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32:25) 원수에게 조롱 받는 신자

조회 수 1372 추천 수 152 2006.02.04 17: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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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출32:25)



시내 산에서 40일간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거룩한 율법을 받고 내려온 모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방자했습니다. 여기서 “방자”하다는 원어의 뜻은 단순히 방탕하고 무질서하게 먹고 마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파라(풀어 놓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드러내다” 혹은 “발가벗기다”는 뜻입니다. 금송아지에게 우상 숭배한 죄를 범함으로써 자신들의 수치가 완전히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죄는 본질상 그 더러운 성격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수치와 두려움을 반드시 동반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죄의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즐겁고도 신나게 죄에 빠집니다. 그 이유는 수치와 두려움은 죄를 범한 후 그 여파로 뒤에 따라오지만, 죄를 범하기 시작할 때는 항상 쾌락을 동반하며 심지어 광명한 천사의 모습을 띄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란 사람으로 하여금 후회해야 이미 늦도록 만듭니다. 그것도 이전에 실패했던 똑 같은 죄가 수치와 두려움의 그림자는 뒤에 감추고 전면에는 매번 색다르고도 화려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선 다시 넘어지게 만듭니다. 죄에 대해선 후회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후회(後悔)는 문자 그대로 물이 엎지르고 난 뒤에 주어 담으려는 것이라 아무리 해도 허사일 뿐입니다. 죄를 이기려면 반드시 죄의 이면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의 가면을 보지 말고 죄가 항상 몰고 다니는 시커먼 그림자를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금송아지 숭배의 죄가 방자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원수는 일차적으로는 애굽이며 나아가 사단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출애굽을 요구하면서 그 이유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의 말씀이 내 백성을 내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출5:1)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의 그 명분과 목적은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출애굽한지 몇 달도 안 되어 여호와께 예배 드리기는커녕 애굽에서 보고 들었던 어쩌면 숭배까지 했을지 모르는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셨으니 애굽이 볼 때는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이 뛰어야 벼룩이지 별 수 있겠어.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게 뭐야! 결국 사람은 고기 가마 곁에서 신나고 재미 있게 사는 것이 최고야!”라는 비웃음이 모세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사단은 흑암의 장막 뒤에 숨어서 음흉한 조소를 머금고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던지는 미끼와 그물에 안 걸려드는 자가 없지. 저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경건하고 거룩한 척 해봤자 결국 속셈은 잘 먹고 살 사는 것이라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도 오직 그것인 줄 다 알지. 돌로 떡 덩이를 만들어 주고, 성전에서 뛰어 내려도 하나 다치지 않게 해주고, 천하 만국의 영광까지도 주는데 금송아지 앞에 춤추지 않을 자가 있겠어. 일단 내 마수에 걸려들게 하려면 무엇인들 못 주겠어. 내 앞에 경배만 하면 당장에 어둠의 자식, 거짓과 살인하는 자로 바꾸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지. 오늘도 내 종들의 숫자만 자꾸 늘어나는구나. 흐흐흐!”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어 교회에 나오면 불신자들, 그것도 가장 가까웠던 친구, 형제, 부모가 어떻게 비난합니까? “예수가 밥 먹여주냐? 예수를 믿느니 차라리 네 주먹을 믿어! 예수를 믿었으면 만사 형통해야 할 텐데 왜 오히려 어려운 일은 더 생겨? 예수는 다 지어낸 이야기야. 의지가 약해서 세상에 실패한 사람들이 그저 자기 위로를 얻으려고 속아 넘어가고 있다고.”

