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3;22,23) 집단광기에 붙잡혀 있는 불신 세태

조회 수 842 추천 수 31 2010.05.21 21:45:17
운영자 *.108.161.181
집단광기에 붙잡혀 있는 불신 세태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눅23:22,23)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공표했습니다. 사형집행권을 가진 그를 찾아와 닦달했던 유대인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셈입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예수는 종교적 사상만 다를 뿐이었는데 당시 로마제국이 식민지의 토속종교를 허용하였으므로 그리 문제될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사형은커녕 벌줄만한 근거조차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재판이 있기 전까지는 예수님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구태여 예수를 미워하거나 시기할 이유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객관적 입장에서 순전히 법률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세 번이나 유대인들에게 제대로 합당한 죄목을 대어 보라고 거꾸로 반문했지 않습니까?

특별히 왕으로 이 땅에 왔다는 예수님의 말을 유대인들이 꼬투리 잡아 반역죄에 해당한다고 참소했지만 증거는 물론 그럴만한 낌새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무기 하나 지니지 않았고 군대를 조직해 훈련한 흔적이라곤 없는데 어떻게 반역이 성립되겠습니까? 재판장에 제자 한 명도 따라오지 않았지 않습니까? 반역죄를 탐문 수사 진압하는 데는 빌라도야말로 최고 전문가 아닙니까? 그래서 소요죄만 물어 적당히 매를 때리고 풀어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민란과 살인을 일으킨(23절) 바라바 즉, 로마와 헤롯의 법은 물론 유대 율법 등 어떤 법으로도 명백히 사형을 받아야 할 자는 살려달라고 고함쳤습니다. 죄라곤 단 한 번도 범한 적이 없고 대신에 불쌍한 자들에게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는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법정에서 한 발도 물러가지 않겠다고 덤볐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유일하게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믿는 민족이었습니다. 구제, 선행, 기도, 금식 등에 능한 자들이었습니다. 당시로는 도덕적으로 가장 선하고 종교적으로도 최고 경건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세속의 쾌락, 재물, 권세, 명예만 쫓는 이교도보다 윤리적으로 더 열등한 판단, 아니 도무지 인간으로서 행할 수 없는 악을 저질렀습니다.

바꿔 말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는 아우성이 단순히 제사장의 선동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에 대한 뼈저린 미움, 아니 영혼에 사무친 저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은 천하에 경건한 자라고 자부하는 그들더러 천하 죄인이기에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 날에 영원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율법을 밥 먹듯 어기는 출신도 분명치 않은 한 비렁뱅이가 나타나서 그랬으니 그들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칭 하나님 아들이니, 자기들 선조 아브라함도 당신을 보고 즐거워했다는 등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지라 아마 처음에는 미친 사람인가보다 무시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고 신기하게도 갈수록 그의 말에 마땅한 반박을 하지 못하고 아예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토론에 졌다기보다 말씀의 내용과 권세 앞에 꼼짝달싹 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전교 일등 하는 학생 앞에 듣도 보도 못한 시골학교에서 전학 온 아주 가난한 학생이 자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지식을 펼치는 것입니다. 기껏 초등학교 6학년 밖에 안 된 촌놈이 천체물리학을 그것도 영어로 막힘없이 설명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속에서 미움과 저주가 쉴 새 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 않겠습니까? 시쳇말로 미치고 폴짝 뛸 지경이 안 되면 도리어 이상한 것입니다.  

