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3:23,24) 하나님 할아버지인가? 하나님 아버지인가?

조회 수 889 추천 수 28 2011.01.06 19:31:06
운영자 *.104.233.212
하나님 할아버지인가? 하나님 아버지인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 ,24)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려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다르게 믿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엄밀히 말해 치명적일 수 있는 오류는 하나님을 오로지 무한한 사랑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긍휼과 인자에 다함이 없다는 그분의 속성에 조금이라도 저촉, 모순되는 해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랑의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고통당하게 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기에 야단치고, 벌주고, 독하게 구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환난으로 밀어 넣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나 사탄의 짓일 뿐입니다. 그분을 무한한 사랑으로만 묘사합니다. 당연히 현실에서 출세 형통하는 것을 그분도 아주 기뻐하시고 또 그럴 수 있도록 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분은 무제한적인 사랑으로 모든 이를 무제한적으로 구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인류를 심판으로 내모는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발전하여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럼 이단을 따르는 이, 사탄숭배자, 불신자 구별할 것 없이 구원 가능성이 그분의 사랑만큼 무한히 열리게 됩니다. 믿음 아니 종교와 무관하게 모든 이가 스스로 마음먹기에 구원이 달렸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열심히 믿을 필요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무 조건 없이 영원토록 무한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야 말로 사랑의 화신으로 존경하고 또 승화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말 뿐입니다. 솔직한 그 속내가 무엇입니까? 그분께 오직 사랑만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현실적 복 외에는 그분께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기대를 백 퍼센트 반영한 하나님이지, 성경이 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일부 진술을 핑계 삼아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 말씀을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지 않는가? 또 저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라고만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구원의 한쪽 면만 바라본 것입니다. 나머지 한쪽은 독생자를 반드시 죽여야 할 만큼 죄에 대해선 철두철미 저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본문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값없이 얻는다고 하니까 언뜻 공짜라는 뜻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생은 따 논 당상이라는 것입니다. 값없다고 해서 무조건 복 주는 하나님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죄로만 점철되어 있고 그 죄를 스스로 씻는 데는 완전 속수무책입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까지 설명한 내용입니다. 영적으로 점수를 매기면 모두 빵점입니다. 인간이 지불할 수 있는 값이, 정확히 말하면 지불하고 싶은 마음마저도, 전혀 없기에 하나님이 값없이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불할 수 있는 것이라곤 완전 벌거벗은 몸뚱이뿐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선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완전한 파산선고를 받을 뿐입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하나님으로선 우리 모두를 당장에 죽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독생자를 죽여서 그 값을 완벽하게 치르게 했기에 인간으로선 치를 값이 없어진 것뿐입니다. 그분의 입장에선 천하보다 더 귀한 값을 치룬 구원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값없는 구원입니다. 당신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자기 독생자를 죽여서까지 인간의 죄책을 벗기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보여주고 행할 수 있는 의(사랑이 아님)입니다. 이 의(義)는 사랑을 포함하지만 사랑만으로는 그 의를 다 설명하지 못하니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이 말씀을 보는 우리 관심의 초점은 어디에 가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여기’가 어딥니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당신의 사랑이 나타나는 ‘여기’는 어딥니까? 천천히 숙고하면서 읽으면, 사실은 자세히 볼 것도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우리는 아들을 ‘구원’을 위한 화목제로 보내셨다고만 간주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필히 전제 또 동반되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저주를 생략하면서까지 인간에게 존경, 추앙, 아부, 공치사를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쇠퇴 소멸시키면서까지 당신의 의를 절대로 타협, 조종, 굴절, 변개, 왜곡 시키지도 않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 조건 없이 사랑만 베푸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사랑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오케이며 달라는 대로 다 줍니다. 할아버지가 손자가 그렇게 사랑스런 까닭 중 하나는 그들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고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일은 아이의 아빠 엄마가 맡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빠 엄마의 아이에 대한 사랑은 마땅히 다릅니다. 무조건 한정 없이 응석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홀로 서서 훌륭한 사회인이 되도록 엄하게 훈련시킬 때가 더 많습니다. 잘못하면 따끔하게 벌을 줍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사랑의 하나님만 믿으려 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할아버지로 바꾸는 셈입니다. 아니 스스로 그분의 참 아들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생자로 전락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혼한 엄마가 재혼하는 바람에 청소년 자녀로선 어쩔 수 없이 의붓아버지로만 모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진정한 사랑의 교류는 없이 단지 먹고 사는 일만 신세지는 관계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모시겠다는 생각의 근본뿌리입니다.

