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4:11,12) 너무 좋아 믿기 힘든 횡재

조회 수 726 추천 수 20 2011.04.25 0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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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 믿기 힘든 횡재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細麻布)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24:11,12)


실제로 일어난 사실은 믿어야 할 근거를 찾을 필요 없이 저절로 믿어집니다. 아니 구태여 믿으려들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유일하게 믿음을 요구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오랜 과거라 믿음이 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에 대한 증거가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네 복음서의 기록(4명 이상의 증언)이 있지 않습니까? 이천 년 전 사건을 두고, 아니 어떤 고대의 역사적 사건도 그렇게 상세하게 전후사정을 기록한 경우는 사실상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더 오래 된 삼사 천년 전 일도 비석에 새겨진 조각 그림 하나만으로도 사실로 인정하는데 비하면 부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너무나 인색하고도 불공평합니다.   

예수님과 삼 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해 듣고는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무덤에 다녀온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10절) 즉, 법적요구증인 2명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이 와서 돌이 옮겨지고 무덤은 비었고 천사들이 부활을 확인했다고 전했는데도 말입니다. 그 모든 여자들이 입을 맞추어 거짓말을 지어냈거나, 모두가 잠시 환상을 본 것으로 치부한 셈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당신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예언 내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스승이 물위를 걷고 광풍도 말씀 한마디로 잠재우고 온갖 불치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는 기적을 바로 곁에서 목도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지 못했는데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 없었거나 순수하지 않은 믿음이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에선 어느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스승이 완전히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이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이런 식으로 약점이 노출 될 수 있는  자기들 스스로 의심했다는 기록을 남길 이유는 없습니다.

거짓말은 그 고유의 특성상 어떤 작은 틈에서건 허점이 노정되거나, 거짓을 거짓으로 보충하려다 꼬리가 길어져 결국은 탄로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네 복음서의 부활 기록은 성경의 다른 어떤 기록보다도 세간의 모든 비평과 반발을 잠재울 만큼 합리적이고도 객관적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도 오히려 가장 완벽한 변증이 가능한 기록입니다.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Who moved the Stone?”(누가 돌을 옮겼는가?)이라는 책의 저자 프랭크 모리슨도 처음에는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그 허구성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관련 자료를 추적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정반대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을 부인코자 시도했던 그간의 모든 가설들이 오히려 궤변, 날조, 가공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본문에도 주님 부활의 객관적 타당성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도들은 의심했습니다. 곧바로 믿었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직접 무덤에까지 현장실사를 나갔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를 보나, 군병들이 수직하며 지키고 있는 가운데 장정 여럿이 지렛대를 사용해야 움직여지는 무덤 막은 돌을 어느 누구도 감히 옮길 엄두를 못 내었을 것입니다. 최초 증인 여자들이 옮겼을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시체를 감싸고 있는 세마포는 쉽게 벗길 수 없었습니다. 이미 피와 땀과 죽은 후에 나오는 진물들로 몸에 짝 들어붙어 있었을 것입니다. 완전히 신령한 형체로 부활하지 않고는 세마포를 스스로 벗는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세마포를 입은 채로 돌아다닐 수도 없습니다. 나사로가 중인환시(衆人環視) 리에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요11:44) 무덤에서 나왔던 경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을 조작해서 퍼뜨렸다 쳐도 무덤을 수직하고 있는 사이에는 둘을 굴리기도 힘들지만 세마포를 벗길 여유라곤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베드로는 그런 증거를 보고도 여전히 긴가민가했습니다. 만약 그가 이 단계에서 스승의 부활을 확고히 믿었다면 더 이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던, 없어진 시체든 반드시 명확한 물증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분의 수제자라고 해도 여자들 말만 믿거나, 빈 무덤에 세마포만 남았다고 부활을 전파하고 다닐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타당한 기록입니까?  

