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1-4) 세례 요한과 키 재기 시합

조회 수 810 추천 수 38 2010.07.28 22: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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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과 키 재기 시합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1:2-4)


예수님이 분명 세례 요한을 두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칭찬하셨음에도(마11:11) 신자들의 평가나 인식은 훨씬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는 주님의 이어지는 설명 때문일 것입니다.

일단 천국에서의 비교이기 때문에 그가 천국에 가지 못했기에 작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예고만 했지 실제 주님의 사역을 목격하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신구약 66권으로 완성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성령님의 조명으로 체계적으로 깨달을 기회도 못 가졌기 때문입니다. 현대 신자가 십자가 복음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얼마나 귀한지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여자가 낳았다는 것은 육신의 몸을 입은 상태를 말합니다. 또 천국에서의 비교가 아니기에 요한이 모든 이 중에 가장 컸던 영역은 바로 그가 생전에 활동한 이 땅에서였습니다. 그럼 메시아가 오신다는 광고를 널리 퍼트린 까닭입니까? 결론만 따지면 물론 그러하지만 그 이전에 몇 가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메시아 예수님을 빼고는 성경에서 그 출현이 예언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은 삼십 냥에 메시아가 팔릴 것이라는 예언(슥11:12)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배반 사건에 관한 것이었지 유다라는 인물에 관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마가가 인용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는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낸다.”고 분명히 어떤 한 인물을 예언했습니다.

요한은 주님 오시기 600년 전에 예언 되었던 바로 그 하나님의 사자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베드로, 나아가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요한 사도를 포함 어느 누구도 성경에 예언된 인물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만 유일합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가장 큰 조역으로 선발되었고 그 임무를 잘 수행했던 자였습니다.

그가 한 일은 오직 예수님의 오셔서 하실 일에 관한 선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그의 외침으로 인해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 가시적으로 이 땅 위의 죄인들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지해야할 사항이 또 있습니다. 그가 복음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해서  왕의 행차 맨 앞에서 질서 잡는 경관이나 나팔수 역할로 그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divine identity)을 세상 사람들 앞에 제일 먼저 밝히 가르쳤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복음을 시작시키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까지 세례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입교(入敎) 예식 수준에 머물었습니다. 유대의 율법과 성전 제사 등 종교 의식을 지키겠다는 서약식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미는 사실상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요한이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전파라는 용어 자체가 없던 일을 새롭게 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가 어디에서 어떤 행색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까? 너무나 척박하고 황량한 광야의 요단강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른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도 죄 사함의 세례였습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석으로 치장된 에봇에 관을 쓰고 경건한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과는 정반대의 장소와 행색이었습니다. 어떠한 종교적 제도, 관습, 세력과도 완전히 동떨어진 외톨이였습니다. 비록 몇몇 제자가 따르긴 했지만 그와 비슷한 처지였을 뿐입니다.