바나바 같은 사형수들은 자신의 한두 가지 법적인 죄로 벌을 받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데도 사형이라는 극형을 받았습니다. 로마법정에서나, 유대율법으로나 특정 죄목이 외면상은 몰라도 내용적으로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 세상에 더 이상 둬선 안 된다, 두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최고 큰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세상사람 전부의 죄 값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모든 상황 전개가 바로 그랬지 않습니까? 죄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 겉으로는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하고 경건해 보여도 심령이 썩을 대로 썩어 있는 죄인들에게 사실 그대로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죄 안에 사는 자들이 죄 밖에 있는 자에게 세상 최고의 처참한 형벌로 죽여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속마음은 틀림없이 이랬을 것입니다. “뭐라고? 아무 죄도 없는, 아니 세상에서 최고로 경건한 우리더러 천하의 죄인이라니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네가 정 그렇게 우긴다면 네 말한 그대로 네가 당해 봐라. 우리에게 정죄한 것과 똑 같이 심판해 줄게.” 그야말로 자기들 죄를 몽땅 덮어씌운 꼴이지 않습니까? 이런 인간들에게 그대로 당한 예수님 외에 구원의 길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십자가에 단 원인이 단지 죄에 대한 견책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 예수 앞에만 가면 영적으로 주눅이 들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방식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얼굴을 바로 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정확히는 모르지만 새 모습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과 유익을 포기하고 정말 예수가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강한 자기 부정이 생기고 자연히 그에 대한 미움만 점점 더 커져 갔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분의 빛이 자기들 어둠에 비춰져서 그 밝음의 좋은 점은 어렴풋이 느꼈지만 여전히 어둠이 훨씬 더 좋아 어둠 속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바라바 같은 살인죄인과 어울려 사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고 신날 것 같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손수 본을 보이신 삶은 아무 이유 없이, 어쩌면 옳다고 여기면서도 바로 그 옳은 것때문에 그분을 무조건 싫어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판단하여서 총독의 권위를 갖고 유대인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실패한 까닭입니다. 그들에겐 어떤 합리적 설명, 충고, 훈계도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세상에선 최고 지성인, 도덕군자, 종교가였는데도 예수 믿는 자를 기를 쓰고 잡아 죽이려 다녔지 않습니까?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섬김에서 자기만한 자가 없다고 큰 소리 쳐가면서 말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은 아무리 무죄해도 이단으로 몰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도리어 영광이 된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아 주었더니 떠나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살려 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돼지가 더 아까웠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에게서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하늘나라의 권위를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심지어 제자로 택함 받은 자마저 그분에게서 드러나는 하늘의 신령함과 거룩함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지금껏 하나님, 아니 예수님을 위한답시고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저주, 수탈, 폭력, 살인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은 또 기독교와 성경과 교인들을 말살해 버리려고 얼마나 많이 무고한 피를 흘리게 했고 지금도 흘리고 있습니까? 혹시 최근의 순교자들이 역사상 최고로 박해가 심했던 시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빌라도가 마치 유대인들보다 의로워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은 인간의 영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최고의 실례(實例)였습니다. 반면에 그럼으로써 법적으로 따져 그 법정에 예수의 동조자는 단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로마반역죄는 꿈도 꾸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힌트조차 없애버렸습니다. 빌라도로 사형시킬 구실을 아예 찾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그가 이성을 정당하게 작동했다면 끝까지 무죄 판정으로 버텼어야만, 최소한 자기가 말한 대로 매만 조금 때리고 주님을 방면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마디로 모든 세대 모든 자연인들은 무조건 예수를 배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분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는 빌라도 법정 같은 현상이 세상에선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터넷 댓글만 봐도 무죄한 자의 살인이 곳곳에서 행해지지 않습니까? 살인자들 중에 세상에서 칭찬받는 자도 많을 것입니다. 아니 모두 다 자신은 의롭다고 자부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합리적 설명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둠을 더 사랑해 계속 죄를 즐기겠다는 뿌리 깊은 인간의 성향이라는 변명 말고는 말입니다.

