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1,2) 죄책감에서 해방되어라.(1)

조회 수 1860 추천 수 31 2010.09.22 23: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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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에서 해방되어라.(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예수 믿은 후에 누구나 느끼는 영적 현상은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영혼이 부패하여 죄가 죄인 줄 몰랐을 뿐 아니라 죄를 좇고 즐기기 바빴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양심은 물론 있었지만 오로지 자기중심적으로 작동했기에 온전한 의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그마저도 자기 자랑에 불과해 하나님 보시기엔 죄였을 뿐입니다.  

구원 후에는 성경, 특별히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 의에 비추어 무엇이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내주하신 성령님이 신자가 미처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거나 더러움에 가까이 가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기에 영적 눌림과 깨우침이 생깁니다. 죄에 대한 이런 민감함이 없다면 사실상 거듭남 자체마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민감함이 지나쳐 죄책감에 너무 빠져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하나님 앞에 성결해지려 열성적으로 노력하다가 아주 작은 죄만 지어도, 혹은 죄 짓고도 곧바로 회개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심하게 자책합니다. 나아가 혹시 그분의 징계나 심판을 받을까, 심지어 구원이 취소되지나 않을지 두려워합니다.  

본문은 그런 염려는 아예 틀렸다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신자라면 어지간히 다 알고 있는 영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납득하는 정도로 그쳐선 죄책감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진리란 반드시 자신의 체험으로 실증되어져야 합니다.

물론 다시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죽어서 천국에 가봐야만 완전히 확증될 성질입니다. 그런 체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이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서 절감되어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뼈저리게 깨우쳐져야 합니다. 또 성령으로 거듭나는 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에 바탕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7장은 믿은 후에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바울 자신의 비통한 고백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2-24)

그래서 그가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의 법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 언뜻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내용 같습니다. 구원 후에도 죄를 짓고 있는 영적 피폐함의 해결책이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길 것이며 또 그러는 것이 감사하다는 투이니까 말입니다.

바울이 모든 죄를 용서해주는 복음 안에 들어왔으니 계속 죄짓겠다든지,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육신적 연약함으로 인해 성화는 포기하고 단지 감사만 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 인간의 그런 연약함의 원인과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우선 인간의 본성 안에 숨겨진 죄의 권세가 너무나 강함을 체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열심과 의로운 행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력을 경주했어도 여전히 죄의 법이 자기를 묶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호라 곤고하고도 죽을 몸이라고 처절하게 고백할 만큼 죄와 계속해서 씨름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스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죄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철저한 자각이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져주지 않았다면 자기 인생에는 도무지 소망이라곤 없었다는 고백이 저절로 입술에서 새어나온 것입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라곤 단 한 톨도 발견할 수 없음을 알고선 자아가 완전히 다 부서져나간 처절한 실망의 탄식입니다.

그와 동시에 십자가의 광채가 자기 영혼 깊숙이 비춰져서 그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신 주님의 사랑을 양껏 체험했다는 환희에 찬 외침이기도 합니다. 자기 의지로 시행한 도덕적 반성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이 간섭하여 저절로 터져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영적 실체가 너무나 가난함에 대한 애통함과 그 가난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예수님의 긍휼을 가슴 가득히 느낀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죄는 절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용서와 성령님의 지속적으로 깨끗케 해주시는 능력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신자가 죄책감에 묶일 이유는 없습니다. 영적 회개를 그만 두라는 뜻이 아니라 정죄감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마저 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자인하면서 오직 예수님에게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같은 범인이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면 너무나 큰 교만이자 위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해결해 주신 문제를 그분은 제쳐둔 채 자꾸만 자기 능력 즉, 제 딴에는 높다고 자부하는 도덕성으로 다시 깨끗케 만들 것이라고 끝까지 끙끙대고 있는 꼴이니까 말입니다.

바꿔 말해 중생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에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 반응했던 적이 있는 자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전혀 의심치 않습니다. 자아가 완전히 부서진 상태에서 예수님 외에는 속수무책임을 철두철미 느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은혜와 권세는 세상의 어떤 죄라도 덮고 남을 만큼 무한함을 압니다.

“나 같은 죄인”을 왜 사랑해주시는지 그 까닭은 몰라도 분명히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은 지성, 감성, 의지를 통해서 확실히 또 풍성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아니 그 앞에 서기는커녕 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게 됩니다. 이처럼 실제로 성령이 간섭하면 일회적이든, 점증적이든, 때로는 반복적이든 자아가 완전히 깨어진 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차는 체험을 반드시 하게 됩니다.

