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9:19-21)돌아갈 다리가 남아 있는가?

조회 수 1355 추천 수 108 2006.09.20 01: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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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갸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손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왕상19:19-21)


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가 될 엘리사가 소명을 받고 그에 반응하는 장면입니다. 그렇다고 본문의 내용이 전문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딤후1:9)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기시기 위한 것입니다.(고후4:18,19)

따라서 예수를 믿고 그 분을 좇아야 하는 신자도 엘리사와 동일한 부르심과 반응이 반드시 있었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직접 먼저 찾아와 자기를 지명해 불러내었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 쪽에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여 노력하고 있는 정도로는 교인은 될지언정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스로 믿으려 결단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분의 인격적인 부르심에 맞추어 신자의 개인적인 반응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갈1:15,16) 하신다는 바울과 같은 고백과 함께 그분의 기쁘신 뜻에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런 소명과 응답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생 중에 딱 한 번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또 바로 그 순간이 정작 신자로서의 새 인생이 출발하는 시점입니다. 그 이후로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는 진정한 고백과 실제적인 헌신이 없었다면 신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들 눈에 믿음이 좋아 보일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결단으로 선하고 경건한 삶을 살겠다고 노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엘리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열두 겨리(24마리)나 되는 소를 가졌다면 당시로선 상당한 부자였을 것인데도 그 전 재산을 아무 미련 없이 다 버렸습니다. 혹시라도 엘리사가 부모와 동네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이별 잔치를 벌인 것을 두고 그가 세상에 미련을 가졌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그는 그 전에 이미 엘리야에게 마지막 이별을 뜻하는 당시의 관용적 표현인 “부모와 입맞추게”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 24마리나 포기한 것도 대단했지만 소의 기구를 전부 불사른 것이 기실 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소만 버리고 기구가 남아 있던지, 기구만 태우고 소가 남아 있다면 언제든지 되돌아가 농사를 다시 지을 수 있습니다. 이전의 삶에 연관되는 것들은 새로운 소명을 위해 완전히 다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 미련과 주저 없이 말입니다.  

고대 전쟁에선 지나온 다리를 불태워 없애버리곤 했습니다. 온 길로는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의 표시입니다. 반드시 승리해서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한 후에 다른 길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또 정복한 후에는 이미 자기들 땅이 되었으니 언제든 필요하면 다리는 다시 건축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24마리나 되는 소를 버리고 그 기구마저 다 불태운 것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작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은 신자는 처음 그 분을 만나는 순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다리를 스스로 모두 불태워 없애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성령이 간섭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되돌아갈 다리가 단 하나도 없어진 자가 신자입니다. 예수를 포기하느니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기 생명보다 주의 인자가 더 좋아진 것입니다.  

돌아갈 다리가 없는 군인은 적진에서 죽어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적진을 정복해야 하고 정복하지 못하면 당연히 그곳에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를 하나님이 아직도 환난과 모순과 질곡과 눌림이 있는 이 땅에 남겨두시고 때때로 너무나 큰 고통을 겪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신자의 평생이 돌아갈 다리가 없을 만큼 사단과의 생명을 건 격렬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또 돌아갈 다리가 없는 군인은 앞만 보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볼수록  시간과 능력의 낭비입니다. 뒤에 있는 실패를 돌아보면 반성하고 분석하여 수정할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련과 후회와 실망이 더 생깁니다. 뒤에 있는 성공 또한 돌아보면 감사와 용기와 새 각오가 생길 수 있지만 자랑과 교만과 안주하려는 나태가 더 생기며 반드시 인간적인 명예가 덧붙습니다.  

불신자는 세상의 형통을 위한 싸움, 즉 사단과 협력하거나 최소한 방해를 받지 않는 인생을 살기에 뒤를 돌아보아도 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고 주위에 너무나 불쌍한 영혼들이 신음하고 있기에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육신적 영적 재충전을 위한 잠시 동안의 휴식까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싸울 싸움을 휴전(休戰)하거나 특별히 후퇴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런 휴식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장래 일에 대한 그분의 인도함을 바라는 ‘겸손’이 포함되어집니다. 만약 이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거나 그 외에 다른 것이 생겨 있다면 그것은 휴식이 아니라 사단에게 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바울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일보다 앞으로 할 일이 훨씬 더 많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리를 태운 군병은 앞에 있을 전쟁에만 몰두하기에 실적을 자랑할 틈이 없습니다.