상식적 판단으로는 미친 자이거나 메시아를 자칭하는 또 한 사람의 광신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와 소문을 듣고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5절)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다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구원과 심판을 주시는 메시야의 오심이 임박한 이때에)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3:10)라고 요한에게 가르침을 요구했습니다. 세리와 군병들도 이 회개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급기야 백성들이 요한을 두고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눅3:15)까지 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 가능성은 둘 뿐입니다. 우선 성령의 권능이 그와 그의 메시지에 충만하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심이 조금이라도 남은 유대인이라면 그가 선포하는 말씀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그의 평소 삶이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으로도 선한 영향력이 주위에 넘쳐서 그를 보는 자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미 율법에 충성하기에 개종의 세례식이 전혀 필요 없는 유대인들이 제 발로 광야까지 걸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분명 지금과는 의미가 다른 죄 사함의 세례를 요한이 전파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종교적 권세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인정도 안 받은 자가 심지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모든 이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몇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만 듣게 됩니다. 가장 존경 받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장차 올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을 들어먹었습니다. 죄 사함의 세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부터 맺으라고 야단맞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다시 세례 받을 필요 없이 구원을 확보했다고 감히 자부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도덕적 종교적으로 물세례조차 받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유대 대중들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절감했습니다. 그 동안의 제도적, 형식적, 가식적, 의무적 종교 관습에 염증을 느낀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도무지 영혼의 평강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자들이 스스로 자기 배를 채우기에 바쁘다보니 정작 그 양 떼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다가 죽음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판국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즉, 때가 차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예루살렘 성중에까지 들려온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항상 도덕적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고 영적 기갈이 들린 사람들의 심령을 시원케 해주는 청량제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것도 유대 사회의 기득권과는 전혀 무관하고, 아니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과만 교통하는 자에게서 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성중 사람들로선 이번에야말로 종교적 정치적 권세나 꿈꾸는 자칭 메시아가 아니라 믿을만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껏 이뤄졌던 종교적 세례를 도덕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던 첫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세례는 장차 메시아가 주실 것과는 달리 그분의 오심을 전하는 자로서의 단계에 머물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마저 구원의 방도를 물으러 오게 했고 당신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메시아가 와도 어느 누구도 도무지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도덕적 영적으로 자신을 재점검시키며 정작 그리스도가 올 때에 그분을 제대로 맞이할 준비를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복음도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 땅에선 요한이 복음을 시작시킨 것 또한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 재조명 해봤는데 뭔가 찔리는 사항이 없습니까? 그는 우리와 아주 다른 여자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즉 성경 역사 속의 한 인물로만 머무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천국에선 그가 우리보다 더 작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던 당시로는 선발대 메신저로서 세례 요한이 분명 필요했습니다. 그럼 십자가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금은 그런 자가 필요 없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은 바로 당시 예루살렘 성중에 살던 유대 대중과 같지 않습니까? 그럼 그들에게 복음을 시작시킬 자도 바로 우리 신자들 아닙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3-15)

구원은 복음의 들음에서 시작되며 또 그 들음은 전파하는 자를 통해서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나 지금이나 복음은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서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분이 그리스도 되심을 알고 믿은 자는 오직 요한뿐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신자가 그러합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지녀야 합니다.

길에 나가 노방전도 하듯이 외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요한처럼 광야에서 털옷을 입고서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일상생활 자체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이전과 정반대가 되어서 삶의 방식과 목표가 세상 사람과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우리를 볼 때에 죄를 회개하고픈 마음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신자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광채 때문에 그들 영혼에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껏 자기들이 살아온 인생이 그릇되었음을 우리 인생을 통해 깨닫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형식적, 가식적, 현실적 지도자들을, 특별히 거짓 목자들을 향해서 그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주면서 회개하라고 경고까지 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죄에서 구원하는 십자가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끝까지 증거해야 합니다.

한 번뿐인 신자의 삶을, 그것도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보배 같은 능력으로 모시고 살면서 이 땅에서조차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작은 자가 될 수는 없지는 않습니까? 천국에서 실제로 요한과 키 재기를 할 때에 작으면 어쩌시렵니까? 우리가 부끄러운 것은 그렇다 치고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셈 아닙니까? 복음의 은혜와 권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성시켰지만 그것을 이 땅의 죄인 앞에서 가시화시키는 일은 바로 보내심을 받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입니다.  

7/28/2010

김유상

2010.07.29 05:52:18
*.234.29.38

올인! 죽을 때가 가깝다 여기니, 남은 생 동안 내가 우선시할 일이 바로 세례 요한이 한 일과 예수께서 한 일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하나님 나라를 알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알려 주는 일을 하다가 불려 가기를 원합니다.

정순태

2010.08.01 08:25:30
*.75.152.231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을 나무라는 장면은
서리집사도 못되는 성도가 목사님을 야단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

그러나 사실은
참 말씀 받은 자가
엉뚱한 것을 붙잡고 있는 자들을 깨우치고 경계한 것이지요........

직분에 관계없이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을 수 있는 이곳이기에
늘 감사하며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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