바꿔 말해 너무나 엄청난 어둠의 세력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선인지 악인지조차 모릅니다. 아니 아예 선이라고 간주합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노예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사는 목적이자 전부가 악입니다. 악이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아주 잘하고 있다고, 그것도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그런대로 객관적인 권면도 그곳을 짓누르고 있는 시꺼먼 세력에 파묻혀 모기 소리만큼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빌라도 그도 사단의 거짓 놀음에 놀아난 꼭두각시였습니다. 그 법정에서 거짓에 놀아나지 않는 자는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주님이 시종일관 침묵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대 청중은 자기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로마총독의 말도 듣지 않을 정도로 이미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말씀을 해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간을 지으신 분인지라 너무나 잘 아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유대 대중들이 종교권력층의 꾐에 순진하게 넘어갔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뒤에서 조종한 자들은 확고한 목적대로 움직였기에  빌라도 권면으로 뒤늦은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아예 씨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대중들은 스스로 꼭 지켜내야 할 특별한 기득권이 없었습니다. 그 꾐에 넘어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크게 잃을 것이 없었는데도 예수를 무조건 미워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보면 흑암의 세력의 실체를 더 생생히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그 법정의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농락해서 집단적 광기(狂氣)로 내몰았습니다. 여태껏 세상에선 전혀 보지 못한, 아니 전 역사를 통 털어 아예 볼 수조차 없는 거룩한 성자를 무차별적으로 린치 했습니다. 그 광기 안에 의로운 베드로도 조역으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일한 모습으로 스데반이 죽어갈 때에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위대한 사도 바울도 집단살인의 지휘자로 엄연히 동참했습니다.  

지금 모든 인간을 도매금으로 싸잡아 무차별로 비난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사단의 세력이 그만큼 무섭고 무차별적이며 엄청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를 믿지 않은 자는 전부 그 세력 아래에 종으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우리가 이전에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사단에게 그 영이 노예로 묶여 있는 이들을 볼 때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정말로 주지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에선 이처럼 선악의 구분이 아주 확연히 지어졌습니다. 그 중간 지대는 없었습니다. 골고다에선 예수님 혼자만 절대적 선의 편에 서있었지만, 차츰 열두 제자와 그 주변 인물을 통해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에는 단번에 오천 명이 노예의 사슬에서 풀려났습니다.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절대 타협, 조정, 융합, 변경 될 수 없습니다. 그 자체로 각기 절대성과 완전성을 가집니다. 각각의 궁극적 근원이 하나님과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듯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도 절대 조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배로 소지한 신자 또한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망과 생명 둘 중 하나의 냄새를 자신을 통해 불신자가 맡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땅히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 선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반대로 거짓의 아비 사단의 흉계를 철저히 해부하여 만천하에 드러내야 합니다. 절대적 악에 대해 절대로 타협, 조정, 융화는 물론 묵과도 해선 안 됩니다. 교회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세상사람 앞에 절대적 선과 악의 기준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어둠에 파묻혀 있고 또 그러길 좋아하는 불신자들일수록 그리스도의 빛이 얼마나 좋은지 내비춰 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작금 교회가 앞장서서 절대적 선악 간의 간격을 허물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것도 초대교회의 서로 사랑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주 의롭고 경건한 일이라고 자부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선 정말 모든 것을 나누며 자기 목숨을 바쳐서 다른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 악과 타협한 적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자보다 불신자들이 더 의로운 경우가 많다고 착각합니다. 물론 도덕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마치 본문에서 이교도 빌라도가 하나님을 경건히 믿고 있던 유대인들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의로워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빌라도 역시 사단의 노예, 아니 주역배우였지 않습니까? 흑암의 세력을 잘 몰라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자신의 영적 상태만 제대로 깨달았어도 그런 오해는 생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중생함으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의로운 행동을 많이 했던, 어떤 경건한 종교를 믿고 있던, 심지어 교회 안에 어떤 중직을 맡고 있든 간에 사단의 노예입니다. 절대적 악의 하수인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그 배후에 있는 악의 세력은 철두철미하게 저주해야 하고 또 그 거짓에 묶여 있는 불신자들을 더더욱 안타깝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가 선과 악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면 미혹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마저 상실됩니다. 어차피 신자나 불신자나 조금 덜 선하거나 조금 덜 악한 자들인데 근본적인 변화가 그리 시급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들 사이에 근본적 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인간들끼리 모여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는 열심과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선과 악의 대결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합니다. 또 그래선 불신자들을 여전히 사단의 노예로 평생 남아 있게 만듭니다. 어쩌면 선과 악의 경계선을 스스로 무너뜨린 교회와 교인들마저 사단의 노예 신분에서 빠져나온 적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절대 조화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는 귀신들린 자는 고쳐 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지만, 귀신은 돼지 떼에 들어가 함께 몰살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당시 사람들은 오히려 악은 살리고 예수님은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앞장서서 절대적 악은 용인하면서 사람들은 귀신들린 채로 놓아두려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선과 악은 마치 동과 서과 영원토록 만날 수 없듯이 양쪽 끝에서 마주보고 있습니다. 선이 아니면 악이며 악이 아니면 선입니다. 모든 인간도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절대적 선의 편에 서있는 것이며 그 은혜 밖에 있으면 절대적 악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아무런 죄 없는 당신을 빌라도의 권유도 뿌리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마저 동에서 서가 멀듯이 던져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인간 지성이 고급하게 변하고, 인간 사회에 도덕적인 선행도 많이 이뤄지며, 종교 간에 모든 것을 관용할 만큼 종교인들이 거룩하고 의로워져도, 예수 없이는 절대적으로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빌라도의 법정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아도 흑암의 세력의 가공할 위력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선과 악은 절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기에 절대적 하나님 아니고는 인간의 악의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21/2010  