당연히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자 생명이라는 고백이 아무 주저 없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자기를 대신해 죽으셨기에 더 이상 어떤 것으로도 그 대속의 은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영원토록 살아있는 절대적 진리가 됩니다. 또 그런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 외에는 이 땅에선 아무 소망이 없음도 날마다 순간마다 체험하기에 죄책감에 묶일 이유가 전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이후에는 분명히 죄에 아주 민감해지긴 했지만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되지 못할 죄가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설령 너무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쓰러졌더라도 미쁘신 그분 앞에 담대히 나오기만 하면 당신의 거룩한 의로 덧입혀 주심도 수도 없는 체험을 통해 알게 됩니다. 죄책감은 자연적 반응으로 따르지만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 예수님께로만 돌리면 곧바로 그분의 신령하고도 풍성한 긍휼이 우리의 전부를 감싸 안으십니다. 요컨대 죄책감에 묶여 있는 것만큼 신자에겐 헛된 영적 낭비가 없다는 뜻입니다.      

9/22/2010

정순태

2010.09.23 09:30:34
*.75.152.231

늘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미숙한 자, 바로 제 모습입니다. ㅠㅠ
주님 십자가에 모든 것을 맡기고 쉬운 멍에를 매기 원하면서도
모르는 새, 다시 정죄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다시 힘 내야겠지요...
귀한 가르침, 잘 받아 갑니다. 감사~~~!!!

김순희

2010.09.23 16:05:16
*.165.73.38

저도요.
늘 돌고 돌아 제 자기에 서 있는 것 같아 맘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같이 매고 걸어야함에도 순간 순간 그 멍에를 내 손으로 살그머니 벗겨내고
내 몸만 쏘옥 빠져 나오기 일쑤인 저를 봅니다.
환경이 숨이 죄어올 때 너무도 자주 멍에는 주님 혼자 지세요 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ㅠㅠ
결국 이 곳에 와서야 다시 말씀으로 맘을 추수리곤 합니다.
이런 말씀이 있기에 감사요. 감사요.

쌀로별

2010.09.23 19:02:45
*.234.16.126

문득 바울 선생님의 마음이 어땠을까 궁금해집니다. 복음을 말하고 죽은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이 늘 떠오르지 않으셨을까... 삶의 방향성을 송두리째 바꾼 만남이었을텐데요. 아마 천국에 가시거든 예수님 다음으로 뵙고 싶은 얼굴이었을지도 몰라요.

죄의 무서움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만큼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온전히 매달릴 수 있으셨을거예요. 저는 무엇보다도 믿지않는 지인들에게 죄와는 상관없으신 완전 무결한 분께서 용서하신다라는 걸 알려주고 싶지만... 저부터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되묻고 또 되묻습니다. 저는 물론이고요 정말 이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습니다.

기쁨의 날들

2010.09.24 01:28:19
*.179.184.136

돌고 돌아 늘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는 말씀들이 딱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것 같습니다.우리가 어떤 상대로부터 정말로 듣기 싫은 말을 듣게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귀를 막고 싫어 싫어 싫어 라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실제로 외칠때도 있고요.
그런데도 상대방이 계속 한다면 우리는 정말 빡 돌아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더욱 더 처절한 상태가 될것입니다.
죄가 다가올때 정말 그런 심정으로 싫어 싫어 싫어 라고 외치며 몸부림치며 거부하는 것이 나의 진심이 되지 않는다면 죄를 이기지 못한다고 어떤 책에 씌어 있더군요.
내일 아침 눈뜨면 빌린 돈을 갚으려고 준비를 해놓았는데 오늘 밤에 채무자가 집에 찾아와서 이쪽 말은 일체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로 무조건 퍼붓기 시작해서 다섯시간을 계속했다고 하면 정말로 벗어나고 싶은 지옥같은 상황일 것이고 채무자가 돌아가고 난뒤에도 밤새도록 꿈에서 싫어 싫어 싫어 라고 외칠 것입니다.
어두움의 영들이 다가올때 그렇게 절박하게 싫어하지 않으면 그영들은 끝내 마음을 파고든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죄를 그렇게까지는 싫어 하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죄를 지어서 주님께 너무 송구하고 때로는 주님께서 처벌하실까 두렵기도 하지만 진짜로 죄를 몸에 붙은 때처럼 박박박 긁어내고 내삶에서 추방하고 싶어하지는 않는것 같은 자신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박정명

2010.09.26 05:19:22
*.108.173.248

죄를 짓지 않을려는 지나친 부담감은 완벽주의나 율법주의에 매일지도 모릅니다. 이 모습 이대로 뻔뻔스럽게, 당당하게 예수이름의지하고 나아갑니다.

