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독후감]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을 읽고.

조회 수 3712 추천 수 166 2006.08.24 20: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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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정순태 집사님이 쓰신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 놓음"에 대한 독후감에 대해 저자이신 이용규님이 직접 해명한 글입니다. 이 글을 올리게 된 사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전에 이 사이트를 방문해 주신 최재혁님이 그 독후감을 퍼가기를 운영자에게 이멜로 요청해와서 정순태님에게 사전 양해를 구하지 않고 운영자 독단으로 허락했습니다. 최재혁님은 그 독후감을 바로 이용규 선교사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습니다.(운영자로선 그러리라는 것을 사전에 몰랐습니다.) 당연히 그 독후감을 읽은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이 해명의 글을 자신의 홈피 게시판에 바로 올리게 되었고, 또 그 해명의 글을 최재혁님이 이멜로 운영자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물론 저자이신 이용규님이 제 홈피에 올려도 된다는 허락을 미리 받았다는 연락과 함께 말입니다. 정순태님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일은 진행되었고 또 이렇게 올리는 것도 집사님께 사전 양해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집사님께서  이해해 주실 줄 믿고서 말입니다. ^0^)

저자가 해명하고자 한 정순태님의 독후감 중의 "옥의 티" 부분을 비교하며 읽어 보시라고 아래에 함께 첨부하였습니다. - 운영자



제목: 지도자 비판에 대한 단상

글쓴이: 이용규





"우리가 우리의 영적 지도자를 판단하는 일은 우리에게 위임된 책임과 권한을 넘어서는 위험한 일이기에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루실 영역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시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본성이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p.173).

제가 "내려놓음"에 쓴 이 부분에 대해 아마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에 대해 상처가 있는 분들이 이 부분을 쉽게 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들이 이 부분을 "면피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겠지요.  실은 목회자들이 이 부분을 남용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내용을 다룬 것은 목회자들을 배려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부분은 바로 권위에 상처받은 풀뿌리 성도들을 배려하는 내용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안수받지 않은 전문인 사역자로써 목회자 분들의 의식에서 보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게 상처로 남느냐 아니면 포용하고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건강함이 내 안에 있는가 입니다.

먼저 제가 사용하는 용어 중에 "판단"과 "분별"이 다름을 설명해야 하겠네요.  예수님이 판단받지 않으려면 판단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부분에서 제가 정의하는 판단은 바로 상대방을 하나님의 눈이 아닌 내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 판단을 하면 판단의 영에 묶이게 되지요.  상처를 받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관계에 금이 가게 됩니다.  연합이 깨어지고 파당과 분열이 있고 분노의 영이 자신을 사로잡게 됩니다.  

분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지혜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보는 힘입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할 때 바로 분별의 능을 가지라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지만 그 안에 분노와 상함이 자리잡지 않습니다.  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노여움으로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분별은 삼가야 할 때와 용서할 때를 알게 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 안에는 많은 긍정적인 비판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익한 일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인정하기 어려운 지도자들이 많은 것들을 봅니다.  하지만 비판을 하는 과정에서 자칫 마음에 판단의 영에 묶이기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메마르게 됩니다.  내 안에 성령 충만이 소멸되고 기쁨을 잃게 되지요.  

지도자를 비판하게 되는 경우 많은 경우 상처가 함께 작용함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미움과 원망이 함께 표출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문제 때문에 나타나는 특정한 반응을 상대의 잘못으로 간주하게 만듭니다.  자신은 항상 의로운데 상대방 잘못 때문에 자신의 영이 피폐하고 있다고 진단하게 하고 자신의 영이 메말라 가건만 돌이킬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지도자에 대해 원망함이 자리잡는다면 말씀과 예배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 영혼에 치명적인 독소를 끼치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 지도자만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의 모든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되지요.  왜냐하면 미워하고 보복하게 될 때 우리 영혼이 죄의 독소로 인해 죽어가게 되기 때문이지요.

나는 잘못된 지도자가 얼마나 잘못하는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단 그로 인해 권위에 대해 상처를 받은 많은 영혼들이 묶임에서 풀려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느끼고 살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른 채...

실은 판단의 대상이 영적 지도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가 문제지요.  제가 영적 지도자에 대한 판단을 언급하는 것은 그 판단으로 인한 묶임의 피해가 더 크기 때문일 따름이랍니다.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안타까움이나 긍휼보다 분노와 미움의 반응이 나타난다면 우리의 영혼이 가진 문제에 대해 성령 안에서 검진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리가 주는 자유케 하심을 경험할 수 없지요.  

결국 원수갚는 일은 주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보다 더 잘 다루실 수 있음을 신뢰한다면 판단까지도 하나님께 맡겨드릴 믿음이 생겨납니다.