신자는 인생에서 딱 한 번만 뒤를 돌아보면 됩니다. 또 그럴 때가 어느 신자에게도 다 옵니다.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이제 이 땅에선 더 이상 앞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앞이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앞만 바라보고 사단의 왕국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최소한 그 성벽에 금이라도 내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순간 농부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되돌아 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신자도 예수를 믿는 순간 불신자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되돌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불신자 시절의 삶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리가 있다면 다 불태워 없애버려야 합니다. 바울이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빌3:7) 듯이 말입니다.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 공군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편도(片道)만 비행할 수 있는 연료를 채웠다고 합니다. 아예 돌아올 방도가 없었기에 무조건 가서 자폭하고 죽었어야 했습니다. 비록 그릇된 목적일지라도 대부분 애국심에 불탄 자들이었지만 그중에는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죽어간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던 그들은 단지 전쟁을 발발시키는 촉진제로 소모된 것이었을 뿐이며 전쟁의 승리는 아예 맛도 보지 못했습니다.

돌아갈 다리가 없는 신자는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가 싸우는 싸움은 어느 누구도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거나 친구 따라 교회를 가는 것도 아니요,  성도들 앞에 체면이 있어서 일부러 경건하고 고상한 척 하는 것도 아니요, 담임 목사의 눈치가 보여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어떤 환난과 핍박이 따르더라도 날마다 그 속에 눌리는 일은 모든 성도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어야 합니다.(고후11:24-230)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에서 너무나 힘들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면 천국에 면류관을 준비해놓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서부터 사단과의 싸움은 항상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신자란 언제 어디서 어떤 일과 누구를 만나더라도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당당한 인생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습니다. 신자가 가는 곳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를 악물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구호 외치며 혈서 쓰듯이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도 오직 윤리적 잘못을 범하지 않고 종교적 업적을 쌓기 위한 싸움만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히려 불타지 않아 돌아갈 수 있는 다리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

엘리사가 열두 겨리의 소를 다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돌아갈 다리를 전부 불 태워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또 그 싸워야 할 싸움이 자신의 평생을 걸만큼 너무나 중대했기 때문 아닙니까? 엘리사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주시는 능력으로 바알의 선지자들을 혼자서 물리치는 모습을 봤습니다. 또 지금 아합과 이사벨의 폭정 아래에서 신음하고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져 추해진 동족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항상 가슴 아파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혹시라도 예수 믿기 전의 삶과 인생으로 되돌아갈 다리가 하나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지금도 그 다리를 열심히 보수해선 야간에는 슬쩍 넘어갔다가, 아니 주중 6일은 항상 그쪽으로 넘어가 살고 있다가 주일에만 다시 다리를 건너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신자를 결코 이 추하고 힘든 세상에서 자폭하는 가미가제 특공대로 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뿐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의 권세가 함께 하고 있어서 이 땅의 승리 또한 보장되어 있습니다. 단 우리가 그 진리를 확신하기에 돌아갈 다리를 다 태워 없앴다면 말입니다.

그 승리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또 그 승리의 내용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사단의 농간으로 이 땅에서 방황하다가 아무 의미 없이 죽어 없어져버릴 불신자들이 복음의 용사로 바꾸어지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십자가 군병들끼리 모여 총기만 갈고 닦아서 교회에서 주는 훈장을 누가 많이 달았는지 서로 시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요컨대 세상을 승리한 예수님의 권세도 미처 알지 못하고 또 사단에 묶여 있는 영혼들이 전혀 불쌍하지도 않은 것 아닌가요?  

9/19/2006


김문수

2006.09.20 02:47:35
*.74.150.185

아멘!!!!!!

백운산

2006.09.20 07:52:57
*.85.148.186

귀하게,소중히 읽었습니다 주여! 감사드립니다!
목사님,문수형제님 남은 오늘의 시간도 세상시간이 아닌 하늘의 시간을 보내시기 기도합니다 -아멘-

김문수

2006.09.20 11:11:15
*.74.150.185

성함이 너무 터프하십니다!!!
백운산 형제님!!! 샬롬!!

국중후

2006.09.20 12:13:33
*.163.7.253

신자를 하나님이 아직도 환난과 모순과 질곡과 눌림이 있는
이 땅에 남겨두시고 때때로너무나 큰 고통을 겪게 하시는 이유가
생명을 걸고 적진을 정복해야 하고
정복하지 못하면 당연히 그곳에서 죽는 수밖에 없는
사단과의 생명을 건 격렬한 싸움이기 때문 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겠습니다. 샬롬!!!

날마다순종

2021.01.11 14:44:52
*.14.99.253

가끔식 성경의 많은 인물들을 보며 막연히 그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정작 신자로서 소의 기구들을 모두 불태운 엘리사의 저 결단이야 말로 가장 먼저 닮아야할 본이라 깨닫고 배웁니다. 그리 될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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