조금만 깨인 인간 할아버지라도 손자의 응석을 다 받아주어선 아이를 도리어 망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잘못하면 때론 엄하게 야단을 칩니다. 사랑의 하나님만 믿으려드는 것은 그분을 인간 할아버지의 수준에도 못 미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아니 겨우 응석받이 철부지 손자가 고집하는 그런 할아버지 하나님 밖에 안 됩니다. 실제로 새벽기도마다 어서 빨리 이 환난만 없애달라고 울부짖으며 떼쓰는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할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손자가 아님)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12:7) 나아가 그런 육신의 아버지도 아들이 당연히 존경해야 한다면 벌주시는 하나님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합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12:9)

역으로 말하면 아들로선 자기가 아무리 잘못을 범해도 아버지가 벌주지 않고 계속 침묵하고 있다면 곧 벌이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슨 일에나 상만 주는 아버지는 도리어 이상한 아버지라고 우습게 볼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아니 일부 기독교인들조차 너무나 완악하고 치사하게도 하나님을 아버지 대신 자꾸 할아버지로 모시려고 합니다.  

이런 경우를 너무나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영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priceless는 직역하면 값이 없다는 뜻이지만, 값을 매길 필요도 없을 만큼 싸구려라는 의미와 도무지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싸다는 두 경우에 다 적용됩니다.

구원을 무한한 사랑이라고밖에 해석 못하는 경우는 인간의 입장만 강조한 것입니다. 도무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른 하나님의 입장은 아예 무시한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하지만 사실은 구원을 완전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양대 속성으로 사랑과 공의를 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 둘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부인할 수도 없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입니다. 그 둘을 자꾸만 별개로 떼어서 생각하려 듭니다. 마치 동전에 앞뒤 두 면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것은 어쨌든 그 앞면 하나라도 정확하게 말한 것이니까 절대 틀린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틀린 생각입니다. 십자가에는 오직 한 면만 있고 또 그 한 면에 사랑과 공의가 함께 불가사의한 신비로 섞여서 완전한 하나로 완성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은 십자가 앞면에만 달렸지 사랑의 예수는 십자가 앞에, 또 공의의 예수는 십자가 뒷면에 달린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나아가 예수님 안에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불가사의한 신비로 독생자 하나님이 구세주로 성육신하셨지 않습니까? 똑 같은 원리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죄인을 구속하는 비밀의 경륜이 복음 안에 완벽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아무 흠 없는 제물이라야 죄를 완전히 씻을 수 있는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죄책을 단 한 톨도 남기지 않으려는 죄에 대한 철두철미한 저주와, 당신이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죄인은 단 한 명도 멸망치 않게 하려는 철두철미한 긍휼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로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것은 복음의 온전한 진리가 아닐 뿐 아니라, 반쪽이라도 정확하게 진술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반대로 십자가로 공의의 하나님만 강조해서도 똑 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사랑이 아닌 방임의 하나님이 되고, 후자는 공의가 아닌 율법의 하나님이 됩니다.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똑 같은 질과 양으로 강조되지 않은 십자가는 가짜이자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서두에서 제가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것이 치명적 잘못이라고 말한 뜻을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또 그런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인간이 자기들 기대대로 스스로 고안해낸 하나님이라고 단정 지은 이유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실제로 원하시는 그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인간 애인을 위해서도 상대가 바라는 대로 다해주는데 영원한 운명을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이미 인도하신 하나님께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완벽하게 합쳐진 한 분 아버지 하나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12:10) 하려는 것이므로 즐거이 받아서 고침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또 본문에 이어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신 이유를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롬3:25)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온전히 항복하는 자만 따로 의롭다 칭해주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절대로 자기 의를 자랑치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평생토록 예수님의 십자가만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구원 후에도 그분의 공의를, 이제는 심판이 아닌 징계의 공의를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받아서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철두철미 싸워야 합니다. 또 그와 동시에 여전히 너무나 부족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그분의 사랑 앞에 철두철미 항복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내가 그분에게 예상, 기대, 소원, 심지어 믿는 대로만 절대 고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그분이 나에게 예상, 기대, 소원, 심지어 믿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그대로 쓰임 받도록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6/2011


김순희

2011.01.07 13:10:07
*.161.91.154

부띠끄 영성이란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영성, 그저 사랑만 주시길 간구하는 신앙인을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십자가는 양 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한 면만, 그 안에 완벽한 사랑과 공의가 신비롭게 섞여
완전한 하나가 되어있음을 배웁니다.
죄에 대해 철두철미 저주하시는 하나님, 자녀로 예정된 죄인에겐 철두철미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신기한
사랑 앞에 죄완 피 흘리기까지 싸우길 다짐해 봅니다. >_<