하람맘

2010.09.27 06:32:06
*.186.65.172

왜 저는 돌고 돌아 또 제자리인데 또 당당하게 돌고 있을까요. 너무 단순하고 너무 무식해서 믿음이 확실한 것일까요... 전 오늘도 뻔뻔하고 당당하게 주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감사하고 있으니까요 ^^ 주님을 알기전에 지은 너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까지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신 주님을 그냥 마냥 찬양하며 감사하니까요 ... 때로는 단순 무식한 제가 더 편한것 같아요

Steve

2010.10.31 02:55:17
*.169.221.248



죄책감은 믿는자의 영적인 삶 즉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후 살아가야할 삶이며, 구원 받은 믿는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 죄가 주홍빛 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처럼 깨끗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구원의 말씀이지만 구원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항상 죄악 속에서 넘어지며, 함께 뒹굴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좋아 거룩한 삶만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창세 전 부터 알고 계십니다.)
죄를 범한 후 뻔뻔해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죄책감에 빠지지 말라는 강한 능력의 말씀이요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이미 심리 치료의 처방을 주셨습니다. 제가 배워 알고 있는 말씀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자백의 법칙 (Rebound Technique) : CONFESSION

요한1서 1장 9절 말씀에는 하나님은 미쁘시사 우리가 지은 죄를 (기억하고 있는 죄) 자백하기만 하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삶에 있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이후 범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일시적으로 관계가 끊어졌던 것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함이 없는 교인의 삶, 즉 영적인 삶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되고 맙니다. 그 교제를 다시 회복 즉 처음 믿었을 때 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의 상태로 돌아 가게하는 유일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합법적인 은혜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마치 농구 경기에서 리바운드 볼을 잡는 것과 같은 형상이라 <Rebound Technique> 라 명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순간 우리의 영원한 위치가 정해 집니다. 즉 영생을 은혜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 Positional Sanctification = In Christ We are washed, justified and sanctified'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성령님과 교제를 비로소 시작하게 되며 영적인 현상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이 땅에서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 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성령 충만한 상태가 (Be filled with Holy Spirit)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전혀 죄를 범하지 않고 항상 성령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날이 부닥치는 사람, 제도, 생각에 의해 항상 시험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지라 마음으로 범하는 죄 (생각: Mental Attitude Sins) 입, 행동의 범주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범주의 죄를 범하게 되면 성령님께서는 죄와 더불어 거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령님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죄의 본성의 (Old Sin Nature)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성령 충만 하라 (Be filled with Holy Spirit)' 어떻게 성령 충만 할 수 있을까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은혜 가운데 성령 충만 하는 방법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요한1서 1장 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God the Father: 하나님 (God the Father) 자백 하면'에서 자백의 원 뜻은 고대 사회의 법정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원어에서 사용된 동사 Homologeo (Admit, acknowledge, cite, name) 란 법정에서 사용되는 말로 죄인이 범한 죄를 법관 앞에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이 때 법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감정이 개입될 수 없으며 지극히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심판 받으실 때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모두 걸머지게 하셔서 형벌을 가하심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범하는 모든 죄들에 대해 주님께서 대신해서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언제 무슨 죄를 범할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법정의 판례에 의해 사면 조치가 -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God the Father)께 자백만하면 예수님께서 그 모든 죄에 대해 이미 심판 받으셨고 죄가 용서되었음을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God the Father) 께서는 그 판례에 따라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정확하시며 완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이 은혜로운 방법에 의해 우리는 다시 리바운드 볼을 잡은 상황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는 그 순간처럼 하나님과 교제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완전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상태에 따라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가 달라질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 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를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늘어나고 줄어들 수 없습니다. 한결 같으십니다.
즉 CHESED - UNFAILING LOVE의 능력으로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령충만과 영적 성숙은 언제나 다른 의미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님과 교제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게 자라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충만은 영적이냐 육적이냐 이지 그 중간은 없습니다. 성령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다시 말해 생각, 말, 행동 등의 범주의 죄를 다 자백했을 때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성령 충만 즉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인 것 입니다. 성령님의 지배 하에 있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죄의 본성의 지배하에 있게 됩니다.

이 교훈의 말씀은 신자가 된 이후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교제함이 없이 기독교인으로서 행하는 것, 그 어떠한 봉사나 혹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의로 행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 신령과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진정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고 말씀 하신 우리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 성령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상태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의 개념에 대해 몇 가지 잘 못 알고 계신 분을 주변에서 보게됩니다.

성령충만 곧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의 성령 강림에 대해 먼저 떠 올리고 바로 그런 현상이 성령 충만이라 알고 있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미 믿었습니다.