물론 부활의 확실성이 성경 기록의 논리적 합리성만으로는 결코 입증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 복음서가 주님이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서 활동했던 기록은 없고 빈 무덤에 대한 기록만으로 끝이 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활이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역사적 진실이지만 그 증거 자료가 부족할 뿐입니다. 증거 부족이 사실을 부인하거나 말소시키지는 못합니다.

영원히 미궁으로 빠질 것 같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기록은 남겨질 것입니다. 현대인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과학문명이 발달할 2천년 후의 독자에게 그 기록이 읽힌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지금도 수십 년 전 혈흔(血痕) 하나를 분석해 억울하게 갇힌 죄수의 무죄를 입증해내는 판인데, 물증 하나 없는 그 기록을 이천년 후에 사실이라고 믿기는커녕 이해조차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화성연쇄살인은 분명 일어난 사실이지 않습니까?  

복음서의 부활 기록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아무리 물증이 없어도, 사실은 물증이 있는 것이 더 이상함, 네 명이(고전15:6 - 부활하신 주님이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적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음) 세밀하게 증거하는 그 기록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 후대인이 온전히 믿든 못 믿든 지금 성경 그대로 기록되어져야만 했습니다. 아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니까 어떤 반발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서의 부활기록은 당대의 사실성 여부를 밝히려는 목적 이상의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로 인해 그 다음에 일어난 또 다른 사실을 후대 독자로 알게(‘믿게’가 아님) 하려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부활 증거가 허탄한 듯 여겨져 믿지 않았던 제자들과 기이히 여기고 집으로 돌아갔던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활을 믿은 정도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을 기록할 사명을 받은 요한사도 한 명만 빼고는 그 부활 사실을 증거하느라 전부 순교했습니다.
  
어떤 사건이 진실이라고 증거하느라 죽는 바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거의 모든 사람이 아주 믿기 힘든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의 누명을 벗거나,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건, 나라의 독립 운동하는 것과도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일들은 자신의 명운과 직접 연관되는 본인의 일입니다.

사도들의 죽음은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실은 부활 승천해서 이 땅을 벗어났지만, 한 젊은 랍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동시대인들에겐 정말 무모할 정도로 쓸 데 없는 짓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제자들 수십 명과 신자들 수천, 수만 명이 순전히 타인을 위해서 참혹하고도 고통스런 죽음을 기쁨과 감사로 택한 것이야말로 부활보다 더 믿기 힘든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는 오늘날 엄연한 역사적 진실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불신자들도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진짜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도무지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 원인을 제공한 부활은 믿지 못합니다. 아니 끝까지 믿지 않으려고 고집부리고 있습니다.  

무위도식하던 무일푼의 거지가 어느 날 갑자기 대형 아파트를 사고 최고급 외제차를 사서 화려하고도 풍요롭게 살았다 칩시다. 그렇다면 복권에 당첨되었거나 누가 그만큼 공짜로 돈을 준 것입니다. 그 외의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순교는 믿으면서 부활 사건을 믿지 않는 것은 거지가 실제로 화려하게 살고 있는 것을 눈에 보고도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지가 풍요롭게 사는데 질투 내지 화가 난 까닭이거나, 그렇게 말하는 이가 정신이상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주님의 부활 사건에서 정작 중요한 요소는 따로 있습니다. 초대신자들이 과감하고도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부활이 사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였기에 주님을 위해선 어떤 고난도 감내하고 심지어 죽음의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도 단순한 소망을 넘어서 반드시 실현될, 아니 이미 실현된 사실로 확고히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6)

말하자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물려죽거나, 산 채로 불에 타서 순교할 때에 단지 인간적 의지력과 인내심으로 이겨낸 것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임하여서 신자들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하늘 문이 열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희락 가운데 천국으로 들리워져 올라갔습니다.