이선우

2011.01.07 19:37:38
*.120.153.150

아멘!
이 글을 먼저 보았다면 좀전에 올린 제 해설편(버려두심 vs. 내어주심)을 따로 올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골머리 앓으면서 쓴 내용의 진수들이 여기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니..
우째 이런 일이.. 영적인 전율이 느껴지는 순간..
역시 목사님과 저는 뭔가 확! 통하는 사이가 아닐까요?ㅋㅋ

하람맘

2011.01.08 07:54:20
*.186.65.144

언제나 하나님은 저희에게 하나님 할아버지 이기를 간절히 바랬던것을 고백합니다... 고통속에 있을때나 주님께 벌을 받고 있을때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결국엔 좋은 결과를 기다리면서 - 하나님께서 아주 크신 긍휼?을 베푸실꺼라고 확신하는 것이 제 믿음이라고 생각했던것을 고백합니다... 정말 부끄럽지만 내버려두심 - 언젠가 일어날 큰 환란이 나의 축복이지만 그 것을 뛰어넘어 주님은 나를 사랑하니까 또 다른 것으로 도와주심... 언제나 저의 결론 이였습니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저에게 하나님은 저에게 사랑만 주셨던 친정아버지... 안쓰럽고 미안하고 다칠라 고생할라 불쌍히만 여겨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 다시한번 고백합니다... 옛날에 목사님께서 구원이라는 것을 쉽게 설명해 주시면서 놀이동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구원받은 신자는 놀이 동산 자유 입장권을 모두 받았는데 놀이동산 담장에 붙어서 밖만 바라보는 자와 이것 저것 모두 타면서 즐기는 자 -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전 그때 그 놀이동산의 놀이기구가 제가 좋은것, 행복한것, 받을 수 있는 축복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래 댓글을 달은후 자려다 든 생각은 그 놀이기구들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말씀, 기도,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한 즐거움이라는 것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좁은문을 들어가는.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그 큰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을 깨닫는 순간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순희

2011.01.09 13:32:35
*.161.91.154

구원을 놀이동산에 비유하심이 참 이해하기가 쉽고 좋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놀이동산에 들어와서 자꾸만 담장밖의 모습에 맘 빼앗기는 우리의 모습,
담장밖의 솜사탕, 알사탕이 너무 먹고 싶어 침을 삼키고 있는 신자의 모습,
이젠 맘을 다잡아 정말 기가막힌 나라에 들어와 있고 자유입장권까지 예수님의 보혈로 거저
받은 하나님 나라의 왕자, 공주임을 절절이 감사하며 아무리 좁은문, 좁은길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기쁨, 감격에 늘 가슴 설레며 살아가길 다시헌번 다짐해 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58 (시90:10,11)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4] 운영자 2011-01-10 782
» (롬3:23,24) 하나님 할아버지인가? 하나님 아버지인가? [4] 운영자 2011-01-06 889
756 (고전6:19,20) 기적의 삶을 살라. [3] 운영자 2011-01-03 676
755 (잠16:9) 새해 계획을 어떻게 짤 것인가? [2] 운영자 2011-01-03 701
754 (눅8:19-21) 성모 마리아가 되어 있는가? [2] 운영자 2010-12-28 686
753 (출4:1,2)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가라. [3] 운영자 2010-12-07 745
752 (마6:19,20) 어디에 보물을 쌓고 있는가? [3] 운영자 2010-12-06 618
751 (엡2:8,9) 믿음도 과연 선물인가? [1] 운영자 2010-12-05 709
750 (엡2:8,9) 선물을 자랑하는 바보 [2] 운영자 2010-12-02 677
749 (행7:55-57) 신앙의 최종 목표 [6] 운영자 2010-11-29 878
748 (왕하19:14,15) 신자의 ALAP와 하나님의 ASAP [2] 운영자 2010-11-21 713
747 (눅7:28) 왜 우리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큰가? [7] 운영자 2010-11-05 16362
746 (눅7:28) 세례 요한이 왜 가장 큰가? [5] 운영자 2010-11-04 711
745 (눅7:23) 교회 안에 만연한 실족한 자 [2] 운영자 2010-11-03 790
744 (눅7:13-15) 성경을 읽는 즐거움 [2] 운영자 2010-11-01 793
743 (눅7:9,10) 최고로 빨리 응답된 기도 [4] 운영자 2010-10-17 800
742 (눅6:47-49) 믿음의 반석이란? [6] 운영자 2010-10-14 924
741 (눅6:39-41) 신자 된 최고 큰 축복 [4] 운영자 2010-10-11 680
740 (신31:8) 단 두 가지 일도 못하는 신자 [4] 운영자 2010-10-09 863
739 (눅6:37,38) 후히 주어야 할 이유 [3] 운영자 2010-10-06 2398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