김순희

2010.05.23 13:19:54
*.161.88.93

선과 악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과 지혜가 필요할 때인 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함이 최고라 여기며 선과 악의 대결에는 전혀 참여치 못하는 우를 범할까 두렵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18 (출2;23-25) 한국에 전쟁이 날 것인가? [2] 운영자 2010-08-03 798
717 (막1:1-4) 세례 요한과 키 재기 시합 [2] 운영자 2010-07-28 810
716 (벧전3:19,20) 백이십 살까지 살 수 있는 비결 [4] 운영자 2010-07-27 827
715 (창1:16) 너무 엉터리 같은(?) 창조기사 [3] 운영자 2010-07-26 623
714 (롬5:6-8) 네 번이나 확증하셨다. [3] 운영자 2010-07-22 678
713 (롬5:5,6) 철면피가 되어 있는가? [8] 운영자 2010-07-21 823
712 (롬5:3,4)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3] 운영자 2010-07-20 781
711 (롬5:1,2) 현재완료형 구원 [2] 운영자 2010-07-20 820
710 (마21:21,22)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믿음 [4] 운영자 2010-07-15 978
709 (마27:16-18)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5] 운영자 2010-07-12 732
708 (시102:23,24) 우주의 영원한 두 진리 [4] 운영자 2010-07-10 801
707 (왕하 7:3,4) 인생은 각본 없는(?) 드라마. [2] 운영자 2010-07-08 762
706 (왕하7:2)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1] 운영자 2010-07-05 681
705 (왕하 6:33-7:1)기독교와 숙명론 [2] 운영자 2010-07-01 735
704 (마8:5-7) Preview와 Main Feature [5] 운영자 2010-06-08 783
703 (요19:26,27) 신자 가정의 세 가지 모습 [3] 운영자 2010-05-23 1043
» (눅23;22,23) 집단광기에 붙잡혀 있는 불신 세태 [1] 운영자 2010-05-21 842
701 (왕상18:37-39) 예수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2] 운영자 2010-05-16 895
700 (고전14:31-33) 목사의 설교는 신자에게 분별 받아야 한다. [6] 운영자 2010-05-14 996
699 (시119:89-92) 말씀이 하늘에 서있는가? [1] 운영자 2010-05-10 1023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