우리로선 그 고통의 세기나 또 함께 하는 성령이 위로하는 감격의 정도를 도무지 측정하거나 짐작할 방도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모든 신자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순교의 고통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빈 무덤에선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던 베드로도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은 주님께 누가 된다고 스스로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는 전승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이후에 일어나는 순간적이며 급격했던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는 우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보고 만지고 함께 먹고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당혹되고도 믿기 힘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제는 너무 좋아서 믿기 힘든 사건이 되었습니다. 마치 거지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 거지가 일등 복권을 자기 손에 쥐고 있듯이, 부활하신 주님도 제자들이 모인 방 한복판에 서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그저 주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구름 위에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다 성령을 받고선 주님의 부활 권세를 누리며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주님의 의를 행하는 능력 있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핍박에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죽기까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거지의 비유를 다시 들자면 일등 복권에 당첨된 사실에 흥분되어서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정신을 차린 셈입니다. 돈으로 바꾸어서 집과 자동차와 사업체를 사서 풍요로운 삶을 활기차게 영위하고 있는 중입니다. 헐벗고 굶주렸던 지난 신세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럽다 못해 시기하기까지 신나고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 부활하신 날에 신자가 취해야 할 참된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도 미심쩍다면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았는지부터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주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만 감사해선 너무나 부족합니다. 엄밀히 말해 예상 밖의 큰 횡재를 하는 바람에 너무 좋아서 믿기 힘들어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이미 부활 생명과 권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다 못해 시기할 정도로 주님과 함께 범사에 넉넉히 승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권 당첨 된 거지가 그 기념으로 복권을 돈으로 바꾸지 않고 액자에 넣어 갖고 다니는 바보는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절대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됩니다. 나 자신의 부활을 기념해야만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선 부활된 신령한 존재로 거룩하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부활절만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이미 부활된 존재로 살고 있기에 일 년 365일이 부활절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오늘 하루 부활절을 기념하고 마는 정도라면 베드로처럼 기이히 여기며 집에 돌아간 것 밖에 안 됩니다. .  

여러분은 예수를 믿은 것이 너무 좋아서 믿기 힘든 인생의 최고 큰 횡재를 했다고 확신합니까? 나아가 그 횡재를 기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을 주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횡재로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이 거창하고 부담스럽다면 최소한 주위 사람으로부터라도 그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4/24/2011

정양호

2011.04.25 20:02:25
*.54.202.195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래글도 역시 신앙고백적 칼럼인데 제 불로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

빈 무덤이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한가 ?
-다시 새겨보는 빈 무덤 이야기…부활사건을 과소평가하는 현대판 유대주의자들




일반적으로 역사를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빚어내는 사상(事象)을 기록한 것이라고 정의할 때 무엇보다도 사료(史料)의 진실성(眞實性)을 그 생명으로 한다.

전직이 세리였던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마태복음 제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족보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그 이유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 전에는 도무지 믿지 않았던 동시대인인, 유대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족보를 제시하는데 여러 가지 자료가 빈약했을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42세대를 추적하는 프로젝트가 과연 하루아침에 될 법한 일인가.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완성한 그의 날렵한 역사적 통찰력은 예수 부활 사건의 진상을 역사적(歷史的) 사실에 입각하여 그 전모를 밝힌다.(마 28:1~15)



그 당시 예수를 죽인 유대주의자들은 “그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에 불안을 느꼈던지, 만의 하나라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가 예수 부활을 날조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였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인봉(印封)은 물론 당시 세계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로마 군대를 동원하여 철통같이 지키도록 한다.



그러나 부활사건 당일 큰 지진이 나며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흰 하나님의 천사가 예수 부활의 증언자로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고,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천사를 보고 무서워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편 천사가 무덤을 보러 온 여자들에게는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으니 무서워 말고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며 그의 빈 무덤을 부활의 확실한 1차 증거자료로 공개한다.



이 기절초풍한 초자연적인 사실을 몸소 체험한 파수병들은 즉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 부활의 역사적 뉴스를 공적으로 보고한다. 기막힌 소식을 접한 유대교 장로회에서는 그들이 우려했던 예수의 육체 부활이 실제 사실로 눈앞에 드러나자 당황한 나머지 자신들의 악을 엄폐하고, 부활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어떤 물밑 거래(Deal)를 공식 결정한다.