[정순태님의 독후감 중에서 옥의 티 부분]
  
>♧ 별지 : 앗! 옥에 티 발견!!!
>
>   하지만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아주 훌륭하신 선교사님의 생각들 중에도 신중하게 이해하여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 곳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옥에 티라기 보다는, 선교사님의 인간적인 모습(한계)을 보여주는 하나의 바로미터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
>   원문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지도자를 판단하는 일은 우리에게 위임된 책임과 권한을 넘어서는 위험한 일이기에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루실 영역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시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본성이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p.173).
>
>   참으로 은혜롭고 성경적인 말씀 같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목사님들이 면피용(책임회피용)으로 즐겨 사용하시는 말씀이기에, 평신도들이 항상 듣는 내용입니다.  
>
>   그러나 이 말은 비교적 타당하지만 우리는 좀 더 깊은 것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 원문에는 상당한 오해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
>   먼저, 큰 시각에서 원문은 성도들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렇다면 원문 자체는 맞습니다만, 적용대상에서 착각을 일으켰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즉, 이 자세를 지녀야 할 대상을 평신도로 제한시켜 버렸다는 점입니다. 잘못을 행하는 영적지도자들은 이 자세 이행 의무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지도자들에게 더욱 엄격히 적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평신도와 지도자 중에서, 누가 더 낮아지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그리스도의 모습과 본성이 자라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신도가 더 그래야 합니까? 아니면 지도자가 더 그래야 합니까? 답은 “모든 성도들이 그래야 하지만, 특히 지도자가 더욱 그래야 한다.”입니다. 따라서 원문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평신도들이 더 성숙한 지도자들의 잘못까지도 감싸줘야 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논리적으로(당연히 성경적으로도) 틀린 생각이다.’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국 ‘지도자의 명백한 오류에 대해서도 모른 척 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할 생각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우리 신앙의 손실 사례를 찾는 것은 여반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   둘째, 영적지도자(주로 목사와 신학자와 선교사들)의 소명에 관한 오해입니다. 모든 목사들은 자기 자신의 직분에 대한 신적 부르심(소명)을 확신합니다. 이런 저런 설명들을 잊지 않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매우 신중한 성경적 검토가 요구됩니다만, 여기서 이를 다룰 수는 없겠기에, 매우 함축적으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신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목사로의 소명은 단순히 개인적 확신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객관적인 공증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무관한 거짓 선지자들이 무척 많으므로 조심할 것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현직 목사라 할지라도 부르심을 의심받을만한 이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이냐고요? 그 사람의 언행(열매)입니다! 만약 어느 목사의 행동에서, 평신도를 억압하고,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재정운용이 불투명하고, 이런 저런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는 등등이 발견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항상 불완전한 자를 쓰실 수밖에 없으십니다(완벽한 자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적인 자질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히 경험했다면 그는 반드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된 모습도 없으면서 단지 목사 직분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명백한 오류(잘못)가 있는데도 이를 지적(판단)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지자에게 속는 첩경일 수 있습니다. 만약 목사라는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변화된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지도자 인정 여부를 진지하게 숙고해야만 할 것입니다.
>
>   셋째, 평신도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어느 성도가 만민교회나 구원파나 JMS 등 이단에 빠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이단의 지도자들은 “나는 이단이니까 너는 속히 나를 떠나라.”고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나야말로 진정한 목사이므로 절대로 떠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들이 볼 때, 이단에 빠진 성도가 무척 불쌍해 보입니다. 자, 이제 그 평신도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어찌해야 합니까? 이단 지도자들을 성경에 비추어 검토하고 결국은 판정(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그 집단에서 뛰쳐나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의 영혼이 삽니다. 자,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재록이나 정명석이나 박옥수 같은 자들(소위 지도자들)입니까? 평신도인 성도입니까? 이 판단의 주체는 오직 평신도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들로부터 도움받기는 하겠지만, 최종적인 결단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평신도가 스스로 지도자(목사)를 판단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파에서 빠져 나온 성도를 잘했다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그 잘한 수단이 뭔지 아십니까? 그의 영혼이 살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바로 ‘판단’인 것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확인한 결과인 것이지요. 이들은 명백한 이단이니까 쉽다고요?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평신도 입장에선 절대로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좋습니다. 이단은 그만 둡시다. 현재의 범기독교 교파중에는, 관점에 따라 명백한 이단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교파들이 있습니다. 