영향 받지 않습니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께서 완벽하게 이끄실 뿐입니다. 요컨대 이사야는 그분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를 지명하지 않고 당신 특유의 장탄식 독백으로 부르셨다는 점은 주지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며 병을 고치고 말씀을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중에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선,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군은 적다”(마9:37)고 탄식했지 않습니까?  

여호와가 이사야를 불러낸 말씀은 정말로 잃어버린 세상의 수많은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그대로 온전히 묻어 나온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보시고 너무나 민망한 안타까움의 발로입니다. 아담의 원죄 이후부터 당신의 독생자를 다시 보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모시킬 때까지 단 한 치도 변함없을 당신의 애끓는 심정 그 자체입니다.

지금도 그분은 이사야를 불러낸 안타까운 모습과 똑 같이 모든 신자를 향해 추수할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신자라면 모두가 그 부름을 듣고서 당장에라도 추수할 곳으로 달려가라는 뜻입니다. 또 모든 신자의 근처에는 하나같이 추수할 거리는 언제나 널려있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네가 가라는 것입니다. 오래전 특정 장소와 특정한 때에 특정인 이사야만을 향한 부르심이 아닙니다. 이사야로선 마침 하나님의 그 부르심을 들었던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이사야가 그저 우연히 하나님의 탄식을 들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에 앞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면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모습을 목격하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면 가장 먼저 자신의 부정(不淨)함부터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나도 거룩하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고 곧바로 그 자리에 무릎 꿇게 됩니다. 주여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오직 바랄 것은 주님의 긍휼뿐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합니다. 도무지 부끄러워 숨기 바쁜 그 더러운 모습인데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주님의 포근한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심을 실제로 느끼게 됩니다. “때에 (이사야가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한 그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火箸)로 ...  내 입에 대며 가도뢰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6,7절)  
  
다시 말하지만 회심의 때에 신자는 가장 먼저 자신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영적 실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 주위에도 이전의 자신의 처지와 똑 같이 닮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을 그대로 두어선 멸망밖에 기다리지 않음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됩니다. 또 그와 대조해서 이제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자신과 그분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 새로운 삶이 얼마나 귀한지 실제로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놀랍고도 크신 은혜를 맛본 신자는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이 누가 강요하거나 권하지 않아도 반드시 생기게 됩니다.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자 하는 소망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추수할 일군을 부르는 음성이 이사야처럼 자연스레 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를 들어 써달라는 헌신도 당연히 따르게 됩니다.

당장 목사나 선교사로 결단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긍휼의 탄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인식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세상을 독단적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분에 대한 의심, 불평, 불신이 끊어질 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직접 만나면 목자 없이 유리하는 인간 군상들과 온갖 고난과 죄악이 범람하는 이 비뚤어진 세상을 그분이 더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뜻은 세상을 보는 그분의 안타까운 심령에 구구절절이 공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갈급해 하면 하나님도 안타까워하듯이, 신자도 주위의 그런 영혼을 보면 진심으로 민망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울면 자신도 울고, 이웃이 한숨 쉬면 자신도 한숨 쉬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여 함께 그 고난을 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 같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궁핍하고 힘들어 하는 이웃을 자기 것을 희생해가며 잘 섬기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최고 수준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덕적 종교적 섬김으로 멈춰선 안 됩니다. 영적인 보살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신자 되기 전은 물론, 된 이후에도 여전히 너무나 궁핍한 자신의 심령처럼 그들의 심령 또한 똑 같이 그러하다는 것을 절감한 데서 오는 긍휼의 보살핌이어야 합니다. 불신자는 예수 십자가 복음을 미처 모르고 배척하는 것이, 또 신자임에도 그 온전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귀한 보물을 놓치는 일이기에 최고로 안타까워져야 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평생토록 겪어야 할 모든 고통, 슬픔, 갈급함, 눌림, 허망함, 더러움, 추함, 부끄러움 등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과의 일대일 관계가 온전치 못함에 기인할 뿐입니다. 예수 없이는 아무리 현실적 인간적 큰 입신양명을 이뤄내도 그야말로 향방 없이 행한 허사일 뿐입니다. 또 결국은 아무 열매 없이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듯 빤한 이웃의 처지를 도무지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신자의 가슴 깊은 절박함이 섬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자신이 구원 받았고 그 은혜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지 점검하는 결정적 기준이 바로 본문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뜻대로 실제로 세상에 보내어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주님의 긍휼로 이웃을 섬기고 있는지 말입니다. 혹시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당장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최소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장탄식을 언제 어디서나 듣고 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제 제대로 알기에 자신이 겪는 현실적 고통에서 이전 같은 의심, 불평, 불신은 당연히 사라진 채 말입니다.

1/1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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