"파수병들이 잠자는 동안 제자들이 도적질해 갔다"는 이른바 시체도적설(屍體盜賊說)을 비밀히 여론에 흘리는 대가로 엄청난 거액의 뇌물(bribe)을 지불할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근무 태만, 명령불복종 죄에 해당하는 십자가형이나 그 어떤 책임도 전적으로 장로회에서 책임지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예수 부활은 새빨간 거짓이다. 빈 무덤은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기 때문이다"는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마 28:15). 어처구니없게도 힘없는 제자들은 감히 빌라도의 인봉을 뜯어내고 시체를 도적질했을 뿐 아니라 "죽은 예수가 살았다고 함으로 혹세무민한다"는 누명까지 뒤집어 씌워 꼼짝달싹 못하게 원천 봉쇄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마태는 예수부활과 빈 무덤 기사의 일단이 돈·권력·종교적 교조주의에 눈이 먼 한 집단의 모략과 음모에 의해 실제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과 그런 사실 자체가 예수 부활의 진실성을 더욱 공고히 입증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한다.



혹자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추종자였기 때문에 사실이든 아니든 부활을 변증하고 옹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당대에 예수를 추종하던 자들을 유대교의 이단이라 생각하여 박멸하려고 선봉에 섰던 한 외부인이 실제 경험한 진술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부활사건 얼마 후 강력한 정통 유대주의자요, 하나님께 열심이었던 사울은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고 떠들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수쟁이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유대 최고회의가 인정하는 체포영장을 쥐고 살기등등하여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정오의 빛보다 더 강한 이상한 빛 때문에 그는 땅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윽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듣게 된다(행 9:1~30).

'예수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실상(reality)을 목도하는 순간 유대교의 골수분자였던 사울의 뇌리에는 아마 여러 상념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스쳤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끝장난 그 나사렛 예수가 아닌가' '부활한다고 큰 소리쳤지만 부활은커녕 세간(世間)에 시체도적설이 역사적 정설로 되어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교권주의자들의 음모와 조작이란 말인가'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린 그 예수가 부활하셔서 지금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니'그렇다면 그분이 나사렛 이단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단 말인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철석 같이 믿고 있었는데 정반대로 그분을 핍박하고 있다니 이게 왠 말인가?'

다메섹 도상의 사건 이후 철옹성 같은 그의 전통도 가치관도 종교도 '오직 예수'를 위해 모두 다 배설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사울의 회심사건(turning point)은 그가 고백한 대로 당대에 가장 늦게 발생되었던 명백한 예수 부활의 산 증거라 말할 수 있다.(고전 15:8)



19세기 독일이 낳은 세기의 철인 칸트의 영향으로 성경 이적 전체를 불신하는 신학사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0세기의 일부의 신학자들은 구속사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예수 부활을 긍정하나 관점과 의미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인식할 수 있는 기록으로서 역사, 즉 사실로써 역사(History)가 아니라, 사실이든 허구든 창작이든 관계없이 일단 신앙의 창문을 열고 신앙 그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 즉, '초역사'(Geschichte)의 시각으로 역사를 인식한다.



전자는 부활사건이 문자 그대로 부활의 현장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실제적인 역사 그 자체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건 자체보다는 기록자의 신앙고백적인 과거 사건의 재구성 또는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라고 보는 측면으로 역사적인 예수와 신앙의 예수(이데올로기화한 예수, 현상학적으로 현재 경험할 수 있는 예수)로 구분하기도 한다.



문제의 초점은 예수의 역사적 상대화, 예수 신앙의 상대화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히고 기독교 신앙의 마지노선인 ‘오직 예수’의 신앙을 왜곡, 유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history) 속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최후·최대의 적, 사망권세를 물리치시고 정복(V-Day)의 노획물로 빈 무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며("My victory is yours!") 부활 신앙을 힘차게 격려하신다.