여성신학 해방신학 등을 포함한 자유주의파와 극단적인 은사주의파 등도 그렇고, 특히 천주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자, 여기에 소속된 성도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평신도는 일체 판단해선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냥 그곳에 몸담고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판단하고 나와야 합니까? 저는 평신도가 지도자들을 판단해 보고 절대적으로 뛰쳐나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모든 판단권을 하나님 당신께만 귀속시키시지 않으셨음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의 극단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최종적인 정죄권과 일상적인 판단권(선택권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을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최종정죄권은 오로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성도의 생존기간 내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판단권은 성도의 책무입니다! 성도는 때론 자유의지로서 당당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는 과감하게 이를 부정하고 떠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런 행동은 판단이 전제되지 않는 한 결코 행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판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 영적인 문제는 더욱 엄격한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모든 영을 다 믿으면 큰 일 납니다=요일4:1).
>
>   넷째, 참으로 어려운 면을 다루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흔히 “목사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목사의 잘못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징계하실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는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묵인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원문의 뜻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징계를 하신 경우도 많지만, 모든 인간의 과오를 직접 처결하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치시는 경우가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상당 부분을 인간들에게 맡겨 놓으셨습니다(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잘못들을 즉결처분하신다면, ‘왜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는가?’라는 우문에조차 답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튼, 목사가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반드시 현생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잘못된 상태 그대로 목사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너무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지요(문선명 같은 이가 80세 넘도록 호의호식하며 장수하는 이유입니다). 도덕적 윤리적 문제 뿐 아니라 영적인 오류를 범해도, 목사 직무는 계속 수행하게 됩니다. 이때 평신도는 어찌해야 됩니까?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유혹에도 넘어가야 합니까? ‘기복신앙의 진수와도 같은 삼박자 축복론’에도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까? 아니면, ‘영적 피가름 행사’(통일교)에도 참여해야 합니까? 절대적으로 아닙니다! 성경은 영분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영분별의 임무는 지도자가 아닌 말씀을 받는 자들(평신도들)에게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영의 분별은 성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첩경이기도 합니다!
>
>   끝으로, 최종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의 인도를 받으면 어찌됩니까? 둘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 인도받는 자가 소경이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인도받는 자가 눈을 뻔히 뜨고, 소경 인도자의 잘못된 인도를 묵인한다는 것은 죄악입니다.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그리로 가면 하수구에 빠진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이 상황이 되면 항상 제기되는 우문(愚問)을 살펴야 합니다. 즉, 목사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대변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말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목사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제한하셨을까요?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루 속히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훨씬 정통성을 지녔고 그 사상의 깊이가 깊기 때문입니다. 또 신부들의 윤리성이 목사들의 그것보다 훨씬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닙니다. 성경은 목사든 평신도든, 갈급한 심령으로 읽는 자에게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감동으로 깨우침 받은 진리는 서로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성이 깊은 목사가 더 많이 깨우침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평신도이기 때문에 성경을 전혀 깨우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어쨌든, 성경을 상고하여 ‘아니다’라고 깨우쳤다면, 직분이 무엇이든 간에 알려 주어야 합니다. 장로가 먼저 깨우쳤다면 미처 모르고 있는 목사에게 경고해 줘야 합니다. 안수집사가 먼저 깨우쳤다면, 이 경우 눈 뜬 자는 안수집사이고 목사는 소경입니다. 정말로 깨어있는 목사라면, 안수집사의 경고를 듣고, 곧바로 성경을 묵상하며 제 자리를 찾게 됩니다(즉시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는 목사는 진짜 소경일 가능성이 크다 할 것입니다. 교회란 각자 깨우친 하나님의 뜻을 서로서로 나누며 그에 따라 사는 삶의 현장입니다. 아울러 교회란 목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 한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임을 확인받는 곳입니다. 목사만 유일한 교회지도자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때, 현재의 교회 모습은 성경 본래의 의미에 보다 근접된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
>   성경은 성도들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울 것도 요구합니다. 원문은 오직 비둘기만을 강조하고 뱀은 제거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관한 완전한 이해라 하기 어렵습니다. 반쪽짜리 이해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순수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비둘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를 슬기롭게 활용함으로써(뱀), 바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