그러나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그런 조롱을 잘 이겨냅니다. 아니 그런 조롱을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더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깁니다. 성령으로 중생한 체험이 있고 세례를 통해 죄가 씻어졌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그분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권세가 너무 귀하고 또 그분과 동행하는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가 바로에게 말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경배드리며 찬양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 사람이 조롱하기도 전에 우리 스스로 금송아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왜 잘 믿었는데도 이렇게 꼬이고 힘들기만 하는가 잔뜩 불만을 안고서 세상과 사람과 물질에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사람이 부러워 그들의 흉내를 냅니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두고 “예수 믿어도 똑 같네, 혹은 더 하네”라고 빈정대는 소리를 자청해서 듣습니다. 그들이 처음 조롱한대로 우리의 속마음이 딴데 있음을 우리 스스로 세상 앞에 방자하게 드러냅니다. 원수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신자가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 독생자마저 조롱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별 볼일 없네!” 그렇다고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형통하고 갑부가 되어 그들 앞에 예수가 더 힘이 세다는 것으로 증명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 돈 벌고 형통하는 재주로는 신자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 사람과 도저히 견줄 수가 없습니다. 또 그들은 돈이 많고 적음으로 인해 예수 믿고 하나님을 찾을 절실한 마음이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죄가 방자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자에게만 예수가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영혼에 죄로 인해 큰 수치와 두려움을 느끼는 자라야 세상의 조롱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조롱 받아야 할 일은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높은 자리에 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기 전에는 사단의 종이 되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죄와 하나님이 원수 사이이기에 자기도 죄와 원수 사이가 되기를 소원하는 자에게만 예수의 권능과 은혜가 함께 하고 또 세상의 조롱을 이길 수 있게 해줍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가 돈이 떨어져 세상 앞에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면 오히려 세상의 조롱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상한 결론이 되었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은 자기들과 같이 신나게 먹고 마시려는 목표를 가진 자들은 조롱하지 않아야 하는데 신자가 그러려고 하니까 오히려 그들부터 조롱 받습니다.

왜냐하면 애굽과 사단이 조롱하는 것의 본질이 사실은 신자가 돈을 많이 가지느냐 세상에서 형통하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즐기는 죄와 원수 되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 오직 하나 때문입니다. 요컨대 세상 사람이 “예수 믿어도 별 수 없네”라고 조롱하는 것의 참 의미는 신자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 자체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조롱을 하는 모든 불신자의 뒤에는 반드시 사단이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에게 속했는가 사단에게 속했는가 두 종류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단에게는 광야에서 자기의 시험을 이겨낸 자는 예수가 유일했고 또 그 예수에게 골고다에서 철저하게 머리가 짓밟힌 뼈에 사무치는 처절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시내산 금송아지 앞에서도 사단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 모세라는 놈이 내 일에 항상 훼방을 놓는다 말이야. 저 놈만 없으면 이스라엘 전부를 다시 애굽의 노예로 삼을 수 있는데… 그런데 저 놈 뒤에는 여호와가 있으니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

사단이 하나님과 그 자녀에게 보내는 조소는 거짓과 공허에 가득 찬 헛웃음일 뿐입니다. 인간이 정말로 인간다워지고 참 평강과 위로를 얻는 것은 절대로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영혼의 최고로 깊은 심층에 하나님의 위로가 채워지면 세상에서 부러울 것 하나 없어지게 됩니다. 오히려 그 위로만 더 사모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어떤 것이 부족해도 아쉽지가 않게 됩니다. 그런 부족으로 불편은 하지만 근본적인 평강과 자유함을 위협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절대로 신자에게 더 이상 농간을 부릴 수 없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 세상의 조롱을 이겨낸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당장에 돈을 벌고 형통해서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 출애굽했다, 사단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이제 평생을 두고 예수를 따라 좁고 협착한 길로 가길 소원해…”였지 않습니까?
  
죄는 방자합니다. 반드시 누군가를 조롱해야 하며 심지어 자기들 죄인들끼리도 조롱할 정도로 방자합니다. 그 죄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죄의 가면을 벗기고 그림자를 보는 길 뿐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절대로 앞에선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고 난 후에 자꾸 후회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흉계를 완벽하게 물리친 예수님만 바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자꾸 불신자 시절의 애굽의 고기 가마가 그리워지는 자신을 죽이고 그분의 십자가를 매고 가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얼마나 방자한지 잊지 않고 그 죄를 죽기까지 미워하는가 아닌가로만 자신을 계속해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2/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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