빈 무덤은 이 지구촌의 어느 인생도, 어떤 종교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의 것이다. 빈 무덤은 재림의 나팔 소리에 창세 이후 무덤 속에 있던 모든 인류가 부활로 호출되어 영생과 영벌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상(icon)이다(요 5:29). 그래서 빈 무덤은 영광스럽고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 영의 사주를 받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 부활을 거부하려고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요란한 기교를 부린다 해도 결국 말 바꾸기일 뿐, 성경 진실의 본질을 결코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선교단체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무슨 계기로 '무너진 여리고 성' 얘기가 나왔다. 옆에서 같이 공부하던 한 목사가 대뜸 자기는 "그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화 가운데 알게 되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전공했다는 그다운 대답이었다. 바야흐로 교회 안에도 예수의 육체 부활을 믿지 않은 자들이 상당히 많이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적이 놀란다.



실로 2000여 년 전 저 나사렛 예수가 나의 죄 때문에 죽었다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그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어지는 것이 얼마나 비정상인가? 그럼에도 전혀 의심 없이 믿어지는 예수 부활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이요, 신비 중의 신비다.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했고, 사건의 진실과 정의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더욱이 빈 무덤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예수부활을 거부하기로 작심했던 자들이나 성경의 많은 신비적인 사건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요리조리 해석학의 머리를 굴리며 "부활을 2000년 전 나사렛 예수에게서 찾지 말고, 날마다 생활 현장에서 정신적인 부활로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라든지, "예수는 정말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것일까?" 또는 "빈 무덤이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한가?"라고 과소평가함으로 부활사건의 가장 중요한 객관적인 증거를 인멸(湮滅)하려 시도하는 교회 안팎의 현대판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우리 주님의 따끔한 경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 39,40, 마 15:14)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신 그가 부활할 만한 실력도 없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성경이 참이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부활도 참이요, 빈 무덤도 역시 참이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userId=greatimpact&logId=5491609

정순태

2011.04.26 12:21:32
*.75.152.183

좋은 글, 감사합니다!

누가 돌을 옮겼는가?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변증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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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눅24:11,12) 너무 좋아 믿기 힘든 횡재 [2] 운영자 2011-04-25 726
775 (요12:23-25) 책의 서문을 잘 쓰고 있는가? 운영자 2011-04-23 563
774 (요15:15) 신자는 두 얼굴을 가져야 한다. 운영자 2011-04-21 587
773 (시32:6)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운영자 2011-04-17 625
772 (신5:8,9) 하나님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운영자 2011-04-15 562
771 (느8:9) 주일날 신자가 꼭 해야 할 일 운영자 2011-04-14 681
770 (눅4:41-43) 사단의 비밀과 예수의 비밀 [1] 운영자 2011-04-08 723
769 (단9:12) 다니엘과 우리의 극명한 차이 운영자 2011-03-05 624
768 (단2:28) 중심을 보이기보다 내어드려라. 운영자 2011-02-14 652
767 (단2:28) 기적을 일으키는 신자가 되려면? 운영자 2011-02-12 682
766 (레6:25) 이중인격자가 되어 있는가? [3] 운영자 2011-02-04 764
765 (애3:19-23) 날마다 변소청소를 하고 있는가? [3] 운영자 2011-02-01 731
764 (요4:13,14) 영적 침체의 실체 [1] 운영자 2011-01-26 836
763 (창22:2) 세상은 절대 알지 못하는 최고의 축복 [4] 운영자 2011-01-24 843
762 (사6:8) 누구나 가라! 운영자 2011-01-18 678
761 (사6:8) 바로 네가 가라! [2] 운영자 2011-01-17 682
760 (요20:19,20) 너희에게 평강이 있느냐? [4] 운영자 2011-01-14 1104
759 (눅8:23-25) 신자를 부끄러이 여기는 하나님 [5] 운영자 2011-01-12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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