김문수

2006.08.25 03:31:34
*.74.203.199

어느분 말씀이 옳다 아니다를 떠나서 판단과 분별의 경계선은
때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심을 믿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두분께서 말씀하시는 판단과 분별의 경계선은
때와 환경 인물에따라서 그 경계선이 하나님의 뜻에따라 조금씩 달라질수있으니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다고만 말할수없는 상황인것같습니다.
중요한건 하나님의 선하신뜻을 이루는데 두분의 관점을 다 사용하실수있다는것같습니다.
신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영성이 높은신자라도 섣불리 속단하기 어려운문제인것같습니다.
열매를 보고 판단과 분별을해야하는상황과 그시점과 그이후에 신자본인의 마음상태를 어찌해야하는지에대한
두분의 의견은 신자로서 둘다 필요한요소라 생각합니다. 샬롬

정순태

2006.08.25 07:10:40
*.95.73.2

또 분란을 불러 있으켰는가요?

이용규 선교사님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듣는 견해입니다만, 저는 다소 의견을 달리합니다.
(선교사님보다 신학적 논리적으로 더 완벽한 책이 있습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의 "순종"(두란노)이 그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더 심한 반론을 제기했지만 공개하지는 않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기왕 문제가 됐기에 가만 있기 뭐해서
이 선교사님 홈에 사과와 변명의 말씀을 올려 드렸습니다.

제가 '목사순종' 이론에 크게 반대하는 이유는
정말로 참는 도사여야 할 목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힘없고 빽없는 평신도들만 무겁디 무거운 인내의 멍에를 수십개씩 걸머져야 하는 현실에 있습니다.

분명 아픔이 있기에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이 잘못이라면,
감히 거룩하신 목사님들께 해서는 안 되는 망발이라고 하신다면,
더 이상은 아무 말도 드릴 수 없겠지요.

허나, 분명한 것은 지도자의 책임이 더 막중하다는 것입니다!!!!!

*** 이 리플은 이 선교사님께 대한 반론도 아니요 제 견해에 관한 억지 주장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제 문제들은 어차피 성도 각자각자가 선한 영성으로 취사선택해야 할 부분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견해에 더 공감되느냐는 읽는 자 고유의 권한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더 이상 불필요한 논쟁은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국중후

2006.08.25 12:59:20
*.74.203.199

정순태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 합니다.
제가 거의 비슷한 환경(논쟁의주제)을 경험해 보았는데 결론은 정순태님이 옳습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도움을 통해 많은 간증을 할수 있을정도로 인도함을 받았고,또한
제가알고있는 믿음의 형제들도 모두다 정순태형제님의 의견에 만장일치로 찬성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형제님에게 항상임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 만세!!!!!!! 만만세!!!!!!!!!!!!!!!!!! 샬롬

김유상

2006.08.28 20:27:52
*.170.40.27

안타깝게도 이용규 선교사께선 정순태 형제님의 포인트를 놓치고 계시든지 아니면 무시하고 계신 듯합니다. 해명 중 다음의 대목들이 특히 그런 생각이 들게 합니다.

"지도자를 비판하게 되는 경우 많은 경우 상처가 함께 작용함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미움과 원망이 함께 표출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문제 때문에 나타나는 특정한 반응을 상대의 잘못으로 간주하게 만듭니다. 자신은 항상 의로운데 상대방 잘못 때문에 자신의 영이 피폐하고 있다고 진단하게 하고 자신의 영이 메말라 가건만 돌이킬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정순태 형제님은 거짓 지도자에 대한 바른 분별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용규 님께선 첫째, 정순태 형제께서 마치 바른 지도자들까지도 비난하고 있는 듯이 보이게 썼고 둘째,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실은 본인에게 문제가 있으며 그로 인해 지도자에게 애매한 잘못을 씌운다는 식으로 읽히게 씀으로써 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잘못된 지도자가 얼마나 잘못하는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단 그로 인해 권위에 대해 상처를 받은 많은 영혼들이 묶임에서 풀려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입니다. 피해자에 그토록 관심이 많다면 당연히 가해자에게 관심이 가야 합니다. 가해자가 맘대로 가해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피해자가 잘 치유되기를 바랄 뿐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정순태 형제께서 지적한 옥의 티에 이용규 선교사의 답변이 또 하나의 티를 더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낭여

2019.02.25 07:33:35
*.20.253.224

 이용규 선교사님은 "판단과 분별은 다르다. 선교사님이 판단하지 말라고 쓴 내용을 분별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명하신 것으로 보이는데요. 핵심으로 간단히 해명하셨다 생각됩니다. 정순태 집사님이 옥에 티라고 한 부분들(분별)은 하면 되겠죠(판단이 아니라 분별이므로).

김광민

2007.07.18 09:48:07
*.38.229.253

경험하지 못한것에 대한 선교사님의 글 입니다 안타까운것은 거의 대다수의 목사나 선교사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지요 목사나 선교사 사역자의 관점에서 자신들도 성도의 한사람 임을 잊는 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이고 종이고 성도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항상 평행선을 달리지요 관점의 출발이 건너편 레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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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퍼옴]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축사 [1] 운영자 2005-07-19 3080
96 [독후감] 프랭크 비올라의 “1세기 관계적 교회”를 읽고 [7] 정순태 2007-03-19 3041
95 [독후감] 토마스 주남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를 읽고 정순태 2005-11-24 2934
94 조선의 사도바울[김교신]과 바나바[손양원]의 숨겨진 오해 [3] 김문수 2007-01-17 2874
93 믿음의 선배 {진정한 그리스도인} [1] 김문수 2006-12-03 2807
92 [퍼옴]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의 실체 [2] 운영자 2005-10-14 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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