그 이후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도 예수님을 먼저 구세주로 믿은 후 열심히 모여 성령 강림을 사모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 세례를 은혜로 주신다고 믿고 열심히 그렇게 따라 가는 종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세례인 것입니다. (방언과 통변과 예언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 믿는 것은 잘 못된 가르침이거나 제 욕심에 따라 믿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인 현상을 알 수 없고 말씀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우리의 거미줄과 같은 연약한 믿음으로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을 할 때에 성령님의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즉 성령 하나님과 항상 교제함으로써 그의 능력을 공급받음으로 이 땅에서 영적인 삶을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인의로서 삶을 하나님 앞에 세상 앞에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찬송을 하거나 말씀 공부를 할 때에 성령님과 교제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부터 단절되어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단지 학문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GNOSIS: 학문적 지식)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지혜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PIGNOSIS: 지혜). 바로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 살게 되는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하나님께 범죄한 것은 바로 "리바운드 기법 - 죄의 자백"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성령님과 교제함이 없이는 교회 봉사와 예배, 헌금 등이 모든 봉사활동, 섬김 등은 자기의 의로움만 (Self- righteousness) 쌓게 하는 교만에 빠지게 합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미리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이 놀라운 은혜의 장치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의 중요한 근간이 되는 이유입니다.

이 은혜를 모르고 이 기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의 의(Righteousness)만을 쌓고 자기 영광만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성경 말씀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심지어 무엇을 마시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서 64: 6에서 사람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아서 (Filthy rags: 더럽고 냄새 나는 걸레, 넝마라고 영어로 표기 되어 있지만 히브루 원문의 뜻은 여자의 월경대와 같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의로운 채 하여도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더럽고 냄새 나는 걸레 조각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니 우리가 의로운 채 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서는 더 비참해지고 더 형편없는 쓰레기와 같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의는 결코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요한1서 1장 9절 말씀에 의거하여 죄의 자백이 선행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올바른 자백없이도 교회 생활 혹은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상관 없는 신앙생활이 되며 예배가 되며 봉사가 되고 만다든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백할 때는 마치 법정에서처럼 감정이 절대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범한 죄를 사실 그대로 낱낱이 하나님 (God the Father) 께 고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 (God the Father)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는데 이것 조차 바로 거짓말이 되는 꼴이 됩니다. 절대 감정이 개입된 자백은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지은 죄를 인정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런 연약함을 아시기에 십자가의 사역으로 인해 은혜로운 자백의 법칙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지요!

예를 들면 내 친한 친구 아무개를 미워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자백할 때 "하나님 (God the Father) 아무개를 미워했습니다" 즉 생각으로라도 지은 죄를 하나님 (God the Father)께 범한 죄 그 자체만을 고함으로써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백인 것입니다. 혹 이런 경험은 없으십니까?

어떤 지은 죄를 고백할 때 눈믈을 흘리면서 "하나님 (God the Father)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그 이후 정말 그런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대답은 '아니 또 그런 죄를 수 없이 범했다' 고 대답하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왜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그 순간에도 앞으로 범할 죄에 대해를 스스로 올무를 지우며 거짓 맹세까지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가장 먼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할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또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지은 죄를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에 따라 하나님 (God the Father) 앞에 인정만 하면 용서함 받을 수 있다면 (엄밀히 말하자면 교제를 회복한다는 표현이 옳을 것 입니다) 그러면 자백의 법칙은 죄를 짓게 하는 면허 (License to commit sin) 란 말이냐고? 반문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징계를 하십니다. 하나님과 그 자녀 간의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Not of our business' 입니다. 말씀을 배워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명령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다음 단계로는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위치적 성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화의 단계)
2) 체험적 성화 (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말씀을 배움으로 나날이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반영하며 사는 단계...이러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3) 궁극적 성화 ( 신자가 죽은 이후 죄된 육신의 몸을 완전히 벗어 버릴 때 바로 궁극적인 성화의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 후반 부의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죄 혹은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도 앞 부분의 죄(알고 있는 죄)를 자백함으로써 기억해 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cleanse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심) 해 주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자백 할 때에 감정에 지우쳐서 하시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역사할 수 없읍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방법, 즉 은혜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움직여서 감정이 주는 위안에 평안을 얻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 감정은 영적인 삶을 헤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9절 말씀에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koilia (감정)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에서 여기서 배로 사용된 히브리 언어는 koilia 라는 단어 인데 이는 위장 (배), 식도, 자궁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배 또는 식탐이라기 보다 Feeling 즉 감정 이라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의미가 더 명확해 져 보입니다.

미국의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예배 광경을 보실 기회가 영화를 통해서든지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 혹 직접 보셨을 것입니다. 좀 감정에 기운 예배처럼 보일 때가 없었는지요?

하나님께서만이 아실 일입니다만.....제 뜻은 감정으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드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만이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의 하나님께 오로지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리바운드 기법을 (죄의 자백의 법칙) 겸손되이 활용하여 영적 거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삶, 그 삶을 위하여 오늘 하루도 허락 받았음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의 올바른 삶은 바로 요한 일서 1장 9절 말씀의 올바른 적용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 자백의 법칙을 제대로 활용하여 승리하는 영적인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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